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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이 끝나고 난 후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로물루스 대제>의 부인역을 맡은 김혜옥씨와 거리 인터뷰를 가졌다.
ⓒ 김진석
서울시극단의 제16회 정기공연 작품인 <로물루스 대제>(원작 F. 뒤렌마트·연출 이용화)는 로마를 멸망시키기 위해 왕위에 오른 로물루스 황제의 이야기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멍청하고 무능력한 왕이라고 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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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물루스의 부인 율리아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는 로물루스를 두고(실은 로물루스가 가지않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이지만) 게르만 족을 피해 시칠리아 섬으로 떠나버리기까지 한다. 율리아는 표독스럽고 강인해서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율리아 역의 김혜옥씨는 카리스마로 무대를 압도하는 배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간간이 등장해 흐릿하게 기억되는 배우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몇 번의 등장만으로도 제 색깔을 분명히 드러내는 인상깊은 열연을 했다.

제 색깔을 분명히 드러내는 연기자

배우 김혜옥

·현 서울시극단원
·출연작 <검은새>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가을소나타>외
·백상예술상 연기상(1986) 연출가그룹 연기상(1988) 동아연극상 연기상(1994) 등 수상
네 번째 공연을 마친 25일 야심한 시각 세종문화회관 소극장 계단에 그와 나란히 앉은 것은 그래서였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그를 텔레비전에서 '아줌마' 아니면 '사모님'으로 잠깐잠깐씩 보았을 뿐이었다.

김혜옥씨가 30여년에 가까운 연기 경력을 자랑하는 중견 배우라는 것도, 연극으로 데뷔해 백상예술상 연기상, 동아연극상 연기상 등을 수상한 연극 배우라는 것도 <로물루스 대제>를 보기 얼마 전에서야 알았다.

"연기야 어릴 때부터 했지. 본격적으로 데뷔한 건 어디 보자, 1980년 극단 산하의 <크리스티나 여왕>으로 했죠. 주인공 분신 역할을 했는데 나는 참 운이 좋았어요. 주연을 할 만한 내 나이 또래의 여자 배우들이 많지 않았거든요. 기회가 많이 왔죠."

혜옥씨는 그 기회들이 지금의 자신을 있게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말한다. "지금이야 키워주는 스튜디오도 여럿이지만 그때야 어디 그런가, 학교 졸업하면 끝인 걸. 무대에 설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실력을 쌓기가 어려운 거예요. 그때 무대에 오를 기회가 많았다는 건 정말 행운이었죠."

▲ 연극 <로물루스 대제>에서 대제의 부인 율리아역을 맡은 배우 김혜옥시
ⓒ 김진석
"왜냐구? 나는 김혜옥이니까!"

그렇게 시작해서 근 30여년을 연기만 해왔다. 그동안 꼽을 수 없는 많은 작품으로 여러 차례 무대에 올랐지만 그에게 연기는 여전히 '도달하지 못한 그 무엇'이라고 했다.

"난 지금도 관객 눈을 못쳐다봐요. 아주 까무러칠 것처럼 심장이 떨리고 두려운데 연습하면서도 떨었다니까요. 우스갯소리처럼 '난 30년 연기했는데도 왜 이렇게 어려운 거야'하면서도 떨어요."
특히 이번 작품은 더욱 어려웠다.

"이 작품이 희극이라고 하기엔 무겁고, 비극이라고 하기엔 우습잖아요, 감잡기가 힘들었죠. 드라마에선 심각하면 그게 쭉 이어지잖아요, <로물루스 대제>에선 웃음과 심각함이 사이사이 교차되니까 어려운 거예요. 로물루스만 봐도 그래, 이거 완전히 쌈마이 왕이잖아요.

그 왕을 보면서 위엄을 갖춰야 하는지, 방방 떠야하는지 모르겠어. 호칭만 해도 그래요, '여보'하고 부르는데 집에서 내 남편 부르듯 '여보'할 순 없는 거니까요."

어떤 부분을 어떻게 잡아내야 하는지조차 혼돈스러운 상황에서 연출은 율리아에 대한 특정한 인물상을 가지고 있었다. 대본을 자신의 감정대로 읽으면서 서서히 인물상을 잡아가는 김혜옥씨의 스타일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연출을 맡은 이용화씨와도 부지런히 싸워야했다.

ⓒ 김진석
"연출은 율리아를 서태후같은 인물로 그리는 거야. 나는 내 느낌대로 가야지 주어진 패턴에 맞추는 건 잘 못해요. 결국은 내 스타일대로 갔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의 합의점에 다다른 것같아요. 싸우면서 연출한테 그랬다구, 나는 박정자같은 율리아는 죽었다 깨나도 못한다, 왜냐? 나는 김혜옥이니까, 내가 가진 것에서 뽑아내는 김혜옥식 율리아 밖에는 못하는 거라구요."

그렇게 겨우 한 매듭을 풀고나면 곧바로 다음 매듭이 손에 잡히는 식이었다. 무대에 서면 설수록 커질 수 밖에 없는 연기자로서의 욕심도 그 매듭들 중의 하나였다.

"배우들이 참 빠지기 쉬운 함정이 그거예요, 대본보다 더 욕심을 내는 거. 욕심을 내다보면 인물을 만들고 덧입히게 되는데 그건 분명히 오버거든요. 이번 작품도 어제까지 꼬박 이틀을 헤맸어요. 오늘에서야 이게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하고 감을 잡은 것같아요. 어차피 해답은 없는 거예요."

이 배우가 연극 무대를 사랑하는 이유

그래서 연극은 재미가 있다. 그 날의 몸상태나 감정에 따라 매번 연기의 느낌이 달라지고 관객들의 반응도 제각각이다. 첫 대사를 어떻게 하느냐가 그 날 공연 전체의 분위기를 좌우하기도 한다.

그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는 것은 분명히 연극 배우의 특권일 것이다. 연극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꼽으며 그는 눈을 반짝 빛낸다.

"첫 공연에 아쉬운 걸 막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 거야, 그러고는 다음 공연 때 이렇게 해보면 되는 것 같거든, 아 이거구나 싶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그 쾌감은 말로 다 못해요. 오늘 좀 못했으면 내일은 더 잘 해야지 하고 생각하니까 또 좋구요."

자신의 연기에 만족하는 법이 없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일은 분명 그같은 중견 배우에게도 쉽지않을 게다. 그럼에도 그는 그러한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하나씩 더 깨닫는 거니까요. 고민한만큼 보람을 얻어요. 다음 번에는 더 나아지겠지 생각하면 행복해요."

"처음엔 자신 없어도 열심히만 하려고 했어요. 요새는 연기의 상황을 절절하게 표현하려고 하죠."

달라진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렸을 땐 예쁘다, 잘한다는 칭찬 들으면 날아갈 것같죠. 예쁘게 보이는 게 중요했고. 이제는 안그러죠, 진짜 내 모습을 끌어내고 표현하려고 해요. 비록 그것이 추하다고 하더라도 말이에요."

연기 경력 30년동안 그는 그렇게 성장했다. 예쁘게 보이려고 애쓰는 배우에서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배우, 자신의 추함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무의식과 싸우는 배우로. 그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무대에 오르는 것이 힘들고 두렵다.

ⓒ 김진석
"나의 미추를 가감없이 드러내는 연기자였으면"

여기까지 듣고나자 새삼스레 심통맞은 기분이 들고만다. 이렇게 노력하는 배우를 우리는 텔레비전에서 잘 보지 못한다. 연륜을 갖춘 중견 연기자들은 텔레비전에서 아저씨(혹은 사장님) 아니면 아줌마(혹은 사모님)으로 양념처럼 등장할 뿐이다. 시간이 갈수록 익어가는 배우의 깊이를 텔레비전을 통해서는 지켜볼 수 없는 것이다.

"시청자가 원하는 거잖아요. 로물루스 대제 역시 시대의 흐름을 바꾸지 못한 것처럼 내가 아무리 문제 제기를 해도 바뀔 수 없어요. 우리 문화가 흘러가는 방향이 그런 거니까. 다만 주어진 상황에서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을 찾으려고 애쓰는 거죠. 그게 시청자들이 원하는 거니까 나는 불만 없어요."

그가 불만없다고 딱 잘라 이야기하는데 내가-그 시청자들 중의 하나일 뿐인- 무슨 말을 더한다는 게 우습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나는 몇 마디쯤 더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건 문화적인 손실이라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물론 김혜옥씨는 웃기만 했을 뿐이다.

이제 김혜옥씨의 바람은 한 가지다.

"인간의 진실을 토로하는 연기자가 되고싶어요. 멋진 연기자야 누구나 되고싶어하는 거고(웃음) 무대에서 나의 미추를 가감없이 드러낼 수 있었으면 해요."

두 번의 공연을 마치고도 눈을 반짝이며 높은 목소리로 빠르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김혜옥씨에게서 내가 본 것은 30년동안 무르익은, 그래서 숨길 수 없는 향과 색을 내는 열정이었다. 그와의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이 연극은 내게 있어 김혜옥의 발견일 것"이라고 했는데 돌아서는 그를 보면서 문득 부끄러워졌다.

30년 동안 꾸준히 제 길을 가며 활발하게 연기를 해온 배우를 두고 발견이라니, 같지않은 말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고맙다"며 생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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