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비(竹篦)’는 ‘불교에서 수행자를 지도할 때 쓰는 대나무로 만든 도구’이다. 예불, 참회, 공양 등을 할 때 죽비 소리에 맞추어 대중이 행동을 같이 하도록 한다. 또 좌선할 때 경책사(정신을 차리게 하는 사람)가 수행자의 어깨 부분을 내리쳐서 졸음이나 자세 등을 지도하는 데 쓰이는 것도 죽비의 일종이다.
그런데 옛 선비들의 글을 죽비소리로 읽어내는 이가 있다. ‘미쳐야 미친다’란 책을 써서 유명해진 한양대 정민 교수가 이번엔 옛글을 읽다가 문득 우리를 일깨워주는 문장들을 골라 감칠맛 나는 설명을 덧붙여주는 책을 ‘마음산책’을 통해 내놓았다.
글 중에는 조선 중기의 학자 최유지(崔攸之)의 글을 소개하는 ‘이기(理氣)’가 있다. “향초에 불을 태우면 그 향기가 아름답고, 누린내 나는 풀을 태우면 그 냄새가 고약하다.” 정민 교수는 이글을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젊어서 누린 풀로 악취만 풍기다가, 뒤늦게 바른 행실로 향기를 풍기는 사람도 있다. 한 때 아름다운 향기로 사람들을 매혹시키다가 어느 순간 고리삭은 냄새를 풍기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예전에 고고한 채 품격을 높이며, 학문을 하고, 시민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언젠가부터 초심을 잃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경우를 본다. 많은 사람에게 적절한 깨우침을 주는 글이다.
그런가하면 조선 중기의 문인 김득신의 글이 눈에 들어온다. “말의 살핌은 비쩍 마른데서 놓치게 되고, 선비를 알아봄은 가난에서 실수가 생긴다.” 물론 이 김득신의 글이 훌륭하지만 내가 보기엔 정민 교수의 해석이 더욱 번뜩인다.
“혈통 좋은 천리마도 기르는 사람을 잘못 만나면 비루먹어 병든 말이 된다. 비쩍 말랐다고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말 속에 명마가 있다. 꾀죄죄한 행색 때문에 눈길 한번 받지 못하는 가난한 선비 가운데 숨은 그릇이 있다. 하지만 우리 눈은 언제나 껍데기만 쫓아다닌다. 번드르르한 겉모습에 번번이 현혹된다.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
요즘 사람들은 브랜드에 정신이 없다. 명품이라면 빚을 내서라도 산다. 그것이 '짝퉁'이어도 좋다고 한다. 그 상품의 가치를 요모조모 따지려들지 않고, 이름이 그럴싸하면 그저 무조건이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에게도 브랜드가 붙으면 대접을 받는다. 명문대를 나오거나 ‘~사’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거물처럼 대한다. 그런 처사들을 정민 교수는 김득신의 글을 빌려 따끔하게 죽비소리를 낸다.
조선 후기의 학자 이종화의 ‘득실(得失)’이란 글을 보자.
“정승 남지는 정승 남재의 손자였는데 음직(蔭職)으로 감찰이 되었다. 퇴근하면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일한 것을 물었다. 하루는 돌아와 이렇게 여쭈었다. ‘하급관리가 창고에 들어가더니 몰래 비단을 품에 넣고 나왔습니다. 도로 창고에 들어가게 했는데 이같이 하기를 세 번을 했더니 관리가 그 뜻을 알아차리고 비단을 두고 나왔습니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네가 어린 나이에 벼슬을 하므로 매번 물어 잘 하는지 못하는지 알아보려 했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묻지 않아도 되겠다.’”
이에 정민 교수는 이렇게 해설을 단다.
“그는 아랫사람의 잘못을 보고 그 자리에서 야단치지 않고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릴 줄 알았다. 그 즉시 터져 나오는 불같은 노여움보다는 말하지 않는 침묵의 일깨움이 더 무섭다. 불같은 노여움은 불평과 불만을 사서 앞에서만 굽신대는 면종복배(面從腹背)를 불러오지만, 침묵의 일깨움은 두려움과 공경심으로 아랫사람이 마음으로 복종하게 한다.”
나는 남지처럼 할 수 있을까? 두려움이 생긴다. 이렇게 처신할 때에 만드는 권위가 아니라 저절로 만들어지는 권위가 생길 터이다.
조선 후기의 학자 허목의 글 ‘강하(江河)’야말로 죽비소리이다. “강하가 비록 아래로 흐르지만, 온갖 시내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은 자기를 낮추기 때문이다.” 강하(江河)는 낮은 곳에서 더 낮은 곳을 찾아 아래로 아래로 흘러간다. 그러면서도 모든 시냇물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스스로를 낮추었기 때문이라고 정민 교수는 나지막하게 말한다. 내가 큰 그릇이 되려면 자신을 낮추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 하겠다.
예를 들어도 들어도 끝이 없다. 120 문장 모두가 채찍비 같은 깨우침이다. 그런데 여기서 정민 교수의 책이 빛나는 또 하나의 까닭을 발견한다. 대부분 전통문화와 관련된 책들이 전문적이고 어려운 말투성이인데 여기선 그것을 배제하려 애쓰는 점이 돋보인다. 어려운 한문문장을 해석하면서 어쩌면 이렇게 쉽게 쉽게 풀어냈을까? 그것도 한문학자인 교수가 말이다.
그것은 한문과 우리말에 모두 해박하다는 증거이리라. 그리고 한문을 전공한 학자로서 뜻하지 않게 우리말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어 흐뭇하지 않을 수 없다. 또 몇몇 사람의 문장에서 발췌한 것들이 아니라 고려에서부터 조선 후기까지 다양한 문인, 학자들의 글을 섭렵하여 선보인다는 점에서도 큰 매력이 발산된다.
그동안 우리는 중국이나 서양의 명문장들을 모은 책들을 많이 접했었다. 그 책들을 읽으면서 왜 우리 학자나 문인들의 명문장들을 소개하는 책은 볼 수 없을까 하는 아쉬움이 컸었던 게 사실이다. 이제 정민 교수가 드디어 그 갈증을 풀어주었다.
모두가 머리맡에 이 책을 꽂아두고, 마음의 스승을 삼았으면 좋겠다. 하루하루를 죽비소리와 함께 하는 깨어있는 나날을 살아가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