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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적 충격을 안겨준 홍콩영화 속 삐삐와 휴대폰
"기억이 통조림이라면 이 통조림은 유효기간이 지나지 않았으면…, 굳이 유효기간을 적어야 한다면, 만년으로 해야지"
오랜만에 DVD로 다시 본 <중경삼림>속 금성무의 독백을 들으니 아직까지도 가슴이 설렌다. 역시 좋은 영화는 세월이 흘러도 처음 보았을 때 그 감동 그대로를 떠올리게 만드는 매력이 있나보다.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헤어진 애인의 삐삐 번호로 쉴 새 없이 음성녹음을 해대고 애인의 답신을 기다리며 '널 만년 사랑해'라는 비밀번호를 수시로 누르는 금성무의 행동을 보니 갑자기 삐삐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그 당시의 추억이 생각난다.
영화 중경삼림이 제작되었던 1994년도에 직접 목격한 홍콩의 현실은 영화 속과는 달리 이미 삐삐가 사라지고 거리마다 모토롤라사의 아날로그식 휴대폰이 넘쳐났었다. 그 당시 나는 거리에서 자연스럽게 휴대폰 통화를 하는 홍콩사람들을 보며 솔직히 문화적인 격차를 느꼈다.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비싼 휴대폰보다 삐삐가 유행하던 때라 은연중 홍콩사람들이 우리보다 여유 있게 살고 있다는 부러움이 있었나보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우리도 디지털 휴대폰 대중화 시대가 도래했다. 그것도 CDMA(code-division multiple access, 코드분할 다중접속)라는 낯선 기술로 말이다. CDMA라는 디지털 휴대폰 원천기술을 개발하였으나 마땅히 써줄 곳이 없어 방황하던 미국의 퀄컴사란 신생기업과 새로운 기술 도입에 목말라 하던 정부가 서로의 필요에 의해 시작한 만남은 매우 극적이었다.
이미 TDMA (time division multiple access,시분할 다중접속)라는 디지털휴대폰 방식으로 서서히 옮겨가고 있는 대부분의 국가대열에서 벗어나 홀로 덜컥 CDMA 방식을 채택하는 모험을 과감하게 한 것이다.
사용하는 사람이 없던 원천기술을 홀로 상용화한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다. 왜냐하면 검증되지 않은 기술이기에 실패하기도 쉽거니와 설혹 성공하더라도 세계적으로 널리 범용되어 표준화되지 못한 기술은 여지없이 사장되어 퇴출되기 쉽고, 만약 퇴출당하면 막대한 개발비만 소모하는 헛고생이 되기 때문이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 막대한 개발비를 투입해 개발한 베타방식의 VTR과 아날로그식 HDTV가 기술표준화 및 범용화에 실패해서 퇴출되어버린 전례가 있지 않은가?
아무튼 결과적으로 볼 때 정부의 모험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비록 지금도 CDMA가 세계적으로 범용화되지는 못했지만 CDMA를 도입한 덕에 국산 휴대폰제조업체가 어느 정도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때까지, 전 세계를 장악해왔던 막강하던 외국산 휴대폰의 시장진입을 어느 정도 막아내는 효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영화 속에 나타난 시시한 휴대폰
그 후 세월은 흘러 2000년, 오우삼 감독이 감독하고 톰 크루즈가 주연한 <미션 임파서블 2 (Mission: Impossible II, 2000)>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영화 가득 미끈한 스포츠카가 달리고 있는 추격신 속에서 이상하게도 나의 눈길을 끈 것은 아슬아슬한 추격신이나 잘 빠진 스포츠카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톰 크루즈의 손에 들린 휴대폰이었다. 그런데 그 휴대폰은 생각보다 왜 이리 사이즈도 크고 디자인도 촌스럽다고 느꼈는지. "에이, 폴더도 아니잖아. 차라리 우리나라 휴대폰을 썼으면 보다 폼이 날 텐데…."
아마 최신 신기술로 무장한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서 우리보다 촌스럽다는 생각을 한 것은 그 때가 최초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은 그 때뿐이었고 일상생활 속에서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마침 뉴질랜드에서 살다 휴가차 잠시 방문한 오빠네 가족과 생활하던 중 조카애가 유독 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부러워하는 것 아닌가?
"고모, 한국 휴대폰은 정말 작고 예뻐요"
"그래, 그런데 어쩌니. 한국에서 휴대폰을 사가지고 가도 그쪽하고 서비스방식이 다르니 쓸 수가 없잖니."그러자 조카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아니에요. 고모, 요즘 한국에서 휴대폰을 사가지고 와서 간단하게 내장된 칩만 바꾸면 그 곳 서비스가 가능하다고 해서 한국에서 휴대폰 사오는 사람 많아요. 그럼 키위(뉴질랜드 백인) 아이들이 작고 깜찍한 한국산 휴대폰 보고 얼마나 부러워하는데요."
칩만 바꾸면 사용가능하다는 너무나 충격적인 조카애의 말 한마디는 한국 휴대폰산업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갖게 만들었다. 조만간 우리나라가 휴대폰 수출로 먹고 살게 되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할 만큼 이미 국산 휴대폰의 디자인은 충분히 경쟁력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나의 느낌대로 현재 한국산 휴대폰은 성업 중이다. 그 뿐인가? 그 옛날 홍콩 느와르 영화나 007 류의 영화 속에 나오는 삐삐나 휴대폰, 노트북컴퓨터를 보며 느꼈던 부러움과 문화적 충격은 이제 까마득한 옛날이 되었다.
날아온 10년이 가져다준 인간다운 삶의 격차
그러나 그 까마득한 옛날이 겨우 10년 정도 밖에 안 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하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당연한 일 아닌가'할 수도 있겠지만 지난 10년 동안 우리의 여정은 한마디로 남이 걸어갈 동안 비행기 타고 정신없이 날아온 식이었다. 너무 늦었노라고 길도 없는 하늘을 정신없이 날다가 어느 순간 제정신을 차려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앞서서 걷던 사람을 추월해버린 격이라고나 할까?
모든 게 초고속이다 보니 가동하는 사이에 기술적 격차는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그에 비해 우리 모르게 나타난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우선 우리가 모르는 사이 우리 마음속에 여유가 사라져버렸다. 인내심과 끈기가 사라진 대신 조급함과 신경질이 늘었고, 남을 배려하기보다는 먼저 나부터 챙기고 보자는 의식이 강해졌다.
아마 이런 현상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정신없이 변화하고 있는 한국이란 나라에서 뒤처지지 않고 살기 위한 방어본능 때문에 나타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남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애쓰고 살았지만 정작 나 스스로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조용히 생각해보는 시간을 투자하지 못했고 그 결과, 인간다운 삶의 격차는 더욱 더 커져버린 것이 아닐까?
영화는 어느새 마지막을 향해 달리고 있었고 영화 속 또 다른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은 1년이 지난 날 가게에서 다시 만났고 헤어진 기간보다 더욱 의미 있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캘리포니아 레스토랑에 갔었어요. 7시 15분에. 그 날 비가 내려서 유리창 너머로 누군가를 생각하며 비를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진짜 캘리포니아의 날씨가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나에게 1년의 시간을 주었죠. 오늘도 유리창 너머로 누군가를 생각 했었어요."
만년의 유효기간과 1년의 시간…. 정신없이 빠르게 변해가는 디지털 시대에 웬 헛소리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는 만년동안 변하지 않는 인간다운 삶의 유효기간을 위해 나 스스로를 잠시 되돌아 볼 잠깐의 시간이 정말 필요한 때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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