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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일 최고위원회의에서 한나라당의 부동산 정책에 대해 비판하는 의원들의 의견을 듣고 있는 박근혜 대표
ⓒ 오마이뉴스 이종호
우리나라의 부동산 보유세가 다른 나라에 비해 극히 낮은 수준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보유세를 높이고 거래세를 낮추는 부동산 세제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은 재정학계의 공식 의견이다.

지난 10월 방한했던 200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프레스콧 교수 같은 사람도 한국 부동산 시장의 거품에 관한 질문을 받고는, 부동산 관련 세제는 거래세율을 올리는 것보다는 보유세율을 올리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밝혔다. 프레스콧 교수는 세금 부과를 혐오하는 시카고 학파의 계보를 잇고 있는 소위 '정통 시장주의자'임에도 보유세 강화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부동산 문제의 근본 원인, 불로소득

부동산 문제의 근원은 부동산을 소유할 때 생기는 불로소득이다. 부동산 투기는 불로소득 획득 가능성 때문에 일어나고, 부동산 양극화는 이 불로소득이 일부 계층에 편중되기 때문에 발생한다. 따라서 부동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부동산 불로소득을 공적으로 환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부동산 불로소득을 환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보유세를 강화하는 것이다. 양도소득세 강화는 이를 보완하기 위한 대책으로 활용할 수 있다.

보유세 강화(와 거래세 인하)와 양도세 강화는 부동산 세제를 정상화시키는 차원에서나 부동산 투기를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차원에서나 필수불가결한 정책 수단이다. 이런 사실은 일반 국민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어서 그런지, 부동산 정책 관련 여론조사에서 이에 대한 지지도는 압도적으로 높았다.

8·31대책 중 세제개혁 부분은 보유세 실효세율 1%라는 목표를 포기했고 양도세 중과 대상을 크게 축소했다는 점에서 당초 기대에 못 미치기는 하지만, 보유세 강화와 양도세 강화를 통해 부동산 불로소득을 환수하고자 하는 정책 방향을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부동산 투기의 재연을 막지 못한 정부 여당에 대한 국민들의 강한 질책, 보유세와 양도세 강화 정책에 대한 높은 지지도, 대통령을 비롯한 여권 인사들의 강력한 의지 표명, 한나라당의 투기 근절 의지 표명 등을 종합해 보았을 때, 부동산 세제 관련 법안들은 어렵지 않게 국회를 통과할 줄 알았다.

그러나 대책 발표 후 부동산 시장이 진정세를 보이고 투기에 대한 국민들의 기억이 흐려지기 시작하자, 국회의원들의 개혁 법안 무력화 전략이 등장했다.

10·29대책의 무력화에는 열린우리당이 앞장서더니, 이번 8·31대책의 무력화에는 한나라당이 앞장섰다. 강남 지역이 지역구인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의 부동산 세제개혁 무력화 행태는 <오마이뉴스> 기사와 칼럼, <토지정의시민연대> 등 시민단체의 성명과 논평을 통해 상세하게 밝혀진 바 있다.

한나라당 의원들, "당론이 아니므로..."

재미있는 것은 이들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법안들이 8·31대책을 무력화시키는 내용이라는 시민사회의 비판에 대처하는 한나라당의 태도다. 개별 의원들의 법률 개정안은 당론이 아니므로, 그것을 가지고 한나라당이 8·31대책을 무력화시키려 한다는 비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당론을 내놓으라는 요구가 빗발치자, 11월 29일에 가서야 내놓은 내용이 종부세 과세 기준 유지, 종부세 세대별 합산과세, 투기목적의 1세대 2주택 양도세 중과, 부동산 거래세의 단계적 폐지 등이다.

1세대 1주택 혹은 저소득 노령자에 대한 종부세 면제, 양도소득세율 인하, 양도소득세 장기보유 특별공제 상향 조정 등 개별 의원의 발의 법안에 담긴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당론이라고 밝힌 것 중 종부세 과세 기준 유지와 세대별 합산과세에 각종 예외 인정은 명백히 8·31대책을 후퇴시키는 내용들이다.

한나라당은 부동산 부자 옹호 정당이라는 비판이 듣기 싫었던 모양이다. 개별 의원들의 법안과 당론 가운데 8·31대책의 세제개혁을 무력화 내지 후퇴시키는 내용들을 다수 포함시켜 놓고서도(한나라당이 1세대 1주택자 혹은 '서민'(?)들의 세부담 증가를 핑계로 내세우는 점이 흥미롭다), 막상 대책 자체를 철회하라는 요구는 하지 못하니 말이다.

입으로는 서민을 말하고 마음으로는 부동산 부자를 옹호하는 분열된 상태가 얼마나 오래 가겠는가. 여당이 12월 7일 밤 재경위 법안심사 소위에서 표결로 쟁점 법안들을 처리하자, 8일 한나라당은 "여당이 뒤통수를 쳤다"며 "현 상황을 국회 비상사태로 규정한다"고 밝히고, 예결위를 제외한 모든 국회 일정을 보이콧할 것임을 밝혔다고 한다.

말로만 서민을 위하는 당?

울고 싶던 차에 뺨을 때려준 격이랄까. 여당이 정치 도의를 깼다는 이유를 내세워, 마음 놓고 부동산 세제개혁 법안들의 입법화를 저지할 수 있게 되었으니 차라리 잘된 일 아닌가.

최근 한나라당이 차기 대권을 위해 이념적 위치 이동을 시도하고 있다는 보도가 종종 나온다. 지지율 40% 돌파는 그와 같은 행보의 열매라는 분석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즈음 한나라당 인사들의 입에서 '서민'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온다. 여당이 한나라당의 감세안을 수용하지 않고 부동산 세제 관련 법안들을 표결 처리한 것을 두고, 박근혜 대표가 '노무현 정권은 서민의 정권이 아니라'고 비판하는 식이다.

8·31대책 후속 입법 과정에 대처하는 한나라당의 태도를 보면 이념적 위치 이동은 무늬만 이동에 그치고 있는 것 같다. 진정으로 서민을 위한 부동산 세제개혁을 원했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재경위나 재경위 법안심사 소위에서 반서민적 행태를 보일 수밖에 없는 의원들을 배제했어야 한다. 또 개별 의원들이 발의한 법안들 가운데 8·31대책을 무력화시키는 내용을 담은 법안들은 자진 철회했어야 한다.

입으로만 서민을 위하는 척 하면 얼마 못 가 들통이 난다. 그런 얄팍한 전략으로는 차기 대권 쟁취는 요원하다. 한나라당이 진정으로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당으로 거듭나서 수권 정당의 면모를 갖추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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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실련 토지주택위원장, 토지정의시민연대 정책위원장, 토지+자유연구소 소장, 지식인선언네트워크 운영위원장, 대구가톨릭대 교수 등을 역임했고, 현재는 헨리조지센터 대표,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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