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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날 묵었던 팜스테이 농장의 주인집. 그 옆의 별채에 우리는 묵었다.
둘째날 묵었던 팜스테이 농장의 주인집. 그 옆의 별채에 우리는 묵었다. ⓒ 정철용
그런데 시내에서 약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다는 그 농장의 표지판이 아무리 달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거의 1시간이 넘게 길에서 헤매는 동안 이미 사방이 깜깜해졌다. 나는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한 인가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보고 무작정 들어가 도움을 청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있던 그 집의 남자는 너무나 고맙게도 손수 차를 몰고 앞장섰다. 그는 우리가 이미 지나온 길을 10분 정도 달려, 우리가 찾고 있는 농장의 진입로 앞에 차를 세웠다. 자세히 보니, 길가에 세워진 8절 도화지보다도 작은 표지판에 우리가 찾고 있는 농장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큰 안내판을 기대하고 달렸으니, 저렇게 작은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을 리가 없지.”

우리는 농장을 찾지 못한 것을 우리 탓이 아니라 작은 표지판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낯모르는 여행객에게 베푼 이 시골 남자의 호의는 너무 작은 표지판을 세워 놓은 농장 주인의 불친절(?)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농장 주인에게 표지판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지 않았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농장 주인은 주방이 딸린 별채로 우리를 안내하고는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아내와 딸아이가 씻는 동안, 나는 마당으로 나왔다. 불빛 하나 없는 짙은 어둠으로 사방이 적막했다. 머리를 들어보니 밤하늘이 온통 별천지였다.

소름 돋듯이 끔찍하게 돋아난 별들을 보며, 나는 도시가 아니라 이렇게 시골의 농장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를 참 잘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날 아침에 만난 농장의 평화로운 풍경에 비하면 정말 별 게 아니었다.

마당 한쪽에 마련된 바비큐 시설. 그 옆으로는 야외식탁도 있었다.
마당 한쪽에 마련된 바비큐 시설. 그 옆으로는 야외식탁도 있었다. ⓒ 정철용

손바닥을 벌려 돼지 새끼들을 부르고 있는 딸아이
손바닥을 벌려 돼지 새끼들을 부르고 있는 딸아이 ⓒ 정철용
아침에 일어나 이곳저곳 거닐며 본 농장의 풍경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구름에 덮인 타라나키 산이 저 멀리 보이고 일찍 잠에서 깨어난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벽돌을 쌓아 만든 야외 바비큐 화덕 밑에는 엊저녁에 고기라도 구워먹었는지 나무 숯 몇 개가 쌓여 있고, 그 옆에는 오래된 양철 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평화로운 아침 햇살이 다 낡아 부스러지고 있는 야외 식탁을 비추고 있었다.

딸아이는 난생 처음 보는 돼지 새끼들이 너무나 귀엽다고 손바닥을 벌리고 앉아 돼지 새끼들을 불러댔다. 수탉들은 가끔씩 생각났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목책 너머 눈을 껌벅이며 한가롭게 풀을 뜯는 소들도 보이고, 더 멀리로는 푸른 초원에 코를 박고 있는 양떼들도 보였다.

농장의 이 평화로운 아침 풍경에 취해 우리는 아침을 먹고 나서도 한참동안을 주저앉아 있었다. 겨우 마음을 추슬러, 조금 더 있다가 가자는 딸아이를 재촉해 차에 짐을 실었다. 다음 목적지를 향해 떠나기 전, 우리는 인사를 하기 위해 주인집에 들렀다.

농장의 목책 너머 양떼들은 하루 종일 풀밭에 코를 박고 풀을 뜯는다.
농장의 목책 너머 양떼들은 하루 종일 풀밭에 코를 박고 풀을 뜯는다. ⓒ 정철용
작은 표지판을 탓하던 엊저녁의 불평어린 우리의 마음은 어느새 평화롭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뀌어 있었는데, 정작 우리의 그런 마음을 받아줄 주인집 식구들은 벌써 다들 일을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해가 벌써 높이 떠올라 있었다.

비치 하우스, 파도가 들려주는 자장가

뉴질랜드 사람들은 제법 돈을 모으면 2B를 우선적으로 산다고 한다. 그 하나는 요트처럼 근사한 배(boat)이고 또 다른 하나는 보통 비치 하우스라고 불리는 바닷가의 별장(bach)이다. 이들에게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휴가란 바닷가의 별장에서 배를 타고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여름 휴가철만 되면 자동차의 뒤꽁무니에 배를 달아맨 차량들의 행렬이 바닷가의 작은 마을들로 줄줄이 이어진다.

휴가 기간 동안에만 잠깐 사용하기 때문에 이 바닷가 별장들은 그렇게 크거나 화려하지 않다. 보통 방 1개 또는 2개에 주방과 거실 등을 갖춘 작은 크기가 대부분이다. 별장의 주인들은 이 별장을 자신들이 사용하지 않는 기간 동안에는 여행객들에게 빌려주기도 한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묵었던 곳이 바로 그러한 별장이었다.

등대가 아름답다는 캐슬포인트(Castlepoint)의 이 비치 하우스를 여행 안내책자에서 발견했을 때만 해도 나는 그것이 개인 소유의 휴가용 별장인 줄은 몰랐다. 팜스테이처럼 주인집 옆에 붙어 있는 별채로만 여기고, 예약만 한 채로 별도의 확인 없이 우리는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그 날 저녁 무렵에 캐슬포인트에 도착해서 찾아보니 그 거리의 어느 곳에도 여행 안내책자에서 보았던 그 집의 이름이 씌어진 간판은 보이지 않았다. 팜스테이 농장을 찾던 때의 악몽이 되살아났지만, 다행히 공중전화가 있어서 이번에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쪽의 말인즉슨, 자기네는 캐슬포인트 못 미쳐 있는 도시인 마스터톤(Masterton)에서 살고 있으며, 1주일 전에 우리가 묵을 그 비치 하우스의 열쇠 전달과 관련한 이메일을 내게 띄웠다고 한다. 그런데 내 쪽에서 아무런 연락이 없어서 안 그래도 연락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라고 한다. 1주일 전이면 바로 우리가 여행을 떠난 날이니 내가 이메일을 확인하지 못한 것은 당연지사.

결국 마스터톤에서 한 시간을 달려온 그 주인 여자에게서 열쇠를 전달받는 것으로 일은 쉽게 해결되었다. 비치 하우스가 개인의 휴가용 별장이기에 사전에 집 주인과 열쇠를 주고받을 약속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 저지른 이 실수 덕에, 우리는 불을 밝힌 등대를 생애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비치 하우스의 열쇠를 기다리는 동안, 등대에 불이 켜지는 광경을 만났다.
비치 하우스의 열쇠를 기다리는 동안, 등대에 불이 켜지는 광경을 만났다. ⓒ 정철용
어두워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등대가 눈을 뜨는 모습은 참으로 가슴 뭉클해지는 광경이었다. 어두운 바다를 비추기 위하여 눈을 뜬 저 등대의 빛처럼 지금 누군가 우리에게 열쇠를 주러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다는 생각에, 나는 거세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따스해졌다.

주인 여자는 자기가 너무 늦게 이메일을 띄워서 일이 이렇게 되었다면서 우리에게 거듭 미안해했다. 우리는 덕분에 등대에 불이 들어오는 광경을 구경했다며, 먼 길을 달려와 열쇠를 건네준 그녀에게 오히려 고맙다고 말했다.

그녀가 가고 난 후, 우리는 서둘러 라면과 밥을 해서 오이와 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맛있게 늦은 저녁을 먹었다. 방 2개짜리 바닷가의 작은 비치 하우스에 오래도록 켜진 불빛도 저 멀리 누군가에게는 등대의 불빛처럼 느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우리는 거실의 불을 켜둔 채 잠을 청했다.

창문 너머 거센 파도 소리가 너무나 가깝게 들려왔지만, 먼 길을 달려온 우리에게는 그 소리조차도 달콤한 자장가처럼 들렸다.

비앤비(B&B), 주인과 손님이 친구가 되는 휴식처

민박이라고는 해도 이처럼 팜스테이와 비치 하우스는 숙박만 제공할 뿐이고 식사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 주인집과는 떨어진 별채라서 가족끼리만 오붓한 시간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 좋아하는 여행객에게는 오히려 단점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이라면 흔히 ‘B&B(Bed and Breakfast)’ 라고 불리는 민박보다 더 좋은 숙박처는 없을 것이다. 그 이름처럼 숙박과 아침 식사를 함께 제공하는 이 민박집에는 나이 지긋한 부부만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은 고적함도 달래고 돈도 벌 겸, 아이들이 떠나고 남은 빈 방들을 손님방으로 꾸며 여행객들을 받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주인집 내외는 손님을 친절하고 정성스럽게 대하게 된다. 손님도 그런 편안한 분위기에서 마치 집에서 쉬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저녁에 거실에서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다음날 아침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나누다보면, 정말 한 가족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이렇게 해서 알게 된 주인과 여행객이 이후에도 서로 편지를 주고받고 자주 왕래하는 절친한 친구 사이로 발전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이처럼 뉴질랜드의 B&B는 길에서 지친 육체의 휴식처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따스함과 재미난 이야기들을 서로 나누며 사귀는 마음의 휴식처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가 묵은 '킬라라 홈스테이'의 2층 거실 창문에서 바라본 새벽 바다의 모습
우리가 묵은 '킬라라 홈스테이'의 2층 거실 창문에서 바라본 새벽 바다의 모습 ⓒ 정철용
여행 닷새째 되는 날 우리가 묵은 카피티(Kapiti) 해안 지역의 B&B ‘킬라라 홈스테이’도 그랬다. 13년 동안 특수학교의 교사로 일하다가 그만두고 몇 년 전부터 B&B를 시작했다고 하는 캐롤(Carole)은 늦은 시간에 도착한 우리를 너무나 반갑게 맞아주었다.

근처 마을에서 개인 사업을 하고 있는 캐롤의 남편 돈(Don)은 우리가 자신들의 집에서 묵는 최초의 한국인 손님이라면서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대해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어디서 들었는지, 한국인들이 정말 뉴질랜드에서 수입한 말을 경주용이 아니라 식용으로 먹느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이에 아내는 펄쩍 뛰며 한국 사람들은 말고기는 먹지 않는다고 바로 잡아 주었다. 이미 개고기를 먹는 것으로 전 세계적으로 소문이 났으니, 한국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이곳 사람들이 한국인들은 말고기도 먹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리 놀랄만한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토스트와 씨리얼, 그리고 쥬스와 우유로 비교적 간단하게 준비된 뉴질랜드식 아침 식사를 하면서 캐롤과 돈과 나눈 이야기들은 즐거웠다. 그들은 자신의 가족들 이야기, 자신의 집에서 묵었던 특이한 손님들 이야기도 들려주고, 손님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과 그들이 남겨 놓은 명함들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킬라라 홈스테이'를 바다쪽에서 본 모습. 2층을 통째로 우리가 썼다.
'킬라라 홈스테이'를 바다쪽에서 본 모습. 2층을 통째로 우리가 썼다. ⓒ 정철용

캐롤과 돈과 함께 찰칵. 아내는 사진을 찍느라 여기에서는 빠져 있다.
캐롤과 돈과 함께 찰칵. 아내는 사진을 찍느라 여기에서는 빠져 있다. ⓒ 정철용
나도 기념으로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라고 찍혀 있는 내 명함을 그들에게 주었다. 훗날 어느 한국인 여행객이 그 집에 묵게 된다면, 캐롤과 돈이 보여주는 명함들 중에서 한글로 씌어진 것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몹시도 반가워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나는 미소지었다.

떠나기 전, 그 집의 이름으로 내건 ‘킬라라(Killara)’라는 단어가 생소하여 그 뜻을 물어보았더니, 호주 원주민어인데 ‘항상 그곳에(Always there)’라는 뜻이라고 한다. 언제가 될지 기약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나중에 다시 한 번 방문하겠다고 그들에게 약속했다.

그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 이름처럼 ‘항상 그곳에’ 있을 것이다. 너무 뒤늦게 그곳을 찾게 되어 캐롤과 돈, 그리고 바닷가에 세워진 그들의 하얀 집을 다시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내 추억 속에서는 항상 살아 있을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넉 달이 지난 지금, 이렇게 민박으로 묵었던 팜스테이와 비치 하우스와 B&B는 그 집 주인의 얼굴까지도 선명하게 생각이 난다. 그러나 우리가 묵었던 모텔들은 거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모텔은 어디를 가나 거의 똑같은 구조라 별 특색이 없으며, 모텔 주인도 들어갈 때와 나갈 때 사무실에서 잠깐 얼굴을 보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모텔이 이럴진대, 좀 더 규격화된 구조와 표준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호텔은 더 말할 것이 없다. 모텔과 호텔은 도시를 닮아서, 세계 어디를 가나 그 모습이 비슷하다.

이번 여행 동안에 내가 가급적 큰 도시를 피해 작은 마을에 있는 모텔에 묵고, 다양한 형태의 민박을 이용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여행을 떠나기 전 우리가 묵을 숙소에 대해 조금씩 불만들을 가지고 있었던 딸아이와 아내도 막상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진 눈치들이었다.

우리는 새롭게 경험한 뉴질랜드의 민박에 대해서 이구동성으로 “호텔보다 낫다”고 평을 했다. 시골 사람들의 따스한 마음과 아름다운 자연이 함께 하는 한, 뉴질랜드의 민박은 분명 호텔보다 낫다. 다음 번 여행에도 우리는 다시 민박을 선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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