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지덕지 때가 묻고 버려진 것, 얼핏 바라보면 눈에 잘 띄지 않는 아주 작고 하찮은 것들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그는 체한 소에게 안수기도를 하여 '괴짜목사'라 불리기도 하고, 건망증까지 아주 심해 '건망증의 달인'이라는 별명까지 매달고 산다.
하긴, 오죽 건망증이 심했으면 반찬을 꺼내면서 밥그릇을 냉장고에 넣어두고 밥그릇을 찾아 두리번거렸겠는가. "주일 아침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강단에 서면서 가끔 설교 원고를 안 가지고 올라가기도" 했겠는가. "우리 집 전화 번호도 잊어먹고 손전화 번호도 잊어버릴 때가 종종"(기도하고 났더니 내 밥그릇이 없어졌다) 있었겠는가.
언뜻 보면 '빨리빨리'를 이 세상살이의 화두처럼 여기며 정말 '빨리빨리' 살아가는 사람들 틈에 그가 뒤섞이기에는 그리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는 급하다고 '바늘 허리에 실 매어 쓰랴'라는 속담을 떠올리며 느릿느릿 살아간다.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달라지는 세상, 그 세상의 숨소리 하나라도 빠뜨리고 싶지 않다"며.
"이 책의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을 때만 해도 나는 강화에 위치한, 서해안 최북단의 섬 교동도에 살고 있었다. 나는 교동도에 살면서 섬이 가져다 주는 영감에 깊이 빠져들곤 했다. 섬은 다양한 그림을 담고 있다. 하나님이 자연을 통해 허락한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사물을 대하면 모든 사물은 나름대로 의미를 가져다 준다."-'책머리에' 몇 토막
지난 해 시월, 7여년 동안 살았던 강화 교동섬을 떠나 부산 '좋은나무교회'(옛 성광교회)로 삶의 터를 옮긴 시인이자 목사 박철(50)씨가 산문집 <행복한 나무는 천천히 자란다>(뜨인돌)를 펴냈다. 모두 4부에 53편의 산문이 지문처럼 새겨져 있는 이 책은 글쓴이가 지난 1~2년 동안 교동섬에서 목회를 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느낀 여러 가지 심상이다.
제1부 '느림의 발견 느림의 행복'에 '고무신 한 켤레에 담긴 행복' '목사도 가끔 탈출하고 싶을 때가 있다' 등 14편, '제2부 '목사의 유쾌하게 사는 이야기'에 '야, 박철! 너 안 서?' '여보! 나, 뱀에 물렸어!' 등 14편, 제3부 '강화 교동섬에 가 보셨나요?'에 '강화 순무김치를 아시나요?' 등 13편, 제4부 '만나다, 헤어지다, 그리워하다'에 '첫눈 오는 날 돌아가신 아버지' 등 12편이 그것.
이 심상 속에는 교동섬 사람들의 고단하지만 평화로운 삶이 물무늬처럼 묻어나오기도 하고, 두 아들 아딧줄(호빈)과 넝쿨(의빈), 늦둥이 딸 은빈이에 얽힌 에피소드도 배꼽을 잡게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목회를 하면서 겪었던 일, 삶의 스승 같은 분들과 아내의 이야기도 숨겨져 있다. 마치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상선약수(上善若水)'처럼.
박철 목사는 이번 산문집에 대해 "내 주변의 소소한 일상을 일기를 쓰는 심정으로 적어 인터넷 신문인 <오마이뉴스>나 <뉴스엔조이>에 연재해 왔다"고 말한다. 이어 "인터넷 신문에 글을 올리면서 한 꼭지의 글을 쓰기 위해 더 많은 묵상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여행을 한다"면서 가장 큰 수확은 사람을 대하든지 자연을 대하든지 좀 더 깊이 있는 사유(思惟)와 관찰을 하게 된 것이라고 덧붙혔다.
우리 부부는 방앗간에서 빻아온 걸쭉한 상수리가루 덩어리를 자루에 넣고 물을 부어가며 주물럭거렸다. 그랬더니 뽀얀 상수리 녹말이 빠져 나왔다.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주무르라고 했기에 아내와 나는 열심히 자루를 주물렀다. 그것도 모자라 아예 자루 위에 올라가 빨래 밟듯이 밟았다.
남들에게 배운 대로 다 했으니 앙금이 바닥에 잘 가라앉기만을 바랐다. 이만하면 성공이다 싶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하루만 지나면 앙금이 다 가라앉을 것이라고 했는데 뿌연 물이 그대로 있고 앙금이 가라앉질 않는 것이었다. 그 이튿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일주일이 지나니 상수리 물에서 쉰내가 났다. 실패하고 만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자루가 문제였다. 발이 고운 천으로 만든 자루에 넣고 짰어야 했는데 아내와 나는 아무 자루면 어떻겠나 싶어 정부미 자루에 넣고 짰으니, 상수리 건더기까지 밖으로 삐져 나와 앙금이 가라앉지 않았던 것이다.
-44~45쪽, '상수리묵 한 덩어리가 주는 교훈' 몇 토막
글쓴이는 10년 전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장덕리에 살 때 아내와 함께 상수리를 주워 상수리묵을 만든다. 언뜻 보기에는 동네 사람들이 상수리를 빻아 상수리묵을 해 먹는 게 그리 어렵지 않게 보인다. 그래서 글쓴이는 동네 사람들에게 상수리묵을 만드는 방법을 배운 뒤 아내와 함께 상수리묵을 만들기 시작한다.
| | | 시인 박철은 누구인가? | | | '느릿느릿'을 삶의 지표로 살아가는 목사 | | | |
| | ▲ 시인 박철 | ⓒ박철 | | "그가 20여 년간 농촌과 산골 교회를 섬기며 농민에게서 배운 것은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화려하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한다. 이 마음은 선택받은 자만 누리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내면에 가지고 있지만 가슴속에 꽁꽁 파묻어 두고 꺼내 쓰지 않아 잠시 녹이 슬어 있는 것일 뿐이다."-공지영(소설가)
시인이자 목사인 박철은 1955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1985년 신학교를 나온 뒤 강원도 정선 두메산골에서 첫 목회를 시작했다.
그 뒤 경기도 남양읍, 강화 교동섬으로 옮겨 다니며 20여 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줄곧 농민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왔다. 이때 그가 발견한 삶의 지표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와 '느릿느릿'이다.
시집으로 <어느 자유인의 고백>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으며, 산문집으로는 <시골목사의 느릿느릿 이야기>가 있다.
지난 해 시월, 7년 6개월 동안 목회를 펼치며 살았던 강화 교동섬을 떠나 지금은 부산에 있는 <좋은나무교회>(옛 성광교회)를 섬기고 있다.
/ 이종찬 기자 | | | | |
하지만 상수리 가루를 만드는 일에서부터 당장 벽에 부딛치고 만다. 글쓴이는 그때의 실패를 통해 상수리묵 한 덩어리를 얻기 위해서는 수많은 공정을 거쳐야 하며, 만드는 사람의 정성과 수고가 더해져야 한다는 것을 깨친다. 또한 상수리묵 한 덩어리를 얻기 위해서는 발이 고운 천과 좋은 물에 걸러져 잘 말린 상수리 가루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뒤늦게 알게 된다.
세상 이치도 그에 다름 아니다. 글쓴이는 "아무리 세상이 거칠고 험해도 세상 탓, 다른 사람 탓, 환경 탓을 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좋은 상수리 가루를 얻기 위해서는 발이 고운 천과 좋은 물이 필요하듯이 자신이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물이 되고 고운 천이 되면 그만"이다. 그렇게 살아가면 "나로 인해 쓸모있는 것들이 만들어진다"는 것.
그러던 어느날, 미술수업이 거의 끝나기 직전이었다. 그날 그린 그림을 선생님이 직접 하나하나 걷는데 애들이 작당을 해서 선생님 옆에 서너 놈이 서 있게 하고, 다른 애들이 교단에까지 진출해서 교대로 선생님 팬티를 감상하기로 했다. 아이들이 시간을 끌며 그림을 제출하는 동안, 선생님은 아무것도 모르고 교탁에 양팔을 짚고 서 있었다.
교실 안은 혼란스러웠다. 바로 그 틈을 타, 아이들이 교단에 올라가 엎드려 선생님 팬티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선생님 팬티를 본 녀석들은 재미있다고 입을 막고 키득키득거렸다. 나는 아이들이 그 짓을 하는 것을 구경하면서 교단 오른쪽에 서 있었는데 선생님이 낌새가 이상했던지 갑자기 고개를 뒤로 휙 돌렸다.
서너 놈이 선생님 미니스커트 뒤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고, 나는 그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교탁 옆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깜짝 놀란 선생님은 얼굴을 찡그리더니 그대로 교실을 나가버렸다. 그 다음 시간은 점심시간이었다. 잠시 후 담임 선생님이 나타나셔서 '누구누구' 하고 이름을 부르는데 내 이름도 부르는 것이었다.
-126~127쪽, '선생님, 저는 억울합니다' 몇 토막
글쓴이는 가끔 중학교 때 있었던 웃지 못할 일을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지금도 그때 그 일이 유죄인지 무죄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왜? 그때 글쓴이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미니스커트를 즐겨 입었던 그 미술 선생님의 팬티를 보지 못했는데도 담임선생님께 불려가 반성문을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글쓴이는 그때 쓴 반성문의 내용을 더듬는다. "선생님! 저는 억울합니다. 저는 맹세코 선생님 빤스는 못 봤습니다. 사실 선생님 빤스를 좀 볼까 해서 교탁 옆에서 얼씬거리다 미술 선생님이 고개를 돌리자 거기 제가 서 있어서 선생님이 저도 선생님 빤스를 본 줄 오해하셨던 것 같습니다"라며 "저는 선생님 빤스를 못 보았으니 무죄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썼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그 반성문을 본 담임선생님이 박장대소를 한다. 이어 다른 선생님들까지도 그 반성문을 읽어보고 마구 웃으며 은근히 그날 벌어진 일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글쓴이는 끝내 미술선생님에게 자신의 무죄를 얘기하지 못한다. 더욱 웃기는 이야기는 미술선생님은 팬티를 본 애의 형과 결혼한다는 내용이다.
내가 교동으로 이사 와서 눈독을 들인 것 중 하나가 '순무김치'였다. 옛날 배추 뿌래기 맛 비슷한 게 약간 쌉싸름하면서 톡 쏘는 맛이 난다. 문득 유년시절이 생각난다. 그때는 늘 허기져 있었다. 늘 먹을 것이 어디 없나 찾아다녔다. 김장하는 날 어머니가 배추 뿌래기를 깎아주시곤 하셨다.
약간 매콤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먹을 만했다. 배추 뿌래기를 서너 개 먹고 나면 트림도 나고 방귀도 나왔다. 강화 '순무'가 바로 그 맛이다. 강화 '순무'는 강화 특산물이다. 순무는 완전 신토불이 식품이다. 요즈음은 강화 순무가 브랜드화 되어 미국으로 많이 수출된다.
강화 순무씨를 구해다 다른 지역에서 심어도 잘 자란다. 그러나 순무로 김치를 담그면 순무가 물러서 먹을 수가 없다. 삶은 호박처럼 되고 만다. 예전에 경기도 화성에 살 때 실제로 경험한 것이다. 순무김치를 제대로 담그려면, 순무를 칼로 어슷어슷 썰어 양념을 하고 될 수 있으면 물을 많이 잡아야 한다.
-199쪽, '강화, 순무김치를 아시나요?' 몇 토막
<행복한 나무는 천천히 자란다>에는 사람 내음이 묻어난다. 풋풋한 풀내음과 향그런 흙내음도 나고 가끔 잘 익은 순무김치 같은 맛도 풍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대자연에 대한 아낌없는 사랑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포근한 사랑이다.
그러한 그의 큰 사랑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느릿느릿 살아감으로써 주변 사람들의 삶을 결코 그냥 지나치지 않기 때문이리라.
"사람들과 깊은 정을 나누었지만, 그들의 아픔이 무엇이고 그들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내가 온몸으로 터득하고 나아가 내가 촛농처럼 녹아"('고수'를 못 먹으면 교통 사람 아닛시다)야 한다는 그의 말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