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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일본 규슈 이부스키에 도착한 노무현 대통령이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 함께 웃고 있다.
17일 일본 규슈 이부스키에 도착한 노무현 대통령이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 함께 웃고 있다. ⓒ AP/연합뉴스

[일본 이부스키(指宿)] 경제·문화 교류 맑음, 정치·역사 흐림.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두 정상의 어깨 너머로 본 한·일간의 정국 기상도이다.

고이즈미 일본 총리는 16일 규슈(九州) 가고시마(鹿兒島)현 이부스키(指宿)시에서의 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한국 특파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특파원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고이즈미 총리는 '욘사마'(탤런트 배용준씨의 애칭)와 '한류'(韓流) 이야기에는 환한 표정으로 "대단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그러나 대북 경제제재론이나 북일 수교협상 문제가 나오면 신중하면서도 어정쩡한 태도를 견지했다. 일본으로서는 한국과 미국의 입장을 모두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한국 특파원들과 간담회를 가진 고이즈미 총리의 표정

이와 같은 기조는 17일 오후 한·일 정상회담 이후의 공동기자회견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초반의 회견장 분위기는 좋았다. '손님'인 노 대통령은 물론 고이즈미 총리도 "노 대통령이 지난 7월에 제주도에 이어서 1년에 한번 정도는 각 나라에서 솔직한 의견교환을 하자고 해서 오늘 가고시마 이부스키에서 정상회담을 하게 됐다"면서 "아주 화기애애 분위기 속에서 좋은 회담을 할 수 있었다"고 만족감을 표시했다.

양국 관계의 긴밀성을 상징하는 김포-하네다 간 셔틀노선은 양국 정상에 앞서 이미 양국 국민들에게 '활짝' 열려 있다. 고이즈미 총리의 말대로 양국 사람들의 왕래는 65년 국교정상화 때의 '1년 1만 명'에서 40년만에 '1일 1만 명'(1년 400만 명)으로 확대되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내년에는 일본에서 엑스포도 개최되므로 400만 명에서 500만 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그 기대를 실현하는 데는 '김포-하네다' 노선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고이즈미 총리도 "현재 하루 4편이 운항되고 있는 이 인기 노선을 하루 8편으로 증편하는 문제를 전향적으로 검토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주제가 이른바 '과거사 문제'로 흐르자 회견장의 분위기는 무거워졌다.

노 대통령에게는 "지금 일본에는 한국의 TV 드라마가 국민적 인기를 얻고 있는 등 한류 무드가 있는 한편에서 역사문제 등 무거운 문제가 있다, 역사문제를 어떻게 극복하고 진정한 관계를 구축해나갈 것인가"라는 일본 기자의 질문이 주어졌다.

이에 대해 노 대통령은 "분위기 좋은 날 말하기 어려운 주제인 것 같다"고 운을 뗀 뒤에 "그러나 답변을 드리겠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전한, '차원 높은' 메시지는 한국 국민의 '여유' 또는 '이성적 대응'과 일본 국민의 '도덕적 결단'이라는 두 가지였다.

두 대통령에게 던져진 민감한 질문

노 대통령은 "한국이 자꾸 일본에 역사문제를 끄집어내서 사과를 요구한다든지 여러가지 요구를 하게 됐을 때 그것이 과연 한·일간의 우호친선에 큰 도움이 될 것인가에 다소 부정적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서 "진심으로 이 문제를 풀기 원한다면 감정적 차원에서 역사문제 해결을 요구할 게 아니라 일본 자국 내에서 해결될 수 있도록 하는 관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본 국민에게는 "공동체의 질서를 추구해 나가기 위해서는 일본 국민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동북아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지도적인 국가로서 국민으로서 겸손한 자세를 보이고 관용과 양보의 태도를 스스로 가져가는 것이 동북아시아 질서를 위해서 좋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면서 "21세기 동북아 질서에서 자기 위상을 찾아간다는 방향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충고했다.

일본 정부는 내년 '종전(終戰) 60주년'을 계기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꾀하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에게는 일본의 정치인·장관들의 잇단 '과거사 망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중단할 의사는 없는지를 묻는 한국 기자의 다소 '고약한' 질문이 주어졌다.

일순간에 얼굴이 굳어진 고이즈미 총리는 "상당히 지적한 부분이 많지만, 요컨대 일·한관계 과거의 역사라는 데로부터 어떤 것을 배울 수 있는지 이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서 "반성할 것은 반성해야 된다"고 즉답을 피해갔다.

고이즈미는 그러나 "제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하는 것도, 누차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두번 다시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하고 있다"면서 "역사를 돌이켜 본다면 많은 일본 국민들이 그 당시 상황을 보면 좋아서 전쟁에 간 것은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금 일본의 평화와 번영은 현재 사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고 선인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있었다는 것을 저희들과 앞으로의 젊은 사람들이 잊어서는 안된다"면서 "과거 고난의 길을 걸었고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선인들에 대해 경의와 감사의 뜻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는 'A급 전범'의 분사(分祀) 문제에 대해서는 "야스쿠니는 하나의 종교법인이므로 정부가 개입하거나 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정·교(政敎) 분리원칙을 내세워 분명히 선을 그었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저는 야스쿠니 문제만을 특별히 거론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한다"고 말해 마치 '남의 집 제사에 간섭하는 이웃'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처럼 비치기도 했다.

셔틀외교는 노 대통령의 '동북아중심국가' 비전 실현 위한 기본 도구

내년은 한일 국교정상화 40주년을 기념하는 '한·일 우정의 해'이다.

고이즈미는 "'일·한 우정의 해 2005'의 성공을 위해서는 양국 국민의 참여를 얻는 것이 필요하다"고 전제하고 "앞으로 이 정상회담을 셔틀 정상회담으로 하기로 했다"면서 "이점에 대해서 이의 없이 서로 찬성을 했다"고 밝혔다. 그것은 한국 정부에 대한 '선물'의 의미를 갖는다.

고이즈미 총리는 이에 앞서 정상회담 전 환담에서도 "반기문 외교장관이 (일본과) 셔틀외교를 하고싶다고 얘기했는데, 셔틀외교란 수시로 왔다갔다 하는 것"이라면서 "일본이 다른 나라와는 셔틀외교를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해 한국과의 선린(善隣)외교를 강조했다.

그러나 두 정상이 수백 번을 왔다갔다 하고, 하루에 수만 명의 양국 국민들이 왔다간다 한들, 과거에 대한 '진정한 반성'과 '도덕적 결단'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깨진 독에 물 붓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 대통령은 "합의 자체도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합의하지 않은 일에 있어서도 솔직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고 신뢰를 더욱 돈독히 했다는 점 등이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고 이번 정상회담의 의미를 평가했다. 이는 일본이 왜 우리에게 '가깝고도 먼 나라'인지 실감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한국 정부는 일본과의 셔틀외교를 기반으로 중국과의 셔틀외교를 추진하고 있다. 한국 정부에게 셔틀 정상회담은 '동북아중심국가'라는 노 대통령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기본적인 '도구'이다. 노 대통령은 이제 막 그 비전을 구현하기 위한 첫걸음을 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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