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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남 그 자체의 의미

구속된 일상사를 뒤로 하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휴가철이 되면, 산과 바다로, 그리고 머나먼 외국으로 다들 즐겁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어디론가 떠난다. 그 떠남이란 일상사에 지쳐버린 나를 다시 찾는 일임에 틀림없다. 일과 업무에 빠져 하루하루 자신을 잃어 가며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새로운 곳으로의 떠남, 곧 여행은 생존의 또 다른 조건일지도 모르겠다.

평소에 여행기 종류의 책을 잘 읽지 않았다. 낯선 곳에 대해 필자들이 소개하는 생경한 내용들이 마음 속에 편안하게 와 닿지 않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책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려는 본인의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낯선 세상을 읽는 가장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 기행 종류의 글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 사람풍경 겉표지
ⓒ 아침바다
김형경씨의 <사람풍경>도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여타 기행 관련 서적과 달리 이 책은 단순히 드러나는 표면적인 풍경에 도취된 작가의 감상류의 내용과는 달리 정신분석학의 입장에서 드러나는 풍경을 읽어 낸다는 점이 특이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 풍경이 단순히 자연이나 건축물 기타 등등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를 읽어 내려고 한다는 점이 이 책이 가진 큰 미덕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일상사에 파묻혀 때론 우리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 하지만 바쁘디 바쁜 현대인들이 그런 일상에 매몰된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특히 일상을 벗어나 또 다른 나를 찾아 나선다는 것은 쉽사리 감행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하지만 저자 김형경은 과감히 떠난다. 끊임없이 추락하고 고갈된 자신의 내적 풍경에 일침을 가하고자 일상의 모든 것을 차압해 버리고 훌쩍 떠난다. 하지만 그 떠남은 분명한 목적의식이 수반된 일임을 작가는 넌지시 제시하고 있다.

“애초에 여행기는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취재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고 있던 이십대 내내 내 소원은 관찰하거나 기록하지 않고, 활자화하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대상과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오감을 열고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온몸과 마음에 전해지는 감각과 감정들을 느껴보고 싶었다. 여행은 바로 그 소원대로 진행되었고 나는 아무것도 기록하거나 기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책을 쓰게 된 것 역시 ‘마음’ 때문이었다”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원래 아무런 의도 없이 사물과 자연, 그리고 인간을 그대로 자신의 오감으로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은 원초적 욕구에서 길을 나선다. 하지만 그런 작가의 오감에 세상은 문을 활짝 열게 되고 작가는 그런 세상의 흔적을 마음에 기대어 기록해 나가게 된다.

억압되고 구속된 우리 이성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생활인들이 스스로를 제대로 느끼고 받아들일 만한 기회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근대사회를 가로지르는 화두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였다면, 정보화 세계화를 지향하는 초현대 사회에 우리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뭘까를 또한 고민해 보게 된다.

아마도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닐까 한다. 자유와 평등을 지향하는 근대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은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조건의 토대가 되는 규칙과 질서였다. 그런 규칙과 질서를 부여하는 권위가 바로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이었다. 하지만 21세기를 넘어서고 있는 현대사회는 이른바 극도로 다원화된 사회이다. 이른바 획일적인 ‘이성’의 잣대로 이 사회를 바라본다는 것은 자칫 또 다른 폭력을 불러 올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인간 개개인 각자가 향유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의 자유로움일 것이다. 하지만 근대사회의 이성에 대한 틀이 우리를 일정한 형식과 질서에 너무나 오랫동안 묶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그런 근대 이성의 속박에 묶여 신음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이런 근대 이성의 억압 속에서 무의식이라는 훌륭한 기제를 찾아 과학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무의식은 다름 아닌 이성에 억눌린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해방시켜 줄 수 있는 치료제였다. 다만 그 치료제가 가지는 모습이 여전히 우리의 근대 이성의 그늘 속에서 제대로 그 힘을 발휘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내 마음의 근원을 찾아 떠난 여행

작가는 작품 전체에서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에서 사용되는 용어를 소제목으로 삼고 내용을 전개시켜 나가고 있다. 소제목들만 보면 이 책이 여행기라고 상상하기 힘들 정도이다. 하지만 여행을 통해서 작가의 오감 속으로 펼쳐진 풍경이 그대로 잘 드러난다는 점에서 분명한 여행기임에는 틀림없다.

작가의 말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이 책을 쓸 의도로 여행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속에 남은 흔적들이 뿜어내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풍경이 작가를 활자 속으로 이끌게 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세상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라기 보다는 작가의 내면속에서 재구성되고 다시 태어난 풍경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기고 한 장 한 장 읽어 가면서 세삼 작가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식견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에 정신분석학이나 인지심리학 등에 관심이 있어 이 분야에 기웃거리기는 해 보았지만, 어려운 용어와 난해한 설명 등이 곧잘 책을 덮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 풍경>은 하지만 책을 덮게 놔두지 않았다. 정신분석학에 사용되는 전문 용어들이 너무 쉽게 펼쳐지고 있다. 내심 ‘정신분석학이 이런 식으로 서술될 수 있구나!’라며 감탄을 연발하기도 했다. 자칫하면 개인의 자의식에 대한 말장난에 불과할 수 있는 면들이 세상 풍경, 특히 외국에서의 낯선 풍경들에 저자를 있는 그대로 맡기면서 느끼고 받아들여지는 바를 솔직하면서도 녹록치 않은 정신분석학 지식으로 풀어내는 작가의 솜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이 문제가 되는 사람이 성인이 되어 겪는 대표적인 어려움 중에는 성을 포함한 사랑의 문제, 돈을 포함한 현실적 삶을 관리하는 문제, 생을 활기 있고 즐겁게 받아들이는 놀이의 문제가 있다고 한다. 사실 그것은 생의 전반에 걸쳐 가장 중요하고 핵심인 문제일 것이다.”(18쪽에서)

정신분석학에서 이야기하는 무의식의 층위를 잘 갈파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에 있다. 즉 한 인간의 생에 정신적 육체적으로 그 근원과 원형의 모습을 구축하는 과정은 다름 아닌 무의식의 경계를 갓 넘어서는 시기라는 지적이다. 일반적으로 정신분석학의 측면에서 상당히 전문적으로 지적되는 부분을 저자는 알기 쉽게 잘 전달하고 있다.

또한 저자는 우리의 일상적 삶에 있어서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을 놓치지 않고 던져 준다. 물론 저자가 정신분석학의 전문가가 아니기에 가능할 일일 것이다.

“운동복을 갈아 입고 20분 정도만 달리면 부정적인 생각들이 가라앉고, 40분 정도만 지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한 시간쯤 지나면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솟아 오른다”(61쪽에서)

“평범함 인간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에 병이 들었을 때 몸을 보살피는 것이다. 우울증이 찾아오면 햇빛 속을 오래 걷고, 슬픔이 밀려오면 한증막에 가서 땀을 빼고, 무력감이 찾아오면 야산을 뛰어오른다.”(219쪽에서)


저자는 이처럼 일상에서 자신의 상처받은 마음과 정신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경험에 기대어 일반 독자들에게 잘 전달한다. 저자의 정신 치료를 위한 평범하지만 오랜 경험과 공부에서 나온 훌륭한 방법들이라 여겨진다.

요즈음 웰빙이다 뭐다 해서 건강에 대한 관심들이 상당히 많다. 특히 걷기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건강 유지하기 위한 인기 있는 방법으로 선택되고 있다. 저자는 이미 그런 혜안을 잘 터득하고 있는 듯하다.

삶은 결국은 살아가는 것이 살아 내는 것이다!

저자는 일상에서 수많은 정신적인 고통과 질병을 안고 있었다. 그 일상이 주는 고통과 억압이 너무 심해 일상을 버리고 길을 나선다. 이방인으로서 낯선 곳을 스쳐가면서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세상 풍경의 단편에서 저자는 스스로 마음에 대한 짧은 단상을 통해 점차 또 다른 세상 풍경을 펼쳐 나간다.

또 다른 세상 풍경에서 펼쳐지는 모습은 그야말로 저자의 순수하고 진실한 삶의 단면들이었다. 아니 차라리 일상에서 느끼고 받아들이지 못한 일상속의 숨은 진주들과 같은 것이었다.

“생이 안정되면…. 그 욕망이 나의 불안감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말이었다는 것도 여행 중에 알아차렸다. 생이란 본디부터 그렇게 유동적이고 불안정하고 소란스럽고 깨어지기 쉬운 것이라는 것을. 본래 그런 삶을 유독 불안정하게 느꼈던 것은 내면의 불안감 때문이었으며, 그것 때문에 정상적인 삶조차 불안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을. 내 면의 불안감을 인식하고 수용하자 오히려 불안정하다고 느껴온 삶의 조건들을 파도타기하듯 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삶의 안정을 꿈꾸는 대신 어떻게 파도타기의 중심을 잘 잡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것은, 적어도 내게는, 소중하고 의미있는 발견이었다.”(73쪽에서)

“인간 정신에 ‘정상’의 개념은 없으며, 생이란 그 모든 정신의 부조화와 갈등을 끊임없이 조절해 나가는 과정일 뿐임을 알게 되었다.”(295쪽에서)


저자의 소박하고 진솔한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는 정신적 해탈감은 우리가 꿈꾸는 삶의 욕망에 일침을 가한다. 삶이란 안정됨이 그 원형이 아니고 항상 불안하고 초조한 그 무엇이기에, 안정을 끊임없이 갈구하는 인간의 욕심이 빚어내는 그 형상이야말로 인간을 정신적 파멸로 이끌 수 있는 것임을 우회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인간의 삶에서 그 정형화된 모습은 그린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 내는 것이라면 조금은 정형화된 모습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풍경에서 시작해 우리의 삶의 이면을 알뜰하게 살펴 마음에 대한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 낸 작가의 솜씨에 마지막으로 깊은 찬사를 보낸다.

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여행 에세이, 개정판

김형경 지음, 사람풍경(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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