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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가 제각기 길을 잡았다. 여당은 특별법, 야당은 특검법이다. 현재로선 접점을 도출할 가능성이 커 보이지 않는다.

야당이 오늘 발의하는 특검법의 수사대상은 두 개다. 93년 2월 25일 이후 안기부와 국정원의 도청 실상 전모와, 도청 내용 중 안기부 국정원 국가기관 정당 기업 언론사 및 개인 등의 실정법 위반 사건이다. 야당의 특검법은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이라도 수사해 위법 사실에 대해서는 그 결과를 발표하도록 규정해 놓았다.

야당이 특검법에 도청 내용 공개 규정을 삽입함으로써 별도의 특별법 제정 길을 닫아 버렸다.

반면에 여당은 ‘안기부 불법 도청 테이프 처리 등에 관한 진실위원회법’을 마련, 조만간 발의할 계획이다. 종교계와 법조계 등의 인사 5-6명으로 위원회를 꾸려 도청 테이프 공개 여부와 보관 기한 등을 결정하도록 한다는 게 여당의 특별법안 내용이다.

여야가 제 갈 길을 잡았지만 서로가 인정하는 공통분모가 있다. 바로 위헌 소지다. 야당의 특검법에 대해 여당은 즉각 위헌 소지가 있다고 공격에 나섰고, 야당도 여당의 특별법에 대해 똑같이 손가락질을 하고 있다. 특검법이나 특별법 모두 헌법재판소 행을 피해갈 수 없는 운명임을 정치권 스스로 시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정치권이 그리고 있는 불법 도청 파문의 종착점이 뭔지 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천지를 뒤흔들 정도로 큰 소리가 나 쳐다봤더니 쥐 한 마리가 나오더라는 중국의 옛 이야기를 한국에서 재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두 법률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린다면 실효성 있는 결과는 오로지 검찰 수사 결과뿐이다. 검찰 수사는 이미 방향이 잡혔다. 수사팀을 확대해 특별수사본부를 구성했다고 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수사 초점은 도청 행위에 맞춰져 있다.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는 안기부의 도청 행위를, 특수1부는 국정원의 도청 행위를 전담 수사하도록 했다.

검찰의 이런 수사 방향은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과도 맥을 같이 한다. 노 대통령은 어제 기자간담회에서 “정경언 유착보다 도청문제가 심각한 인권침해이고, 그것이 국가권력에 의해 국민에 대해 가해지는 범죄행위여서 더 중요하고 본질적”이라고 말했다. 물론 특별법 제정을 강조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위헌 심판대에 오를 특별법이라면 현재로선 공허한 외침이고, ‘더 중요한’ 도청 행위에 대한 검찰 수사만 쳐다봐야 한다.

도청 내용은 간 데 없고 도청 행위만 부각될 것이라는 예견은 물론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을 전제로 한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헌법 정신’에 입각해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헌법재판관 9명이 모여 봐야 알 수 있는 일이기에 특검법과 특별법에 위헌 결정이 내려질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지금으로선 그저 헌법재판소 결정문이 낭독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상황을 대비할 뿐이다.

정치권의 묘수 아닌 묘수 덕에 한국 정치는 새로운 관행과 시스템을 만들어가고 있다. 덤터기 쓰기 싫고 해법 찾기도 어려운 사안이 생기면 일단 지르고 그 다음에 헌법재판소에 처리를 떠넘기는 행태가 그것이다. 대통령 탄핵이 그랬고, 행정수도 특별법이 그러했으며, 행정도시 특별법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에 특검법과 특별법을 메뉴판에 새로 추가하고 있다.

덕분에 국민은 헌법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고, 공화정의 실체를 체험하고 있다. 정치권의 온 몸 내던진 노력 덕택에 군사 쿠데타로 헌법이 유린됐던 지난 30년의 세월을 보상 받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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