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영어를 못하는데 어떻게 외국에서 여행을 그것도 운전을 하고 다닐 수 있느냐고 묻는다. 맞는 말이다. 만약에 당신이 전혀 영어를, 아니 영어 단어를 모른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중학교 3학년 영어책에 있는 문장들 중 절반 정도는 이해한다면, 또 보고 읽을 수 있다면, 유럽에 나가 누구와 영어로 정치나 경제 혹은 농담들을 재미있게 하지는 못하겠지만, 그저 캠핑장에서 하는 체크인이나 체크아웃, 물건을 사거나 길을 묻거나 전기가 안 들어와 강력하게 항의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오히려 문제는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못 할 거라는, 혹은 영어는 발음부터 문법까지 잘해야 폼이 난다는 망국적인 영어숭배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재의식화되어 있는 것, 바로 그 영어 열등의식인 것이다.
실제로 우리 아이들은 아빠가 영어를 아주 잘 하는 줄 안다. 유럽에서 아빠는 외국인을 만나도 전혀 거리낌없이 말하고 들으며 어떨 때는 배꼽을 잡고 웃기도 하니 보통 실력으로는 저리 못하리라 짐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학교에서 영어 듣기 수업을 받는 고등학교 1학년인 딸아이는 대충 눈치를 채서 알고 있을 것이다. 아빠가 단지 씩씩함과 영어를 하찮게 여김으로써 오히려 영어로부터 자유스러워지고 자연스러워질 뿐이라는 것을.
나는 영어로 내가 필요한 것들을 얻으면 그뿐, 그 이상 그 이하도 바라지 않는다. 여행에 있어서 그 정도는 지금 ‘디스 이즈 어 펜’ 수준이라 해도 몇 달 준비만으로도 넘치도록 충분한 것이며 만약에 아이들이 중학생 혹 고등학생이라면 온전히 그네들에게 맡겨도 충분하다. 오히려 여행을 아이들의 영어회화 실력향상의 계기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출발할 때 4개국 여행회화 책을 한 권 샀다. 꼭 필요한 말인데 모르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도 있었고 이탈리아에서는 한번 이탈리아 말로 멋지게 인사라도 해보자는 소박한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프랑스에서 큰 아이가 몇 번 들척여 보았을 뿐 한번도 써먹지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모든 곳에서 그야말로 ‘디스 이즈 어 펜’ 수준으로 다 해결될 수 있는 일상적인 대화의 반복이었으며 간혹 가다가 조금 깊은 내용이 필요할라치면 시제 순서 다 무시한 단어 나열로도 그들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유럽에선 영어 해도 답답하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습관처럼 ‘스픽 슬로우리(Speak slowly)’를 입에 달고 다녔다. 나는 그래도 전혀 부끄러울 것도 답답할 것도 없었다. 늘 초조해 하고 답답해하는 것은 그네들 쪽이었다.
가끔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는 오히려 영어를 너무너무 못하는 유럽인들 때문에 속이 터졌다. '훼얼 이즈 캠핑'을 여러 번 귀에 대고 얘기해도 못 알아듣는, 그러면서도 너무나도 천진난만하게 웃기만 하는 프랑스의 어느 고등학생 때문에 속이 터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묻다가 지쳐 숙소로 돌아와 애꿎은 대사관에 넋두리를 하면서, 깨달은 것은 나의 영어가 문제가 아니라 이곳의 영어가 문제였던 것이다.
그에 비하면 한국인들의 영어실력은 칭찬할 만하다 하겠다. 대부분 아주 간단한 영어는 알아듣되 단지 수줍음을 많이 타거나 나서기를 꺼리는 까닭에 잘 말하지 않을 뿐 일반국민들의 기초영어회화 수준은 아마 세계 제일의 수준이지 싶다.
자 이쯤에서 영어 때문에 자동차 캠핑여행은 못한다는 핑계는 접어두고 또 영어 한번 근사하게 하고 싶다는, 쓸 데 없으면서 불가능하기까지 한 욕심 같은 거 버리자.
그냥 오다가다 흔해 빠진 그러나 테이프까지는 있는 여행영어회화 책 한 권 마련하는 것으로 유럽에서의 커뮤니케이션 문제는 차고도 남게 준비완료한 것이 된다.
그 다음에는 두둑한 배짱과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 별로 잘하지는 못한다 하는 태연함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하기야 내버려두어도 아이들이 다 알아서 하기는 하지만….
여행을 끝내고 돌아올 때 취리히 공항에서 차를 돌려줘야 하는데 영국인 탁송기사와 길이 어긋났다. 다행히 시간은 여유가 있었으나 반납할 때까지는 사용자 책임이라 은근히 걱정이 되어 공항 도우미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여기저기 전화를 해보고는 뭐라 그러는데 아마 내가 장소를 잘못 찾았다고 그러는 것 같았다.
이렇게 중요한 사안에서는 대충 들으면 안 되는지라 나는 미심쩍은 부분을 몇 번 되물었고 드디어 그녀는 말로는 안되겠는지 종이를 가져다가 약도를 그려주며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나는 영어를 잘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지구별 식구들에게 영어를 못해서 당신들을 만나러 못 간다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건 여행은 내가 하는 것이지 영어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창하게 잘 하면야 좋기는 하지만서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