메뉴 건너뛰기

close

타라나키 지역 지도
타라나키 지역 지도 ⓒ taranakinz
뉴질랜드에서 가장 큰 도시는 인구 120만의 오클랜드이지만 수도는 그보다 규모가 훨씬 작은 인구 40만의 웰링턴이다. 뉴질랜드 북섬의 북쪽과 남쪽 끝에 각각 자리잡고 있는 이 두 도시를 잇는 일직선을 그어보자.

그 왼편에 마치 옆에서 본 젊은 여성의 유방처럼 봉긋한 가슴을 내밀고 있는 땅덩어리가 눈에 띈다. 이 땅이 바로 그 중심에 원추형으로 솟아 있는 신성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불렀다는 '타라나키(Taranaki)' 지역이다.

타라나키는 뉴질랜드 최고의 치즈가 생산되는 '젖의 땅'이며, 그 앞바다에서는 '산업의 젖'이라고 할 천연가스와 석유가 생산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할리우드의 대작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의 촬영 현장으로 알려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관광객들을 불러모아 뉴질랜드 관광수입의 젖줄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기도 하다. 이래저래 타라나키는 땅덩어리의 생김새처럼, 뉴질랜드를 먹여 살리는 데 한몫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경제적으로 큰 역할을 하기 이전부터 타라나키 지역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도 매우 유서 깊은 땅이었다. 14세기에 마오리족들이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대규모 원정을 통해 이곳에 이주해서 정착하기 이전부터 타라나키 지역에는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있다.

가을이 한층 무르익어가던 지난 4월 중순, 2주간의 방학을 맞은 딸아이와 아내와 함께 타라나키 지역을 여행하려고 계획한 것은 바로 그러한 역사적ㆍ문화적 흔적에 대한 호기심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7박 8일간의 넉넉한 일정은 타라나키의 아래쪽인 왕가누이(Wanganui) 지역과 수도 웰링턴으로까지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넉넉하다면, 돌아오는 길에 뉴질랜드 북섬의 남동쪽 해안의 아름다운 바닷가도 몇 군데 들를 수 있을 터이다. 자, 이제 떠나자.

버려진 욕조? 아니, 양들의 물통!

아침 9시에 오클랜드를 출발한 차는 해밀턴을 지나면서 1번 고속도로를 버리고 3번 고속도로로 갈아탄다. 조수석에 탄 아내는 차가 3번 고속도로로 들어서자 홀가분한 듯 지도책을 접는다. 이제 3번을 타고 쭉 달리면 되는 것이다.

점심 먹을 기착지로 예정했던 작은 바닷가 마을 모카우(Mokau)에 도착한 시간은 12시 30분. 예정보다 30분이 앞서고 있다. 모카우는 뱅어(whitebait)로 유명하다고 해서 나는 뱅어 버거를, 아내는 뱅어 튀김을 주문해서 먹는다. 음식에 관한 한 전혀 도전적이지 않은 딸아이는 한 번 먹어보라는 우리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입에 맞는 하와이안 버거를 고집한다.

하지만 접시에 담겨 식탁에 나온 음식을 본 아내는 이내 후회한다. 작은 멸치만한 흰 뱅어를 통째로 넣어 만든 탓에 까만 뱅어의 눈알이 그대로 보여 아내의 비위를 상하게 한 것이다.

나는 조금 입에 대다가 남긴 아내의 뱅어 튀김을 마저 해치우고 대신 얼마 남지 않은 내 뱅어 버거를 아내의 손에 쥐어준다. 맛은 기대했던 것보다는 별로다.

부실한 흰 뱅어로 점심을 대충 때우고 우리는 20여분을 더 달려 해안가에 '하얀 절벽(whitecliff)'과 '세 자매(Three Sisters)'라고 불리는 기암괴석이 있다는 통아포루투(Taongaporutu)에 닿는다. 안내 책에 나온대로 비포장 길을 타고 꺾어져 들어가니 목책의 나무문이 닫힌 채 우리의 진로를 가로막는다.

절벽 위에 억새의 은색 머리카락들이 흩날리고 있다
절벽 위에 억새의 은색 머리카락들이 흩날리고 있다 ⓒ 정철용
'음,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되는 모양이구나.' 우리는 차를 그 앞에 세워두고 마른 흙먼지가 이는 비포장 길을 걸어간다. 왼쪽으로는 여름 폭염에 시든 풀밭 위에 양들이 점점이 흩어져 풀을 뜯고 있고, 오른쪽으로는 멀리 구름이 잔뜩 낀 하늘과 태즈만해를 배경으로 절벽에 억새들이 부스스한 은색의 머리카락들을 휘날리고 있다.

얼마쯤 걸어가니 풀밭에 버려진 욕조가 있다. 누가 처분하기 골치 아픈 이 쓰레기를 여기에 내다버린 모양이구나.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하고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조금 걸어가다 보니 욕조 하나가 또 풀밭에 버려져 있다. 이번에는 가까이 다가가 본다. 물이 가득 차 있다. 아, 이건 양떼들이 목을 축이는 물통이로구나. 나는 비로소 풀밭에 놓여 있는 욕조의 쓰임새를 깨닫는다.

이 욕조는 버려진 쓰레기가 아니라 양들이 목을 축이는 물통이다
이 욕조는 버려진 쓰레기가 아니라 양들이 목을 축이는 물통이다 ⓒ 정철용
그렇게 여기저기 참견하면서, 가까이 다가가면 멀리 달아나는 양들도 불러보면서 한가롭게 그 시골길을 걷는다. 구름이 많이 끼어서 걷기에 딱 좋았고 길 양쪽으로 보이는 풍경들도 너무나 한가롭고 평화로워서 예상치 못했던 이 시골길 산책이 몹시 즐겁다. 딸아이도 즐거운지 앞서서 언덕길을 오른다.

그러나 40여분을 걸어도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하얀 절벽은 가까워지지 않고 마침내 딸아이가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길은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 이어지면서 좀처럼 그 끝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거 내가 길을 잘못 들은 모양이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다음 일정을 생각해서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이쯤에서 돌아서기로 한다.

한 사진작가의 아름다운 유턴

언덕이 진 비포장 흙길을 딸아이는 처음에는 앞서서 걸었다
언덕이 진 비포장 흙길을 딸아이는 처음에는 앞서서 걸었다 ⓒ 정철용
갔던 길을 다시 돌아서 터벅터벅 걸어 나오는데 지프차 한 대가 달려온다. 아니, 이 길이 차가 들어올 수 있는 길이었나?! 나를 쳐다보는 아내의 눈에서 헛수고를 한 것에 대한 힐난이 느껴진다. 마침내 목책 나무문 앞에 도착해서 보니, 승용차 한 대가 멈추어 있고 백인 여자 한 명이 내려서 나무문을 밀어서 열고 있다.

다가가서 그 여자에게 물어보았더니, 그 나무문은 방목하는 양떼들이 달아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닫아놓은 것이지, 차량 진입을 막기 위하여 잠가놓은 것이 아니란다. 이런, 그것도 모르고 쓸데없이 1시간 20분을 허비했으니 기가 막혔다.

목책의 나무문은 방목하는 양들이 달아나는 것을 막기 위해 닫혀 있는 것이다
목책의 나무문은 방목하는 양들이 달아나는 것을 막기 위해 닫혀 있는 것이다 ⓒ 정철용
그런 우리의 표정을 읽은 여자가, 저 끝까지 걸어서 갔다 왔느냐고 묻는다. 우리는 고개를 흔들며 멀리서 '하얀 절벽'만 힐끗 보고 '세 자매' 바위도 보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랬더니 그녀는 '세 자매' 바위는 여기서 멀지 않다면서, 우리에게 그 길을 가르쳐준다.

그녀의 설명에 내가 한두 번 '뭐라고요(Pardon)?'라고 되묻자, 그녀는 자신을 따라 오라면서 차를 돌린다. 그것은 아름다운 유턴이었다. 따스한 유턴이었다. 영어가 서툰 우리가 자신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맬까봐, 그녀는 직접 자신이 나서서 그 길까지 우리를 안내하기로 한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그 지역에 사는 사진작가였다. 그날 구름이 많이 끼어 일몰이 아름다울 것으로 예상되어 절벽 끝으로 사진을 찍으러 가는 길이었다고 한다. 가던 길을 멈추고 도와준 그녀의 친절이 너무나 고마워서 우리는 캔 음료수 한 개와 오렌지 하나를 그녀에게 건넸다.

그랬더니 그녀는 정색을 하고, "이런 걸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다"라며 사양을 한다. 그래도 그렇게 주고 싶은 것이 우리의 즐거움이라고 말하자, 그제야 그녀는 마지못해 우리의 작은 사례를 받아든다. '세 자매' 바위가 있는 바닷가로 이어지는 길에서 헤어지면서도 그녀는, 지금 밀물이 들어오고 있으니 조심하라며, 당부의 말을 잊지 않는다.

당신은 최고의 가이드!

조금씩 밀물이 들어오는 바닷가에는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다. 바닷가에 불쑥 솟아있는 '세 자매' 바위들도 그저 평범한 바위일 뿐 별게 아니었다. 그나마 그 중의 하나는 작년에 무너져내려 키가 아주 작아져서, '세 자매'가 아니라 '두 어른과 한 아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좋을 듯했다.

가운데 서 있는 바위는 세 자매중의 하나가 아니라 엄마와 아빠 사이에 있는 아이처럼 보인다.
가운데 서 있는 바위는 세 자매중의 하나가 아니라 엄마와 아빠 사이에 있는 아이처럼 보인다. ⓒ 정철용
가벼운 실망을 안고 돌아서려는데 저쪽 바닷가에서 조금 퉁퉁한 아줌마 한 명이 우리를 향해 걸어온다. 우리가 멀리서 손을 흔들어 주었더니 우리에게 다가와 인사를 하면서, 이것저것 물어본다. 우리가 오클랜드에서 왔다고 하니까, 그녀는 "어떻게 그런 복잡한 대도시에서 살 수 있느냐?"면서 손사래를 친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반가운 듯 그녀의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다.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 있는 별장에서 머물면서 휴가를 보내고 있다는 그녀는 '세 자매' 바위보다 해식 동굴에 새겨진 마오리 암각화가 더 볼만하다며 우리를 이끈다.

그것은 아주 오랜 옛날에 이곳에 상륙한 마오리족들이 새겨놓은 것인데, 특히 여섯 개의 발가락이 달린 발 그림이 유명하다고 한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여섯 대의 카누가 이곳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당시 마오리족들이 새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미 밀려들기 시작한 바닷물 때문에 천정에 그 암각화가 새겨져 있는 해식동굴 안으로 우리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우리는 아쉬움을 간직한 채 그 친절하고 수다스러운 아줌마와 헤어졌다. 헤어지면서 아내는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직접 해식동굴 앞까지 우리를 안내해 준 그 아줌마에게 말했다. "당신은 내가 만나본 사람 중에서 최고의 가이드예요"라고. 그녀는 손을 흔들며 나중에 꼭 다시 한 번 오라고 말한다.

전망 포인트에서 본 세 자매 바위의 뒤로 정상에 만년설이 덮힌 타라나키 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전망 포인트에서 본 세 자매 바위의 뒤로 정상에 만년설이 덮힌 타라나키 산이 희미하게 보인다 ⓒ 정철용
'하얀 절벽'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세 자매' 바위보다도 더 유명한 고대 마오리족들이 새긴 암각화도 보지 못한 채 우리는 다시 차에 올랐다. 시동을 켜기 전 시계를 보니 오후 4시 30분. 예정보다 1시간이 늦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중간에 보고가려고 했던 우루티(Uruti)의 '사무라이 빌리지'를 건너뛰기로 했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의 촬영 장소로 일본인 단체 관광객들이 자주 들른다는 그 곳을 우리는 생략하기로 한 것이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으리라.

이렇게 우리의 여행은 첫날부터 어긋나기 시작했지만, 내 마음은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가던 길을 멈추고 우리에게 길을 안내해 준 친절한 사진작가와 가이드 뺨치게 설명을 해 준 수다스러운 아줌마를 생각하니 마음이 따스해졌다.

그렇다. 여행이 어찌 보고 즐기는 것이 전부일 것인가. 멋진 풍경과 근사하게 꾸며놓은 관광지보다는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보여준 예상치 못한 친절과 대화가 오히려 더 오래도록 추억으로 남는 것이 아닐까.

미리 예약해 놓은 잉글우드(Inglewood)의 모텔로 향하는 우리의 길은 조금씩 어두워졌지만,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부푼 기대에 내 마음은 헤드라이트처럼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