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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혜정.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탈식민지 시대의 여성운동을 실천해 온 조한혜정 교수는 결혼해 아이를 낳았으며 청소년의 사회적 양육 문제로 여성운동의 지평을 확장해 온 분이지요. 저는 20대 후반에 <탈식민지 시대의 글 읽기와 삶 읽기>라는 책을 통해 조한혜정 교수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6년 전부터는 IMF 체제 직후에 문을 연 청(소)년 문화작업장 하자센터를 함께 기획하고 운영하게 되면서 줄곧 호흡을 맞춰 온 분입니다.

우에노 치즈코. 도쿄대학 사회학과 교수. 청년기에 학생운동을 거치면서 평생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을 모색해 온 우에노 치즈코 교수는 10여년 전에 <스커트 밑의 극장>이란 책을 통해 처음 접했던 분이지요. 이번에 <경계에서 말한다>를 읽으면서 두 분이 오랜 동지였구나 하는 사실과 독신으로 살아온 우에노 치즈코 교수의 여성운동은 조한혜정 교수와는 또 다르게 노인 문제로 진화해 왔었구나 하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경계에서 말한다>는 제목으로, 일본에서는 <말은 전달되는가>라는 제목으로 동시에 나온 이 책은 한국의 <당대비평>과 일본의 <세카이(世界)>에 연재했던 두 분의 1년여에 걸친 서신 교환을 묶어낸 것이지요. 모두 6통씩 주고받은 편지는 한 권의 책으로 나오면서 맨 앞에 두 분의 후기이자 동시에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의 서문에 해당하는 글로 독자를 안내하고 있더군요.

제가 이 책을 흥미롭게 읽게 된 것은 세 가지 재미 때문이었답니다. 하나는 책을 통해 두 분의 개인적인 삶의 여정을 훔쳐볼 수 있었다는 점인데요, 사적인 글쓰기와 공적인 글쓰기가 혼용된 특유의 자유로운 대화식 글쓰기의 모델을 느낄 수 있었지요. 또 하나는 한·일 양국에서 따로 또 같이 전개된 여성운동 역사의 흐름을 특징적으로 비교하며 살펴볼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자신의 인생을 성찰하는 시간이 부쩍 늘어났을 중년의 두 여성운동가의 사고와 감수성에 비친 이 시대의 전망과 희망이었지요.

두 분이 편지를 쓴 순서대로 따라가 볼까요? 미쳐 버린 세상에 전력으로 맞서 싸우느라 그만 맥이 풀렸거나, 옳고 바르게 살려는 개인의 노력이 가끔씩 부질없게 여겨지거나,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과 늙어간다는 것에 걱정부터 앞서거나, 살아갈 인생은 깜깜하고 살아온 인생은 무의미하게 다가오거나 할 때 두 분의 편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의 선물을 조용히 건네주고 있을 겁니다.

당신이 살아가는 이 지구 세계 어딘가에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동지가 띄워 보낼 법한 작지만 단호한 위안, 우리 모두 틀림없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며 나눌수록 커지고 강해지는 삶의 공동체적 총기와 지혜, 그리고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일이 인류의 미래를 헤쳐나갈 저마다의 나침반을 반짝반짝 빛나게 만들어 준다는 체험적 믿음 같은 것들입니다.

첫번째 편지 - '적의 무기로 싸운다는 것에 대해, 식민지 지식인으로 산다는 것'

"어느덧 50대가 되고 보니, '도대체 누가 사회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가'라고 다른 사람들을 몰아세울 수 없는 나이가 되어 있습니다. 희망을 갖지 못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미안. 이런 세상을 만들어 버려서'라고 사과하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 해온 것에 대해서도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하는 나이입니다."(우에노 치즈코)

"나는 요즘 '피해자/가해자'의 구도에 빠져 버릴 위험이 많은 논쟁의 장에는 가지 않고 있습니다. … 치즈코, 우리 둘은 '근대'를 성공적으로 살아낸, 자기 통제력이 뛰어난 부류에 속하지 않나요? 현실을 언어화하는 '도구'가 되기 위해, 자신의 머리 부분만을 극도로 발달시킨 기형아들. 하하하. 시대가 바뀌고 있습니다."(조한혜정)

두번째 편지 - '선택할 수 없는 조국, 그 근대화의 역사 속에서'

"나의 어머니는 가부장제의 피해자로서 딸에게는 가해자가 되었습니다. … 내셔널리즘은 가해와 피해를, 적과 동지를, 우리와 그들을, 분명히 나누기 일쑤이지요. … 거기 아니면 여기, 그러한 스킬라와 카리브데스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을 어떻게 좌초하지 않고 항해할 수 있을까요. … 어쨌든 '강간으로 태어난 아이(스피박)인 포스트콜로니얼한 존재라는 것은 자신 속에 적과 동지 양쪽을 담고 있기 때문이지요."(우에노 치즈코)

"일본과 한국 역사가 드러내 보이는 '시차'에 대한 인식과 일본이 한국보다 땅덩어리나 인구가 3배가 넘고, 일인당 수입도 3배가 되는, 그래서 조금은 다른 규모로 굴러간다는 점을 제대로 고려한다면 한국과 일본 주민 사이에서도 함께 할 일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는 '광기어린 근대 기획'을 성찰하고 다양한 저항의 기억을 되살려낼 때가 온 것 같습니다."(조한혜정)

세번째 편지 - '여성의 급진성으로 다른 세상 만들기'

"위안부 할머니들의 거취와 복지 문제가 페미니스트들의 핵심 사안이 되지 못하고 종교계 분들에 의해 보살펴지고 있는 현상 역시 한국 여성운동의 현주소를 잘 드러내주는 사례일 겁니다. 기존 운동권과 '남매관계'를 맺고 활동해 온 한국 여성운동의 한계라면 한계이지요. … 추신 : 오늘 아침 신문에서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 징용자 300여명이 한국 법원에 국적 포기서를 제출키로 했다는 뉴스를 읽었습니다.… 한국에서 이렇게 '국가'를 거리를 두고 사유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니! 참으로 '혁명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네요."(조한혜정)

"패배한 국가의 여자로서 오늘을 살아남는 것을 생각해야 했던 여자들은 국가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음을, 나를 희생해야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어떤 공적 가치도 없다는 것을 뼈져리게 사무칠 정도로 느꼈을 것입니다. 국가보다 내가 소중하다. 내게는 이것이 페미니즘의 '기본의 기(基)'라고 생각됩니다. … 그 할머니들이 의연하게 대처하고 있는 상대가 내가 속한 나라라는 것을 알고 … 정말로 이 할머니들에게 혼이 뒤흔들려 버립니다. 이 할머니들과 같은 시대를 살고 있어 다행이라고…."(우에노 치즈코)

네번째 편지 - '우리는 동시대를 살고 있는가, 다중심성의 세계 만들기'

"어느 사회가 '개발도상국'으로 보이는 것은 언젠가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진국이 선진국이기 위해서 '저개발'의 상태에 멈추게 한 결과에 다름 아닙니다. 양자는 동시대의 양면을 살고 있습니다. 전자가 언젠가 후자처럼 되는 것이 아니고, 전자는 후자와 동시에 생겨나 그 상태로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우에노 치즈코)

"나를 포함한 한국의 일부 지식인들은 얼마 전부터 제국주의라는 것에 대해 좀 '쿨(cool)'해지려고 노력하던 참이었거든요. '쿨'해진다 함은 좀 '초연'해지기로 했다는 것이지요. 어차피 정면대결로 해결될 일이 아닌 것을 알아차린 우리는 일단 스스로 덜 속상해 하면서 우회해 가는 방식을 모색 중입니다."(조한혜정)

다섯번째 편지 -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시대, 인류의 미래를 위한 기도'

"사회를 변혁하는 힘은 언제나 젊은이들로부터 온다고 할 수 없습니다. 고령이라는 미지의 경험에 접어들어 그곳에서 다가오는 새로운 세계, 그리고 고령자가 스스로 열어가는 변혁의 실천에 나는 언제라도 가슴이 뜁니다."(우에노 치즈코)

"내가 '젊은이'들과 놀게 된 것은 아이를 낳기로 한 내 선택에 따른, 내 자리에서의 의무이지요! 물론 나는 내 노후를 자녀에게 의지할 생각은 없습니다. 요즘 부모들은 아이는 적절한 나이에 '포기'해주어야 한다는 지혜를 터득해가고 있지요. 나도 마찬가지입니다."(조한혜정)

여섯번째 편지 - '탈근대를 향한 모험으로 뛰어들기'

"한국 사회처럼 짧은 시간 안에 압축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 경우, '근대화'와 '탈근대화'를 동시에 추진하는 이중게임을 해야 할 때가 생깁니다. 이른바 '불합리함'을 없애가는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동시에 인간적 에너지가 소진되지 않도록 '불합리함'을 보호해야 하는 겁니다."(조한혜정)

"생명의 처음과 마지막에는 어떻게든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의존상태를 경험합니다. 타인에게 의지하는 것이 굴욕이 아니라 권리이고, 타인을 돌보는 것이 보이지 않는 헌신이 아니라 보상받는 노동이라는 것. 개호보험이 달성한 것은 그런 사고방식의 전환입니다."(우에느 치즈코)


자신이 살아온 생애를 재구성하면서 미래 역사의 흐름을 통찰하고, 끝없이 좌절하는 변혁의 에너지를 일상의 언어에서 새롭게 길어내는 두 분의 경쾌하면서도 역동적인 편지 대화는, 책 맨 앞에 실린 후기이자 서문을 통해 자신들의 편지 대화가 세상에 선보이면서 갖게 될 독자들과의 또 다른 대화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놓고 다시금 각자의 출발점 앞에 겸허하게 서는 참여와 성찰의 자세를 잘 보여줍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 역시 생애의 어떤 주기마다 지구 어느 편엔가 있을 동시대의 비동시성을 살아가는 또래의 동지를 찾아 서로의 다른 삶을 돌아보고 내다보는 파트너십을 가지면 좋을지 심사숙고하게 되었답니다. 제 주변에 여럿이 있겠지요. 근대와 탈근대를 동시에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그렇게 누군가와 따로 또 같이 새로운 종류의 글쓰기를 함으로써 '그래도 열심히 살아가자'는 생의 근거를 기쁘게 재발견하게 될 것 같습니다.

책을 덮고 잠시 그 누군가를 떠올리니 힘이 나네요. 너의 실패와 나의 실패가 만나서 서로 밑거름이 되어 우리가 몰랐던 새싹을 틔우는 모습, 서로에게 물이 되고 햇살이 되어주는 지속적인 관계와 대화의 변화무쌍한 힘을 조금은 더 알게 된 기분입니다. 모처럼 상쾌합니다.

경계에서 말한다 - 당비생각 02

우에노 치즈코.조한혜정 지음, 사사키 노리코.김찬호 옮김, 생각의나무(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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