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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 풍차, 히딩크 하지만 네덜란드 모델?

튤립과 풍차의 나라로 알려진 네덜란드는 월드컵 이후 히딩크라는 인물을 통하여 더 가깝게 한국에 접근하였다. 히딩크나, 튤립과 풍차가 아니더라도 연인이나, 직장인들은 점심시간이나 술자리 후 계산대에서 네덜란드와 만날 기회가 있다. 서양사회의 '얄미운 전통'으로 오래 전부터 소개되었지만 여전히 뿌리내리지 못하는 '더치 페이'(Dutch Pay)만 하더라도 우리가 일상에서 부딪히는 대표적인 네덜란드이다.

그러나 네덜란드가 이렇게 일상으로만 우리를 찾아오지는 않았다. 김대중 정부 이후 네덜란드는 경제모델로서 주요 정치인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곤 했다. 그러나 사회협약에 기초한 '네덜란드 모델'은 내용적 검토에 다다르기도 전에 정치권의 이해관계에 따른 정치공방의 희생물이 되어버렸다. 정치적 득실에 따른 자의적 잣대로 네덜란드 모델에 대한 진지한 토론은 아직 한국사회에서는 본격화되지도 못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 그 모델이 소개되기 오래 전에 이미 세계는 '네덜란드 모델'을 둘러싸고 활발한 토론을 전개하였으며, 이 토론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클린턴은 G7 정상회담에서 네덜란드 모델의 성공담이 연구되고 모방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으며, 뉴욕타임즈는 네덜란드 모델을 앵글로색슨모델이나 북유럽모델과는 다른 "제3의 길"로 극찬하였고, 독일 또한 네덜란드를 "영리한 이웃"으로 묘사하였다.

위기의 시간에 만난 노사

해변이 보이는 차도변 한쪽으로는 바다가 지표면을 덮칠 것처럼 높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전 국토의 20% 이상이 간척지라는 네덜란드(Netherlands)는 그 이름처럼 낮은 땅이었다. 운하의 도시 암스테르담을 빠져나와 덴 학(헤이그)으로 가는 한 시간 동안 산이라고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네덜란드의 사회협약 혹은 사회협의(Social Consultation)의 쌍두마차라 할 수 있는 노동재단(Stiching van de Arbeid)과 사회경제협의회(Sociaal Economische Raad, SER 이하 협의회)는 네덜란드의 정치적 수도라 할 수 있는 덴 학 시내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전자가 사회협약을 실질적으로 합의하는 단위인 데 비하여 후자는 사회협약에 관한 정책을 자문하는 기구라고 보면 될 것이다. 노동재단은 1945년에 건설되었으며, 특이하게도 사용자단체와 노조가 함께 만든 단체이다. 노동재단의 건설 이후 노사는 경제문제에 대한 정부의 책임성 제고를 요구하였으며 정부는 이에 대한 응답으로 협의회의 건설을 지원하였다.

노동재단과 협의회가 사회협약의 두 축이라면 이들 간에는 어떤 역할상의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 노동재단의 실무를 총괄하는 사무총장 브뢰케마(E.H. Broekema)씨에게 물어 보았다.

"노동재단과 협의회는 우선 근거가 다르다. 전자는 사법(Private Law)에 의해 건설된 것이고, 후자는 공법(Public Law)에 의해 설립되었다. 노동재단이 노사간, 즉 쌍방적 관계의 결합체라면 협의회는 11명의 사용자 대표, 11명의 노조대표, 그리고 사회문제 및 고용장관이 임명하는 11명의 독립적 전문가들로 구성되는 삼자협의체이다. 또 노동재단이 사회적 파트너들간의 협상(Negotiation)을 진행하여 산업 및 기업 단위의 협상당사자들에게 권고를 하는 단위라면, 협의회는 정부에 대한 자문기관으로 보면 된다. 따라서 둘 사이에는 긴밀한 협력관계가 존재하지만 하는 역할은 분명히 다르다."

▲ 노동재단의 브뢰케마 사무총장. "위기탈출을 위해서는 참가자들 상호 합의에 기초한 양보와 희생이 불가피하다."
ⓒ 김정수
그런데 네덜란드에서 노사가 어떻게 하나의 테이블에 앉아 토론은 물론이고 공동으로 재단을 만들 수 있었을까?

"노사관계라는 서로 상이한 입지와 이해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와 사용자가 하나의 조직을 만드는데 합의한 데에는 같은 상황과 동일한 이해관계가 존재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네덜란드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던 노사는 함께 재단을 건설하여 전후복구를 위하여 '똑같은 책임(equal responsibility)을 분담'하기로 합의하였다."

노동자나 사용자 모두에게 전쟁은 끔찍한 비극이었을 것이며, 여전히 1930년대 공황의 악몽이 생생했던 그들에게 새로운 네덜란드의 건설은 충분한 협력의 근거가 되었다. 또한 1919년 왕의 칙령에 따라 노사정이 모두 참여하는 최고노동협의회와 이들의 협력을 통하여 의회에서 통과된 된 단체협약법과 같은 사례는 전후협력의 사전적 경험이 되었다.

상대적으로 뒤늦은 산업혁명을 맞은 네덜란드의 경우 노조가 상대적으로 온건하게 출발하여 비교적 빠른 시일 내에 전국적 조직화를 이루었고 이들보다 뒤늦게 조직화에 들어선 사용자들의 경우 이미 위기의 30년대 노동자들을 공식적인 협상의 상대자로 인정하였다.

한 장짜리 문서가 만들어 낸 기적

노동재단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진 것은 후일 '네덜란드 기적'의 출발점이 되는 1982년 바세나르(Wassernaar) 협약체결일 것이다. 바세나르 협약의 탄생배경에 대해 물어 보았다.

"바세나르 협약은 오랜 기간 노사간의 갈등과 협력의 산물이다. 합의실현을 위한 다양한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지만 협약의 성사까지 많은 진통이 있었다. 당시 네덜란드 경제는 심한 경제위기에 허덕였다. 1979년 세계적인 석유파동의 영향에서 네덜란드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으며 80년대 초반에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국면에 진입했다. 물가는 치솟았고 실업률은 12%가 넘었으며, 문을 닫는 기업들이 속출했다. 당시 유럽의 다른 나라들의 경우 네덜란드 경제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어떻게 해야 경제가 저렇게 망가지지 않을 수 있을까라고 말할 정도였다. 무언가 탈출구를 만들어 낼 중대조치가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연구가 되는 '네덜란드 병'(Dutch Disease)이란 용어는 바로 이 1980년대 초의 네덜란드를 지칭한 것이다. 57년에 발견된 대규모 천연가스유전은 통화량을 증대시켜 물가를 인상시켰고 이는 물가연동제를 실시하던 임금의 자동적인 상승과 증가된 사회복지비용으로 이어졌다. 사회복지비용의 증대는 한편으로는 정부재정적자와 부채의 확대를 결과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의욕을 상실한 복지수혜자를 급증시켰다. 60년대 말에는 복지수혜자 1명의 부양을 위해 15명의 취업자가 필요했다면 70년대 말에는 그 비율이 3명으로 줄어 취업자들의 부담이 급증되었다. 심각한 병에 걸린 네덜란드에 79년의 오일쇼크는 결정타를 먹였다.

"위기가 정점에 달했던 82년 11월 노동재단의 주도로 노사 주요 대표자들은 헤이그 교외의 바세나르에 모여서 네덜란드 경제위기의 주요 현안을 논의했다. 바세나르 협약은 일자리 창출 강화, 이를 위한 기업부담 증대 방지, 노사간의 자율협상과 이에 대한 정부의 존중이 중심내용을 이루고 있다. 바세나르 협약으로 임금과 노동조건 그리고 이를 둘러싼 국가시스템이 정착되었다."

그가 내놓은 바세나르 협약문은 서명부를 제외하면 본 내용은 대원칙을 담은 한 장짜리 문서에 불과했다. 흔히 '네덜란드 모델'의 핵심으로 불리는 바세나르 협약문이 한 장짜리 신사협정이라니….

"바세나르 협약의 핵심은 파트너들 간의 신뢰와 자율적 합의이다. 협약 참가자들은 경제성장과 물가안정, 그리고 기업경쟁력 개선과 수익의 개선이 맞물려 있으며 위기로부터의 탈출을 위해서는 참가자들 상호 합의에 기초한 양보와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에 기초하여 대원칙에 합의한 것이다."

바세나르협약의 합의가 어떻게 실현되었으며 그 성과가 무엇인지, 그리고 지금 사회적 합의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해 브뢰케마 사무총장에게 물어보았다.

"바세나르협약 이후 네덜란드 경제는 여러 면에서 개선되었다. 바세나르에서 합의된 원칙에 기초하여 진행된 일련의 후속회의에서 노동자들은 일정기간의 임금동결을 수용하여 노동비용을 낮추는 데 기여하였고 사용자들은 노동시간의 단축과 고용창출 및 사회보장제도 근간의 유지를 수용하였다. 그 결과 네덜란드의 경쟁력이 강화되고 고용이 증대되었고 기업의 수익률도 개선되었다.

그러나 바세나르 협약이 지금까지 유효한 것은 아니다. 바세나르 협약은 사회적 협력의 중요한 출발점이자 모델로서 의미가 있고 그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사회적 합의는 새로운 노사관계와 글로벌화를 반영한 93년 '새로운 코스'(Een Nieuwe Koers) 합의 이후 많이 변화했다.

'97년에 노사는 '새로운 코스'의 후속조치로 노동유연성과 수입안정성의 연계, 노동생활과 사적생활의 결합, 직업교육에 대한 지원강화를 중심으로 하는 '의제 2002'(Agenda 2002)에 합의하였다. 그리고 2003년에는 정부가 노사양측의 사회보장부담비용을 감면하는 것에 기초하여 노사가 임금인상률을 2.5%까지 제한하는 데 합의하였는데 협약에 이렇게 구체적으로 수치를 명기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갈등보다 저렴한 대화와 협력의 비용

▲ "사회적 합의의 비용이 갈등의 비용보다 저렴하다"고 강조하는 브뢰케마 사무총장
ⓒ 김정수
네덜란드 사회적 합의가 지금까지 순항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사회협약 참가자들 간의 신뢰와 일관성이다. 대화를 통해 신뢰를 획득하고 실천을 통하여 신뢰를 확인한 것이 일차적인 성공의 열쇠였다. 그리고 정부는 이 사회적 합의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개입하지 않았지만 참여자들의 합의를 존중하였고 그 합의가 실천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정부의 이러한 방침은 정권의 교체와 무관하게 일관되게 진행되었다."

네덜란드에서 사회적 합의가 실현되고 지속되는데 어떤 사회문화적 연원이 있는지에 대해 물어 보았다.

"보아서 알겠지만 네덜란드는 물이 많고 지대가 낮다. 간척을 하면서 네덜란드 사람들은 끊임없이 협력을 해야 했으며 물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대화를 통하여 해결해 왔다. 이것이 사회적 대화와 갈등의 조정에서 중요한 역사적 뿌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잘 알다시피 네덜란드는 옛날부터 상인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협상과 흥정에 능했으며 상인들의 이러한 긍정적인 속성이 사회적 대화의 형성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사회협약이 그렇다고 단지 전통과 문화, 그리고 당시의 사회적 환경만으로 빚어졌다고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당시의 네덜란드 언론 역시 사회협약에 대해 우호적이었으며 그 장밋빛 전망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 볼 때 사회협약의 담당자와 그 환경조성자로서 정부, 의회, 정당, 공무원, 노조, 대기업, 언론의 신뢰도는 매우 높았다. 네덜란드인들은 주요 사회주체들의 협력이 네덜란드를 위기에서 구출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고 이러한 신뢰와 믿음 역시 사회협약의 성공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그런데 사회적 합의가 시간이나 여러 측면에서 비용이 많이 들지는 않을까? 그리고 최근 네덜란드 경제가 다시 정체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그것이 사회협약과 연관되어 있지는 않을까?

"그 지적이 완전히 틀리다고 확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컨대 갈등이 지속되거나, 정부가 이를 견디지 못하여 어느 일방의 손을 들어 문제를 해결한다고 치자. 전자의 경우는 노사 양측의 불만 모두 커질 수 있으며, 후자의 경우는 둘 중의 하나는 반드시 불만을 가질 수 있으며, 이 불만이 결국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 사회적 합의의 비용은 갈등의 비용보다 저렴하다."

'네덜란드의 기적'은 사회적 합의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회적 합의는 다른 유럽국가들과 달리 특정한 노선을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천명한 것은 아니었다. 대화의 참여자들이 합의의 힘과 믿음을 바탕으로 주요 상황마다 새로운 협력을 모색하고 실천한 그 자체가 기적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글로벌화의 압력 속에서 성장을 강조한 색슨모델과 분배를 강조하는 북구 모델을 사이에 놓고 네덜란드는 일방적인 탈규제(Deregulation)의 길 대신에 파트너들 간의 공동규제(Co-regulation)를 선택하여 성장과 복지가 손을 잡고 걷는 '제3의 길'을 개척했다. 지금 네덜란드 모델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지속가능한 사회적 합의의 기초가 존재한다면 네덜란드에게 이 도전은 그리 어렵지 않은 과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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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간 반부패운동에 몸담아 왔다. 또한 10년간 가족들과 함께 홈스쿨과 대안교육활동을 했다. 편역/편저로는 반부패지도 I, II, III이 있으며, 저서로는 "다리미를 든 대통령-부패 없는 사회를 위하여"(민들레)가 있다. 현재 캐나다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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