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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오마이뉴스> '사는 이야기'를 통하여 '느릿느릿 이야기'의 박철 목사를 알게 된 지도 벌써 2년이 훌쩍 지났다. 처음에는 목사답지 않은 솔직담백함에 매료되어 그저 한 사람의 독자로서 공감하며 그의 글들을 읽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점차 그 글들에 스며 있는 곧은 사상과 맑은 향기에 이끌려 그가 운영하는 '느릿느릿' 홈페이지 회원으로 가입하기에 이르렀다. 2004년 1월의 일이었다.

이후 서로 얼굴을 보기는 고사하고 전화 한 통화 나누지 않았고 주고받은 전자메일 역시 서너 통에 불과하니 우리가 그리 각별한 사이라 말할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그는 부정기적으로 간행되는 오프라인 느릿느릿 이야기의 소책자를 뉴질랜드에 살고 있는 내게까지 꼬박꼬박 부쳐주고 있으니, 나로서는 각별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해외에 나와 사는 이들에게 고국에서 보내온 우편물을 받는 것만큼 큰 기쁨을 주는 것도 그리 많지 않다는 말을 듣기는 했어도, 막상 내가 그 당사자가 되어 고국에서 보내온 우편물을 받게 되니 어찌나 기쁘던지! 내용물을 뜯어보기에 앞서서 우편물의 겉봉에 찍혀 있는 대한민국 소인과 한글로 쓰여진 주소만 보고서도 나는 가슴이 설레곤 했다.

올해에도 그는 벌써 두 차례나 그러한 기쁨을 내게 선사해주었다. 그 사이에 펴낸 자신의 산문집 <행복한 나무는 천천히 자란다>와 <목사는 꽃이 아니어도 좋다> 두 권이 출간될 때마다 내게 보내준 것이다. 아마도 그의 첫 산문집 <시골목사의 느릿느릿이야기>를 읽고 내가 서평을 써준 데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일 터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인연을 귀하게 여기고 보잘것없는 사람조차도 가볍게 여기지 않는 그의 마음 자세도 크게 작용했으리라 여겨진다. 그는 말한다. "흙이 좋고, 들이 좋고, 산도 좋고, 나무도 좋고, 풍경이 좋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사람이 제일 좋다"고.

내가 그의 산문집 두 권을 아껴가며 천천히 읽어나가면서 만난 것도 바로 그러한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가 세상살이에서 만난 힘 없고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사람들과 나눈 따스한 사랑의 풍경이었다.

2.

박철 목사가 이렇게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따스한 사랑을 품게 된 것은 그가 여러 글에서 밝히고 있듯이 서른 살 무렵에 깨달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그의 인생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대인들이 풍요 속에서도 좀처럼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작은 것을 소중히 볼 줄 아는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그는 진단한다.

부자는 재산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러니 욕심이 없는 사람이 부자이다. 자신이 가진 것만으로도 자족할 때 부자이며, 마음이 충만할 때 부자가 아니겠는가. 많이 가지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에너지를 쏟아야 하고 가진 것이 없어질 때 괴로움을 감당해야 한다. 적게 가졌을 때, 욕심을 다 놓아버렸을 때, 지금 이 자리에서 만족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행복은 시작된다.

사람들이 불행한 이유는 단 한 가지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눈을 들어 세상을 보면 우리는 열 손가락으로는 다 헤아릴 수 없는 행복에 둘러싸여 있다. 우리가 불행을 헤아리는 데만 손가락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 많은 행복을 놓치고 살아가는 것이다. 눈을 들어 주위를 다시 한번 살펴보라. 그리고 내 주위에 있는 행복을 손가락으로 찬찬히 하나하나 꼽아가며 헤아려 보라. - <행복한 나무는 천천히 자란다> 22쪽


ⓒ 뜨인돌출판사
이런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나이 오십이 다 되도록 그 흔한 신용카드 한 장 없이 가난한 시골목사로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도 조금도 기죽지 않고, 오히려 "오늘도 나는 자연을 통해 무상의 은총을 누린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리라.

또한 이런 시선으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니, 중학생 시절 여선생의 팬티를 훔쳐보았던 부끄러운 추억과 대학생 시절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던 불효 막심한 기억조차도 숨기지 않고 담담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것이리라.

<행복한 나무는 천천히 자란다>에 수록된 많은 글들은 이렇게 박철 목사가 시골에서 살면서 바라본 공간(자연)에 대한 명상록과 그에 촉발되어 떠올린 시간(추억)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그 글들은 한결같이 소박하면서도 섬세하고 때로는 유쾌하면서도 엉뚱하기까지 해서 마음이 차분해지기도 하는 한편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즐거움도 선사해준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공간과 시간에서 더 나아가 더불어 살아가는 가족들과 이웃들과 세상 사람들, 즉 인간에게 가서 머무르는 순간 우리의 차분해진 마음에는 감동의 물결이 일고 웃음 짓던 얼굴에는 눈물자국이 생겨나게 된다.

박철 목사가 공간과 시간 속에서 주목하는 것이 작고 하찮은 것들이듯이, 그가 주목하는 사람들 역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매우 보잘 것 없는 작은 사람들이다. 예컨대, 이른 아침부터 동네 골목골목을 누비며 주운 병을 팔아서 며느리 바지 사줄 돈을 모으는 교동의 명물 '병 아줌마'나, 30년 동안 승용차도 없이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전국을 누비는 피아노조율사 등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작은' 사람들의 가슴에는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조차도 품지 못하는 넉넉하고 '큰' 사랑이 숨어 있다. 그가 숨어 있는 그들의 사랑을 보고 느낄 수 있고 또한 그 사랑을 그들의 마음 밖으로 끄집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목사라는, 그것도 가난한 농촌의 목사라는 그의 남다른 인생 역정에 힘입은 바 크리라.

ⓒ 도서출판진흥
<목사는 꽃이 아니어도 좋다>는 그렇게 소외된 농촌 지역을 골라 다니며 20년 동안 목회 활동을 펼친 그의 신앙 고백과도 같은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어머니조차도 성에 차지 않아 하는 농촌 목회를 그가 고집하게 된 배경과 그 험난했던 과정을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열정적으로 술회하고 있다.

20년 동안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골 교회를 전전하며 목회 활동을 하기란 얼마나 힘겨운 일일 것인가! 그러나 그는 자신이 선택한 길에 조금의 회의도 후회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의 마음이 이렇듯 굳건할 수 있었던 것은 든든한 지주가 늘 그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목사는 꽃이 아니어도 좋다>에 수록된 그의 글들을 찬찬히 읽어보면, 그 지주는 하나님도 아니었고 예수님도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그건 바로 그가 목회활동을 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이었다.

새로 부임해 온 전도사 내외에게 주려고 장대비 속에 과수기를 이고 온 지정자 성도, 보험회사에서 받은 교통사고 피해보상금에서조차 십일조를 떼어 하나님께 바친 황집사, 교회의 온갖 궂은 일을 앞장서서 맡아 하면서도 조금도 생색을 내지 않는 이강우 권사….

이외에도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사람들이지만 늘 넉넉한 사랑으로 박철 목사를 대한 많은 사람들의 가슴 뭉클한 일화들이 <목사는 꽃이 아니어도 좋다>에는 여러 편 소개되어 있다. 박철 목사에게는 그들이 바로 하나님이요, 예수님이었다.

실제로도, 늘 눈물을 흘리며 예배를 드리곤 했던 지정자 성도의 얼굴과 저녁 노을을 배경으로 지게를 지고 논둑길을 걸어오던 이강우 권사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환영을 보았노라고 박철 목사는 고백하고 있다. 늘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이 내려지자 박철 목사는 문득 깨닫는다.

마음속에 벽을 쌓지 말고 자기 껍질 안에 틀어박히지 말라. 약점이 있으므로 사랑받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더욱 관대해야 한다. 자신을 좋아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스스로를 용서 못하겠다는 사람도 있다. 이상과 현실과의 차이는 너무 크고 이 때문에 자기혐오감에 몸서리친다.

초인(超人)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지 말라. 사람은 누구나 약점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약점이 있기 때문에 사랑받는 것일 수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완벽한 사람이 아니듯이 남도 마찬가지이다. 질투하는 마음, 남이 실패하기를 바라는 마음, 남을 밀어내려는 마음, 이런 마음들을 용서하라.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관대해야 한다. 마음 속에 벽을 쌓지 말라. 여러분의 약점이 사랑받는 이유라고 생각하라. - <목사는 꽃이 아니어도 좋다> 180~181쪽


약점이 있으므로, 즉 완벽하지 않으므로 사랑이 있을 수 있다는 이 말은 곧 작고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이 오히려 더 아름답다는 그의 인생관과도 통하는 말이다. 그렇다. 사람에 대한 진정한 사랑 역시 작고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 사랑은 한철에 피어나서 화려한 빛깔과 매혹적인 향기와 달콤한 꿀로 벌과 나비와 새를 유혹하여 씨앗을 맺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바로 시들고 마는 꽃의 약삭빠른 사랑이 결코 아니다. 그 사랑은 오랜 세월 자라나서 땀흘리는 이에게는 말없이 그늘을 드리워주고 추위에 떠는 이에게는 자신의 몸을 땔감으로 제공하기까지 하는 나무의 우직한 사랑이다.

그래서 그는 "사랑은 나무와 같다"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나무 같은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올해 펴낸 두 권의 산문집에 그가 붙인 제목 <행복한 나무는 천천히 자란다>와 <목사는 꽃이 아니어도 좋다>가 의미심장한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3.

박철 목사가 올해 1월에 내게 보내준 <행복한 나무는 천천히 자란다>의 속표지에는 '좋은 나무 되소서'라고 쓰여져 있다. '좋은 나무'는 지난 20년간 펼쳤던 농촌 목회를 접고 얼마 전 부산으로 옮긴 박철 목사가 부임한 교회에 다짐 삼아 새롭게 붙인 이름이다. 내게까지 그 헌사를 바치고 있으니 고맙고 또한 송구스럽다.

머지 않아 부산의 수정산 기슭에 그 이름처럼 아름드리 나무가 한 그루 자라나게 되리라. 아니 어쩌면 벌써 곧은 가지가 여럿 뻗어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지난 2년 동안 하루가 멀다하고 <오마이뉴스>에 글을 쏟아내던 그가 요즘 침묵하고 있는 것이 조금도 걱정되지 않는다. 그가 지난 20년 동안 농촌 목회에서 체험한 싱싱한 삶의 뿌리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뿌리도 제대로 내리지 못한 내게는 '좋은 나무'가 되라는 그의 헌사는 과분하다. 그렇지만 과분한 만큼 느릿느릿 오랫동안 노력을 기울여도 될 터이니, 그걸 받아들이는 내 마음이 그리 무겁지만은 않다.

나무처럼 듬직한 그의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박철 목사의 산문집 두 권을 읽고 난 지금, 나도 한 10년쯤 지나서는 그늘 드리울만한 가지들이 제법 많이 뻗어나간 '좋은 나무'가 되도록 항상 노력하자고 스스로 다짐해본다.

덧붙이는 글 | <행복한 나무는 천천히 자란다>

ㅇ 박철 지음
ㅇ 뜨인돌출판사 펴냄
ㅇ 2004년 12월 30일 초판 1쇄      

<목사는 꽃이 아니어도 좋다> 

ㅇ 박철 지음
ㅇ 도서출판 진흥 펴냄
ㅇ 2005년 4월 29일 초판


행복한 나무는 천천히 자란다

박철 지음, 뜨인돌(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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