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야 겠습니꺼. 십분지 일이라도 건져야제. 다른데 어예 갈 데도 없고."
화재 발생 사흘째인 지난 2일 오후 서문시장에서 만난 상인 김아무개(55·여)씨는 그나마 화마를 피해가 상품을 노점에서 내다 팔고 있었다. 김씨는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지 않느냐"면서 "단돈 1000원을 받더라도 이렇게 해야하지 다른 데서 장사할 데도 없고…"라면서 말끝을 흐렸다.
지난달 29일 발생한 대구 서문시장 2지구 상가 화재 사건이 3일로 6일째를 맞고 있는 가운데 피해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대구 서문시장의 재산상 피해액은 지금까지 공식 집계된 것만 따져도 수백억 원대에 이른다. 관할 구청인 대구 중구청의 3일 오전 10시 현재 집계 자료에 따르면 피해건수는 총 1190건으로 피해액은 624억여 원. 하지만 피해 접수는 화재 발생 6일째인 오늘까지도 잇따르고 있어 피해 규모는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최악의 재래시장 화재로 인한 피해는 역시 '영세상인'들 몫이다. 이번 참화가 할퀴고 간 서문시장 2지구 상가(지하 1층·지상 3층)는 총 1267개소 상가가 빼곡히 모여 있었다.
하지만 이번 피해로 2지구는 완전히 전소된 상황이다. 특히 의류와 섬유 원단 도·소매 가게가 집중돼 있던 상가 2·3층은 건물 일부가 붕괴되면서 내부의 상품도 전혀 남기지 않고 다 타버렸다.
설 연휴를 얼마 앞두지 않고 물량을 비축해뒀던 상인들에겐 직접적인 타격으로 이어진 셈이다. 특히 2지구 상가는 전체의 65% 이상이 임대형 영세상인들. 따라서 화재 보험을 들 수도 없는 상황에서 대비책도 없이 하루 벌이 생계 수단마저 모두 잃은 셈이다. 기자가 화재 발생 사흘째인 지난 2일 현장을 찾았을 때 피해 상인들은 여전히 술렁이고 있었다.
생계 수단 잃은 상인들... "빨리 장사 시작해야 하는데" 발 동동
지난 1일 새해 벽두부터 피해상인 수백여 명은 매일 주차타워 1층 소방파출소 앞 노상에서 ▲대체 부지 마련 ▲화재 진상 규명 등을 요구하는 밤샘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피해상인들은 대구시와 중구청을 향해 "살려달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피해상인들은 무엇보다 영업을 재개할 수 있는 대체 부지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일단 물건을 모두 태워버렸더라도 장사를 다시 시작해야 재기의 발판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성곤 2지구 지하층 번영회장은 "하루 벌이로 먹고 사는 형편에서 무엇보다 장사를 빨리 다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여러가지 지원을 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인들에겐 다시 장사를 할 수 있도록 대체 부지를 조속하게 마련해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피해상인들은 현재 서문시장 방문객들이 사용하고 있는 2지구 옆 주차타워를 영업 재개 장소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주차타워는 지상 8층 규모로 1층엔 소방파출소가 들어서 있다.
하지만 대구시와 중구청 등은 "2지구 외에 1·4·5지구 등 인근 상가들의 동의가 우선돼야 한다"면서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어 피해상인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이에 대해 피해상인들은 "대구시 등이 주차장을 사용하기 위해선 주변 상가의 동의부터 구해오라고 하지만 자신의 피해까지 감수하면 누가 쉽게 동의하겠는가"라면서 "이러한 태도는 상인들 간의 반목만 사는 구태의연한 대처"라고 비난하고 있다.
피해상인 집단행동 움직임... 상인들 반목 커질 기미도
특히 화재 수습에 나서야 할 피해상인들이 직접 집단행동까지 나선 것은 이번 화재에 대한 원인과 진압 과정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면서부터다. 피해상인들은 상가 화재의 피해규모가 커진 것은 소방 당국의 늑장 대응 또는 부적절한 진압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피해상인들로 구성된 서문시장 화재사고 수습대책위는 2일 현장을 방문한 오영교 행자부 장관 등을 비롯해 정치권에 대해서도 사고 원인과 화재 진압 과정에서 진상을 규명해달라고 요구했다.
수습대책위는 이날 "상인들로서는 화재 진압이 늦어진 이유가 가장 궁금하다"면서 "소방파출소와 불과 몇m 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피해가 이렇게 커진 것은 이번 화재가 관재일 가능성이 높다"면서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화재 원인과 진압 과정을 둘러싼 논란이 커짐에 따라 경찰도 조속한 진상규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경찰은 화재 원인 규명을 위해서 2일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등과 합동 감식에 들어갔다. 경찰은 첫 목격자들이 발화지점으로 지목하고 있는 2지구 상가 북편 1층 이불점 부근에서부터 정확한 발화지점과 화재원인을 찾는데 주력하고 있다.
하지만 구정 설 연휴는 다가오고 있지만 대체 부지 마련도 쉽지 않게 되자 피해상인들의 불만은 높아가고 있다. 특히 행정 당국이 주변 상인들이 동의를 구해오라는 요구로 피해상인과 주변상인들간 반목이 커지면서 전국 최대·최고를 자랑하던 재래시장 서문시장은 술렁이고 있다.
| | 상인들 "약속 믿겠다" 호소..."연례행사 지킬지" 냉소도 | | | 잇단 '금배지'들의 방문...조속한 지원 약속했는데 | | | |
| | ▲ 박근혜 대표 등 한나라당 의원들이 수습대책위원회를 방문한 자리에서 한 상인대표가 "관심가져주고 현장을 방문하는 것도 고맙지만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해놓고 가시라"면서 호소하고 있다. | | 대구 서문시장 화재 사건으로 인한 피해가 확산되면서 여·야 대표를 비롯해 국회의원들이 속속 대구를 방문하고 있다.
특히 지난 2일 정세균 열린우리당 의장을 비롯해 중진 의원 등 10여명이 현장을 방문한데 이어 한시간 간격으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등 의원 10여명이 현장을 찾아 사고 현장을 속칭 '배지'들의 방문이 줄줄이 이어졌다.
여·야 대표들은 이날 서문상가 번영회 사무실을 찾아 사고수습대책위원 등 피해 상인들을 면담하고 고충사항을 들었다.
이날 자리에서 피해상인 대표들은 ▲영업 재개를 위한 대체 부지 마련 ▲사고 원인 및 피해확산 진상 규명 ▲조속한 세제 지원 ▲전국적인 모금운동 등을 요구했다.
상인 대표들은 또 "단순한 융자 지원 등으로는 생존을 해결할 수 없는 지경"이라면서 "단순한 금융 지원이 아닌 직접적인 피해 지원이 가능하도록 조속히 처리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여·야 대표들은 피해 상인들을 위로하고 "대구시와 구청이 협의 중인 만큼 조속히 지원이 가능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한 목소리를 냈다.
특히 여·야 대표들은 상인 대표 면담과 함께 사고 현장을 방문하고 주차타워 앞에서 농성 중인 피해상인들과 만남도 가졌다. 이날 자리에서 여·야 대표를 비롯해 의원들은 '조속한 지원'을 약속했다.
피해상인들도 "살려달라" "약속을 꼭 믿겠다"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상인 일부에선 시큰둥한 반응도 나왔다.
한 상인은 "사진 찍으러 온 것이지 별 것 있냐"면서 푸념을 털어냈다. 다른 한 상인도 "매번 이런 일 겪으면 연례행사처럼 왔다가 휑하니 자리를 뜨지 않냐"면서 "정말 정치인들이 진심으로 약속을 지킬지는 두고 봐야 안다"면서 냉소를 보냈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