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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목적 하나는 자연의 생명력이나 신선한 문화적 기운을 담아오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판에 박은 듯한 음식, 볼 거리, 여행기념품, 또 다른 인파와 도시문명 등을 피해 갈 수 있는 여정이어야 '일상탈출'이라는 이 애처로운(?) 목적을 이룰 수가 있다. <세상의 아침>이나 <6시의 내고향> 정도에서 보기 어려운 색다른 여정이기를 기대하며, 여기에 '남도의 진정한 차 향기'를 찾아가는 길을 소개한다.

▲ 섬진강 줄나루. 곡성군 고달면에 있는 이 줄나루는 섬진강의 첫 줄나루이면서 잘 만들어진 나무 나룻배를 띄운, 가장 운치있는 섬진강 강나루이다. 남도의 진정한 차향을 찾아가는 길은 여기서부터 본격 시작된다.
ⓒ 최성민

방금 만든 차를 음미하고 있는 다향

지금 전남 곡성-구례-순천-보성, 경남 화개골-김해, 제주도 등지 다향(茶鄕: 차가 나는 지방)엔 햇차 향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해마다 차 만들기는 이른 곳은 4월 중순부터 시작해서 늦은 곳은 6월 초까지 간다.

지금쯤이면 모든 수제차(여기서 한국 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큰 다원의 '기계로 만든 차'는 언급 대상이 아니다. 수제차에 비해 기계차는 질을 따질 일이 아니라는 게 차인들 사이의 상식이다) 제다공방은 숨 돌릴 틈 없었던 한 달 남짓의 차 만들기 큰 일을 끝내고 금방 만든 차를 음미하며 '차 이야기'를 풍성하게 펼치고 있을 터이다. 예전 제주도 귀양객 추사 선생이 해남 대흥사 일지암 초의스님에게 빨리 햇차를 보내달라고 성화가 담긴 편지를 보낸 때가 이 무렵이지 않았을까?

비취(翡翠) 빛 덖음차를 다관(茶罐: 차주전자)에 우려 막 뚜껑을 열어젖혔을 때 방안 가득 차향이 퍼지는 순간-이 때를 가리켜 '팽주(烹主: 다관을 잡고 차를 우려내는 이)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했으니, 요즈음은 팽주들이 흐뭇함에 젖어 헤어나지 못할 때이다. 해마다 열리는 한국 최대의 차 박람회인 '티 월드페스티벌'도 6월 15일부터 19일까지 코엑스에서 열린다.

그나저나 차를 만드는 사람이나 얻어 마시는 사람, 즉 차를 알고 차를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무렵 차를 향한 그리움과 기대가 간절하여 매혹적인 차향을 좇아 코와 마음을 한껏 열어 두고 있을 것이다.

"차 한 잔 하세!"라는 말이 있듯이 예전엔 얼마나 차를 좋아하고 식별할 줄 아느냐가 문화적 소양의 척도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말은 오늘날 흔히 커피나 서양 음료를 마시러 가면서 하는 말이 되었으니 한편으론 우리 전통차에 대한 이해가 겉돌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차 전성시대, '차다운 차' 찾기 어려워

그런데 문제는 요즘 한국에 '차다운 차'가 있느냐이다. 차가 웰빙제품의 대명사로 회자되고 있지만 차의 미덕만 부각될 뿐 '한국 차'의 문제점이나 한국 차문화의 현주소에 대해선 말이 없다.

한국 차의 큰 문제점은 '좋은 차'의 기준이 정립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올바른 제다법'의 표준이 없다는 게 그 원인이다. 차가 중국에서 들어왔지만 제다법은 묻어오지 않았고, 다산 선생과 초의선사 등 극히 제한된 식자층 일부가 사적인 필요에서 차를 만들었을 뿐 그 제다법이 제대로 전수돼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구제금융(아이엠에프) 사태 이후 국민들의 애국심 덕에 수입품 커피를 대신하는 국산 차가 뜨면서 '차 상업주의'를 낳았는데, 대부분의 제다인들이 자신의 제다법을 돈 버는 '최고의 비법'으로 감추고 있어 각양각색의 제다법과 차가 '유일, 최고'를 구가하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차의 심각한 문제는 비료와 농약이다. 차는 과일이나 채소처럼 깎거나 씻어 먹을 수 없다. 농작물에 비료를 주는 일은 곧 제초제와 농약을 뿌려야 하는 일로 연결된다. 차를 대량생산하는 곳에서는 금방 깎은 차나무에 잎이 빨리, 그리고 많이 나도록 비료를 뿌린다. 또 잡초가 비료 기운을 빼앗지 못하도록 제초제도 뿌린다. 비료 힘으로 급성장해 연한 찻잎은 벌레와 농약을 동시에 부른다.

차를 많이 마시는 일본에서는 오래 전 다수의 청색증과 수전증 환자 발생이 차에 비료나 농약을 많이 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의심돼 최근엔 비료와 농약 주지 않는 차 품종을 개발하고 있다.

중국의 큰 제다공장에 가면 들머리에 농약잔류량검출기를 설치해 놓고 강조해 보여준다. 중국 역시 차의 농약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한국에서는 아직 이 문제가 크게 부각되지 않았고 찻잎의 농약잔류량검사를 엄격히 하고 있는 곳을 찾아보기 어렵다. 차농가의 소득증대와 '지역발전'을 구실로 쉬쉬하는 분위기이다.

농약 비료 걱정 없는 야생차밭

언제부터인가 '매실 만능주의'(매실이 마치 만병통치약이자 만능의 식품인 양 체질에 따른 장단점이 검증되지 않은 채 온갖 유형의 건강제품으로 판을 치고 있는 현상)가 그렇듯이 요즘 차가 전성시대를 맞고 있다.

물론 차는 매실이나 다른 음료와는 달리 어느 체질 누구에게나 좋은 효능을 가졌기에 동서고금 마실 거리의 차원을 넘어 고품격 문화재의 지위를 누려왔다. 그러나 차 전성시대에 '차 상업주의'의 횡포를 저지하고 '차다운 차'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 돼 가고 있다. 다향 남도 여행길에서 '진정한 차'를 향한 고민을 만나는 것은 차를 발견한 신농씨나 <다신전>을 저술한 초의스님과 해후하는 것만큼이나 신선한 충격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 섬진강 증기기관차. <태극기 휘날리며>를 찍은 구 곡성역~두가교(현수교) 사이 13.2km를 다니는 이 기차는 곡성군이 철도공사로부터 안 쓰는 철도를 사들여 관광자원으로 만든 것이다. 섬진강을 끼고 달리는 복고풍 기차로서 전국적인 명물이 돼 가고 있다.
ⓒ 최성민
전남 곡성군 오곡면 침곡리, 산자락을 휘도는 섬진강 중류의 살진 물살을 굽어보며 '산절로 야생다원'이 앉아 있다. 이곳에는 강 양쪽 12만여평의 야산에 야생 생태 그대로 차나무가 자라고 있다. '야생차'임을 내세우는 일부 다원이 비료 대신 퇴비를 주는 것을 근거로 하는 것임에 비해 '산절로야생다원'은 산의 나무를 베거나 땅을 깎아내지 않고 잡목 잡초 사이에 차 씨앗을 뿌린 뒤 모든 것을 자연에 맡겨 두었다.

음지식물인 차나무가 가장 좋아하는 '햇볕3 대 그늘7'의 환경이어서 차나무가 무척 건강하다. 차향과 맛이 뛰어남은 물론이다. 차 대안운동을 하는 '남도야생차지기'라는 모임이 운영한다. 미리 연락(061-721-3752, www.sanjllo.co.kr)하고 가면 둘러볼 수 있다. 여기서 난 <산절로>라는 차도 맛볼 수 있다.

▲ 산절로야생다원. 야산의 자연성을 그대로 이용한 순수 야생차밭으로 한국 최초로 시도되고 가장 큰 야생차밭이다. 차나무는 잡목 잡초들과 어우러져 때론 경쟁하고 때론 서로 의지하며 퍽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 최성민

▲ 산절로야생다원의 차나무. 음지식물인 차나무들이 잡목들이 지어주는 적당한 그늘 속에서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이에 비해 계단식으로 개발한 다원의 차나무들은 땡볕에 부대끼며 비료의 힘을 빌어야 한다.
ⓒ 최성민
'산절로야생다원'에서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남쪽으로 구례구역 직전 순천시 황전면 비촌리, 옛 비룡초교 자리에 '혜우 전통덖음차 제다교육원'(011-9308-7979)이 있다. 20년 남짓 '차 만들기' 수행을 해 온 혜우스님이 '차 상업주의'가 왜곡시켜 놓은 전통 제다법과 '차 신비주의'를 걱정하며 문을 연 곳이다.

차 농가나 차를 좋아하는 일반인들을 상대로 차에 대한 전반적인 이론과 올바른 제다법을 가르쳐 준다. 원료비 외에 무료이다. 지금 가면 늦물 찻잎으로나마 제다체험을 할 수도 있다. 혜우스님이 만든 차 <아직은 이른 봄>과 <봄을 담다>를 들며 '차에 관한 오해와 진실'을 귀담는 일이 여정을 옹골지게 채워준다.

"'차는 차(냉하)다'라는 말은 잘못된 것이다. 생 찻잎은 본래 찬 성품이지만 생지황을 구워 숙지황을 만들 듯, 인삼을 쪄 열성을 빼어내면 홍삼이 되듯, 찻잎을 덖어 어떤 체질에도 훌륭한 효능을 내도록 만든 것이 우리의 덖음차"라는 혜우스님의 말이 귀를 번쩍 뜨이게 한다.

▲ 혜우전통덖음차 제다교육원. 20여년 제다수행을 해 온 혜우스님이 왜곡된 전통제다법과 차문화를 걱정하며 섬진강변에 문을 열었다.
ⓒ 최성민
이곳에서 순천이나 송광사 앞을 지나 1시간 정도면 닿는 장흥, 장흥읍 평화리 외진 시골마을 방죽곁에 새로 지은 2층집 '평화다원'(061-863-2974)이 있다. 차를 파는 다방이 아니라 군의 지원을 얻어 전통차를 만들고 남도 일대의 차인들이 지나다 들러 다담을 나누는 곳이다.

여주인 김수희씨는 평범한 중년 시골 아낙인데 보림사 찻일을 거들었던 경험으로 지금은 사라진 전통차 '청태전'도 재현해 내고 있다. 차인이 아니라도 누구나 환영을 받는다. 장흥의 명산 천관산 기운을 담고 옆 고을 '다산초당'의 차인 정약용 선생을 기리며 마시는 차 한 잔을 '농약 친 찻잎 찌꺼기'를 갈아 '현미' 같은 악취 보완제를 넣어 만든 티백녹차에 비할 수는 없으리라….

▲ 장흥 평화다원이 재현해 낸 청태전. 조선시대에 일반인들이 요즘의 보리차처럼 늘상 마시는 음료수로 만든 전통차이다. 뻣뻣한 찻잎을 시루에 쪄서 절구통에 찧어 '고조리'라는 지름 5cm 정도의 대나무테에 천을 놓고 앉히어 찍어낸다. 그늘에 말렸다가 불에 구어 끓는 물에 우려내면 구수한 맛이 난다.
ⓒ 최성민

▲ 장흥의 명산 천관산. 산 들머리 등산로에 들면 지금 한창인 녹음의 상큼한 내음과 계곡물소리가 코와 귀를 열어준다.
ⓒ 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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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창간발의인, 문화부 기자, 여론매체부장, 논설위원 역임. 곡성 산절로야생다원 대표.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 소장. 철학박사(서울대 교육학과,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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