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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뜰한 여행을 한 덕에 일정이 거의 끝나가도록 비상금은 물론 예상했던 지출도 다 못해 돈이 많이 남았다. 로마를 떠난 이래로 입장료가 비싼 볼거리도 없었고 여행 내내 식비와 텐트 자릿값 이외에는 돈 들인 일이 없으니 있는 곳만 유럽일 뿐 식재료비가 우리와 비슷한 까닭에 생활비는 한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여행자체가 추억이긴 하지만 무엇인가 색다른 추억거릴 하나 만들자고 서울에서부터 궁리하던 중에 스위스의 번지점프가 유명하다하여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손뼉까지 치며 반색을 하기에 좀 뜻밖이었다. 우리가 보통 어느 정도 용기를 필요로 하는 레포츠는 누구나 늘 하고 싶기는 하지만 막상 하려면 잠시 머뭇거리는 시간이 필요하게 마련인데 둘 다 마치 그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는 듯이 당장 하려고 덤비는 품새가 두려움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 8월인데 호수의 번지점프장은 추웠다
ⓒ 유원진
케이블카에서 호수로, 사십층 높이에서 뛰어 내린다는데, 할 수 있겠어? 인터넷에 소개 된 내용으로 겁을 주며 짐짓 위협을 해 보았다. 그럼요 그까짓 거. 야 신나겠다. 원래 아이들은 겁이 없나? 불현듯 군대에서 유격훈련 받던 시절에 줄에 연결된 도르래를 잡고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던 호수로 하강할 때의 기억이 났다. 할 수 있습니까? 예 할 수 있습니다.

하강! 눈을 질끈 감고 뛰어내렸고 몸이 출렁하면서 손끝에 도르래가 굴러가는 느낌이 전달돼 왔었다. 눈이 떠지지가 않았다. 얼마를 갔을까 조금 여유가 생겨 눈을 뜨니 호수가 눈앞에 있었다. 다리를 들고 손을 놓았던가. 물에 떨어질 때의 안도감이라니. 눈 깜빡할 사이에 정상에서의 공포는 스릴감으로 바뀌어 있었고 재미까지 있을 지경이었다.

그럴 것이다. 이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바이킹이니 로켓드롭이니 하여 수많은 탈거리로 스릴을 즐겨 왔기 때문에 본능 속에 있는 물리적 두려움이 스릴이라는 즐거움으로 변하여 있을 것이었다. 아이들은 여행 내내 스위스를 기다리는 듯 보였다. 그래도 말이 그렇지 막상 올라가 보면 꽁무니를 뺄 것이다.

▲ 안전장비를 점검해 주는 요원
ⓒ 유원진
“몇 살입니까?”

둘째를 흘낏 본 직원이 묻는다. 나이를 물어 본다는 것은 나이제한이 있다는 것이고 큰 아이는 안 물어 보는데 둘째만 물어보는 것은 나이가 턱걸이를 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아까 기다리면서 앞의 어떤 이가 무엇을 적는데 ‘14’라는 숫자가 얼핏 보인 것 같았다. 무슨 의미 인줄은 모르나 사람은 모름지기 순발력이 좋아야 한다.

“풔 틴”

나야 한국나이를 말한 것이니 거짓말은 아니다. 그녀가 만 나이를 물은 것도 한국나이를 말하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니까. 그녀가 둘째를 다시 한 번 보며 싱긋 웃는다. 14살이 나이 제한이란다. 물론 서양나이로. 여권 보자는 말은 안한다. 거기서 머리 굴려 서양나이 계산한다고 12로 했으면 콩이야 팥이야 얘기가 길어졌을 것이다. 하긴 나이야 엄마 뱃속에서부터 생명으로 인정해주고 나이를 따지기 시작하는 우리가 진국이 아닌가. 인권에 게거품을 물면서도 나이는 생명잉태존중의 우리식을 안 따라 오는 이들이 이상하다.

▲ 출발직전-여유가 있어 보인다
ⓒ 유원진
“아이들과 함께 점프를 하실 건가요?”
“노”
“나이가 어려서 부모가 동행해야 점프를 할 수 있습니다. 점프를 하지 않아도 부모가 같이 가야 됩니다. 부모의 동행요금은 따로 받지 않습니다.”

따라가는 것이야 뭐. 따로 할일도 없으려니와 아이들이 까마득한 허공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보고 싶기도 했다. 우리는 다음날 점심 무렵 그들을 따라나서면서야 왜 그들이 동행요금을 받지 않는다고 선심 쓰듯 이야기 했는지 알게 되었다. 미니버스에 타고 한 시간, 케이블카를 타고 산 정상 가까이까지 가는데,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트레킹 상품이면서 재미가 좋았던 것이다.

더욱이 전 세계에서 번지점프를 하기 위해 몰려온 사람들의 친근감표시는 오랜 친구들을 대하듯 하여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그런 그들은 우리 부부가 점프를 하지 않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였고 나 또한 서운했으나 아내의 고집을 이기지도 못했고 혼자 점프하기도 싫었다. 필자가 겁이 많아 못 뛴다는 제스처를 해 보이니 다들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 장비를 착용하고 대기중이다
ⓒ 유원진
독일여자 하나는 발에 묶고 하니까 안전하다며 필자를 아주 촌놈 취급을 하였는데 흉내 내는 몸짓까지 너무 진지해서 결국 필자는 아내의 핑계를 대고서야 비겁한 남자의 굴레를 벗을 수 있었다. 이놈들아 너희들이 유격을 알아? 안 묶고도 뛴다. 사실 필자도 익스트림류의 레포츠를 즐기는 편이다.

산 정상 부근까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갔는데 거의 정상 부근에, 어떻게 저런 곳에 물이 고여 호수가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커다란 호수가 있었다, 번지를 하는 사람들은 그곳에서 케이블카를 갈아타고 올라가 호수의 중간에서 뛰어내리게 되는데 밑에서는 까마득한 케이블카가 잘 보이지도 않았다.

순서가 정해지고 장비를 싣기 시작했다. 필자는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물어 보았다. 아이들은 겁은커녕 상기된 얼굴로 무슨 말씀을 하시냐는 듯이 의젓했다. 필자는 책임자인 듯한 여자에게 둘째가 눈이 나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는데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필자에게 땡큐를 두 번이나 해서 그들이 얼마나 신중하게 일을 진행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리 큰 걱정은 안했지만 피부로 느끼게 되자 적이 안심이 되었다.

▲ 점프를 끝내고 매달려 있는 둘째
ⓒ 유원진
올라가서라도 뛰기 싫거나 무서우면 그냥 와. 애들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브이 자를 보이며 올라탔고 사람들을 실은 커다란 케이블카는 우리 부부를 두고 정상으로 올라갔다. 주최 측에서는 우리 부부를 호수가로 데리고 가 그들이 뛰어내리는 것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호숫가에는 주최 측이 피워놓은 모닥불과 맥주 그리고 바비큐 소시지등속이 있었다. 물론 번지를 하는 사람들을 위한 작은 파티였고 미성년자들을 대신하여 우리 부부는 맥주와 소시지를 먹었다. 어찌나 추운지 달달 떨고 있으니 독일에서 온 청년들이 두툼한 티를 주어서 아내는 구사일생을 하였다.

가까이서 번지점프를 하는 것도 처음 보았지만 사람이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 어떻게 떨어지는지도 처음 보았는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다이빙하듯이 조금 낫게 폼을 잡는 거 말고는 다들 누가 뒤에서 밀어 떨어지는 것 같이 낙하하였다. 흡사 마네킹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너무 멀어서 누가 누구인지도 구분이 안 되어 사진도 못 찍고 있으려니 먼저 하고 내려온 금발 하나가 당신 아들이 몇 번 째라고 귀띔을 해준다. 이십여명이 넘는 점퍼들 중에서 제일 어리기도 하고 우리가 유일한 동양인이기도 해서 진행자들이나 같이 점프를 한 사람들이 눈여겨 본 듯했다.

너무 멀어서 찍힐까 하며 카메라를 맞추어 보는데 누가 뒤에서 툭툭 친다. 아까 내게 맥주를 권하던 주최 측 친구다. 위의 케이블카에서 전문가가 사진을 찍어 준단다. 공짜로? 물었더니 물론 ‘노’다. 일인당 두 장씩 넉 장에 우리 돈으로 칠천원정도. 사진 크기는 일반 크기의 두 배다. 스위스 물가치고는 비싸지 않네. 그래도 그 정도는 서비스로 해주지, 번지 값이 얼만데.

내가 웃으며 서비스를 강조하자 그가 무사히 돌아오는 게 서비스라고 해서 같이 웃었다. 그래도 바가지는 아니니 밉지는 않다. 이런 상황에서 한 장에 만원이라 해도 거의 살 것이 아닌가.

▲ 점프가 끝나면 호수에 떠서 대기중인 보트로 내린다
ⓒ 유원진
이들은 사람들을 다시 오게 하는 법을 알고 있다. 자연스러운 친근감과 동지의식을 품게 하는 여러 절차들, 한번 점프를 하려고 모였을 뿐인데 뛰어내리기도 전에 그들은 친구들이 되어 있었다. 오직 점프를 하기 위해 러시아에서 왔다는 청년하나는 ‘세 번에 한번은 공짜’라고 큰소리로 웃었는데 진짜인지 농인지는 모르되 모닥불 앞에서 소시지를 뒤적이던 여자 하나가 ‘묶지 않고 뛰어내리면 공짜’라며 뛰는 시늉을 해서 사람들이 배꼽을 잡았는데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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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으나 꿈으로만 가지고 세월을 보냈다. 스스로 늘 치열하게 살았다고 생각해왔으나 그역시 요즘은 '글쎄'가 되었다.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것 같기는 해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많이 고민한다. 오마이에 글쓰기는 그 고민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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