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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릴 적 별명은 '미련곰탱이'였다. 아버지는 걸핏하면 나를 그렇게 부르셨다. 한 번은 아버지 심부름으로 목사님 댁엘 갔는데, 도무지 그날 심부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목사님 얼굴만 뵙고 돌아왔다. 나는 목사님 얼굴을 뵙고 돌아온 것으로 아버지 심부름을 훌륭하게 마쳤다고 생각하였다. 착각이었다. 저녁 나절 아버지께 불려가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그날 심부름의 내용은, "목사님, 아버지가 개장국 잡수시러 우리 집에 오시래요"라는 말이었다. 이 한마디를 잊어버렸던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행동이 굼뜨고 어리버리했다. 걸음을 걸어도 천천히 걸었다. 도무지 빠른 구석이 없었다. 아버지 눈에는 내가 답답하고 한심한 아들로 보였을까?
그러나 청소년 시절을 지나면서 나의 삶에도 속도가 붙길 시작했다. 밥을 먹거나 옷을 입는 시간도 빨라졌다.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도 "빨리빨리"라는 말이 흘러나오게 되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후딱 해치우는 일이 많아졌다. 외출을 하는데 아내가 조금이라도 시간을 지체하면 "뭘 하는데 그렇게 늦장을 부리냐?"고 잔소리를 늘어 놓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성격도 급한 성격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하여 삭히지 못하고 벌컥 역정을 내기도 했다.
그렇게 변해 버린 내 모습이 싫었다. 그런 고민 끝에 쉰 나이에 내가 붙잡은 삶의 표지가 '느릿느릿'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내 유년시절, 굼뜨고 어벙하고 좀 모자란 듯한 '미련곰탱이'의 삶으로의 복귀인지 모르겠다. 나는 내 앞으로 남은 삶을 느릿느릿 천천히 살고 싶어진 것이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가끔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자연과 사람에 대한 깊은 배려에 나오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순응과 조화가 없이 느리게 산다는 말은 공염불에 불과하다.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삶의 깊이를 논할 수 없다. 자연은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사람도 자연도 모두 자기 몫이 있다. 자기 몫을 사는 것이 신에게 가까이 가는 길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인가를 우리 모두는 안다. 다만 정신 없이 달리다 보니 그 단순한 진실을 잊고 사는 것뿐이다.
지금 당장 숨 넘어 갈 듯 달리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뒤처지게 되리라는 생각 자체가 바쁜 현대 생활이 세뇌시킨 강박관념일 뿐이다. 잠시만 멈추어 서서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면 너무도 명백한 사실을 우리는 애써 외면하고 있다. 내면을 응시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의도적으로라도 우리의 삶 속에 '쉼표'를 만들어 놓아야 한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쉬는 것조차도 하나의 일이다. 휴식을 위한 스케줄을 억지로라도 따로 빼어 놓지 않으면 '쉼표' 하나 표기할 자리가 없을 만큼 꽉 들어차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쉰다는 것은 숨을 고르는 일이다. 달리거나 노래할 때에도 숨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는 일상적인 삶에도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당장 울화통이 치밀더라도 깊은 심호흡을 한번 하고 나면 더욱 차분하게 그 문제에 대처할 수 있다. 아무리 할 말이 많아도 그것을 빠르게 쏟아 버리면 의사 소통에 문제가 생긴다. 그때마다 좀더 느긋하게 천천히 여유를 갖고 생각하자. 그러면 한결 삶이 편안하고 원만해질 것이다.
시나브로 계절은 겨울을 지나 봄을 향하여 부드럽게 조용히 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해피데이스 2005년 2월호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