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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이 저에게 그랬습니다. 스트레스에 찌든 사람, 늘 고민하는 사람, 근심이 많은 사람, 상처가 깊은 사람, 한이 쌓인 사람은 제 아무리 휼륭한 전문가에게 심리 상담을 받아도, 세상에서 제일 수준 높은 정신과 의사에게 치료를 받는다 해도 결코 회복될 수가 없다고요.
매순간 약물에 기대 견디는 것과 같다고요. 그러면 해결책이 없는 것이냐고 제가 좀 신경질적으로 따져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그냥 길을 걸어야 한다!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말 앞에 그 분은 분명히 '그냥'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다시 물었지요. 그냥이라니요? 어딘가 목적지를 정해놓고 가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위해 길을 떠난다는 이유도 설정하지 않은 채 그냥 길을 걷는다니요?
그러자 그 분은 좀더 힘을 줘서 대답했습니다. '그냥!' 이라고. 그냥 길을 걸어야 하고, 그렇게 그냥 길을 걷다보면, 고통도 절망도 번민도 그냥 치유된다고요.
그 분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가급적 혼자 길을 걸으라고요. 잠깐씩 스치는 길벗은 사귀더라도 애초부터 끝까지 같이 가는 동행인은 두지 말라고요. 그냥 혼자 오랜 시간 걸으라고요. 잠시 생각해보니 저를 비롯해 제 주변에는 그냥 혼자 오랜 시간 길을 걸어본 사람이 거의 없더군요. 다들 매여 사는 신세니 길 한 번 떠나는 게 무척 어려운 거지요. 게다가 그냥, 혼자, 오랜 시간, 걷는다니요? 해서 또 물었지요.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농사짓고 살아야 한다!
그 분의 뜻인즉, 시골에 가서 농사짓고 살지 않더라도, 입고 먹고 싸고 자고 하는 의식주 활동을 자급자족하는 방식으로 살아보라는 것이더군요. 손수 밥 지어 먹고 설거지하고 옷가지 해 입고 똥과 오줌 싼 것은 생태적으로 순환하게 잘 처리하고,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보라는 겝니다.
듣고 보니 수긍은 가나 그렇게 살아갈 염두는 더욱 나질 않더군요. 저는 '그냥 혼자'까지는 아니더라도 길을 걸어보는 편을 체험보기로 했습니다.
작년 가을이었지요. 제가 다니는 대안학교 신입생들과 함께 7박8일 동안 남양주에서 강릉까지 걸어가 보았답니다. 아이들은 길을 걷는 동안 밋밋했던 인생에 큰 파노라마를 압축해서 맛보는 것 같이 보이더군요.
아무래도 무리 지어 걷는 여행이니 인간 관계의 허와 실이 드러나고 마모되면서 단순하고 정직하게 자기의 본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이 잘 보였지요. 좋았습니다. 게다가 저는 여자 친구와 동행할 수 있었기에 더 좋았지요.
하나 돌아보면 아쉬웠습니다. 종일 길을 걸을수록 몸이 고단해지면 딱 그 만큼씩 단아해지는 마음을 오랜 시간 홀로 매만져보는 체험적 성찰은 덜 했거든요. 그런 느낌이 잠깐씩 있었지만, 그때마다 제 생각은 아이들에게 또는 여자 친구에게 가 있었지요.
그 뒤로 저는 다른 학기의 신입생들과 길을 걸어볼 기회를 다시는 갖지 못했지요. 그렇게 두 해를 보낸 다음 우연찮게 대안학교 동료 교사의 책상 위에 있던 이 책을 발견했습니다.
저자 김남희씨. 30대 중반의 이 여성은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인생이 막막해 유럽으로 두 달간 여행"을 갔다가 "여행 중독자의 대열에 합류"했다고 자신의 걷기 여행 입문을 소개합니다.
이후 김남희씨는 아예 사표를 쓰고는 틈나는 대로 한반도 남단 곳곳을 두 발로 걸어다녔더군요. 근래에는 걷기와 대중교통만으로 움직이는 7년 짜리 세계 여행 프로젝트를 꿋꿋하게 진행하고 있지요. 김남희씨의 이런 이력도 남달랐지만, 정작 제가 이 책에 꽂힌 것은 꽤나 긴 책 제목 안에 '혼자'라는 말과 '걷기'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툼한 이 책의 절반 1부는 29일 동안 해남에서 통일전망대까지 820km를 혼자 걸어서 종단한 일지로 이루어져 있고, 나머지 절반 2부는 '숨어있는 우리 흙길 열 곳을 찾아서'로 구성되어 있더군요. 2부를 읽는 느낌도 신선했지만, 일독을 마친 뒤의 제 눈길은 혼자 걷기 여행을 기록한 1부 여지저기 밑줄 친 곳을 배회하고 있었지요.
서울로 올라가려고 짐을 싸던 언니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며 한마디했다. "너 괜히 고집 피우다 아스팔트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지 말고 힘들면 반칙해라. 경운기 정도는 타도 괜찮지 않겠냐?" 차라리 전사할지언정 반칙은 안 하겠다.
걷기 시작한 지 이틀째 되는 날 김남희씨는 잠깐 동행했던 아는 언니의 유혹을 뿌리칩니다. 당당한 출발이지요. 우리의 모든 초심이 이렇지 않을까 싶군요.
"솔직히 말해 그 사이 시골밥상에도 물려서 스파게티와 베스킨 라빈스 아이스크림이 그리워졌고, 더운 물에 씻고 싶다는 욕망에 늘 시달렸으며, 정신 사나운 시골 살림살이를 보며 정돈되고 안락한 내 방이 있다는 것에 안도하기도 했다.
330km를 걸은 걷기 여행 열흘째, 김남희씨는 "내 한계와 수준 속에서 이 길을 계속 걸어갈 것"이라고 재차 다짐하면서 잠을 청합니다.
"신기하다. 내 몸은 완벽하게 적응했다."
걸은 지 13일째 되는 날 일지는 그렇게 시작되더군요. 물집이 늘어나고 종아리에 알이 생기고 매일밤 잠자리가 걱정되는 나날의 어느 아침이었습니다. 이만큼 자신의 몸에 대한 자신감을 꽉 차게 표현한 문장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이 문장은 이 책 전반에 걸쳐 가장 단호하고 깔끔하며 아름답게 다가왔습니다.
"왜 걷는지도 모르는 채, 아무 생각도 없이, 땅만 보며 걸었다."
21일째 되는 날, 강원도 영월군에서 31km를 걸었던 기록 전부입니다. 그냥 이렇게 단 한 줄이지요. 제게 "그냥 길을 걸어야 한다!"고 했던 그분의 말처럼 이날 김남희씨가 "아무 생각도 없이" 걸었던 행위가 바로 그 '그냥!'이었을까요? 아마도 그렇지 싶네요. '그냥!'은 그렇게 고통스럽게 시작되어서 점차 '그냥'이 아닌 무엇이 되어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그냥 홀로 안 걸어본 저로서는 알 도리가 없지만요.
"한적하고 아름다운 이 길에 사람은 없다."
24일째, 김남희씨는 강원도 산속 깊은 고갯길을 걸었습니다. 오대산 상원사부터 걸어서 구룡령을 넘어 한 양어장에 짐을 풀고 초저녁 계곡물에 목욕을 하면서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리더니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라고 일지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차 타고 반나절 달려가서 바로 그 계곡에 몸을 담군다 한들 김남희씨의 그 마음이 생길까요?
"살아있음이 이유도 없이 고마운 밤이 깊어간다. 생은 내게 얼마나 더 자주 예고도 없는 선물들을 던져주고 갈 것인지."
27일째 속초에 도착해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밤 11시가 넘도록 수다를 떨며 하루를 마감한 날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서른 두 살이었던 김남희씨는 그 찬란했던 여름날의 혼자 걷기 여행을 이렇게 장식하며 끝을 내고 있었습니다.
"나는 곧 세상 밖으로 나갈 것이며, 그곳에서 내가 볼 최초의 것이 사람의 얼굴이기를 꿈꾸어본다."
제가 인터뷰를 했던 날 김남희씨는 2박3일짜리 국내 걷기 여행을 떠난다고 했고, 그로부터 며칠 뒤에는 다시 인도로 날아가서 걷기를 멈췄던 그곳에서 다시 걷기를 시작한다고 했었지요. 지금쯤 어디를 걷고 있을까요. 참, 김남희씨는 <오마이뉴스>에 세계 여행기를 올리고 있으니 가끔은 행적을 알아볼 수 있겠네요.
저는 이 책을 읽고 나서 다시 한번 결심을 했지요. 순간 죽어버리고 싶을 때, 사는 게 도무지 사는 것 같지 않을 때, 뒤돌아보지 말고 그냥 혼자 걸어야 한다고 말이지요. '그냥!'이 그냥이 아닌 무엇이 될 때까지, 걷다보면 스스로 알게 되리라는 최후의 믿음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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