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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82년 늦가을 당신이 근무하는 은행 창구에서 말다툼이 있던 날 퇴근 무렵 동부시장 근처 호프집에서 만난 이후 24년만에 처음으로 편지를 쓰네요.

인연이 되려고 했던 걸까요? 그날따라 은행에 고액권이 없다는 말을 전하면서 천원 권 스무 다발을 조심스럽게 내 놓던 당신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르네요. 내가 근무하고 있던 회사에서 거래를 하는 은행이어서 몇 번 보았었지만 인사 외에는 말이 없었던 당신이었지요.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던 서글서글한 눈망울이 인상적이었는데 선해 보이던 당신에게 모질게 화를 냈던 걸 생각하면 웃음이 납니다.

"은행에 고액권이 없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이나요?"
"죄송합니다. 마감 시간 직전이라서..."

매몰차게 눈을 흘긴 후 돈뭉치를 들고 가는 뒤통수에 직원이 말했다지요?

'참 그 처녀 성질 참 고약스럽네.'

그 날 퇴근 무렵 우리 사무실로 전화를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고, 그 기념으로 동부시장 근처 호프집에서 첫 데이트를 했던 기억이 나네요.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모습에 반해서 다음 약속을 기약했고, 회색 바바리코트를 휘날리며 약속 장소에 나타날 때 설레던 기쁨은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당신 기억하고 있나요? 은행잎 흐드러지게 흩날리던 날 천변을 밤새 걸으면서 프러포즈를 했던 당신 모습을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나한테 와서 삼시 세끼 밥만 따뜻하게 해 주면 돼. 나 중학교 때부터 친척 집에서만 살아서 내 밥 먹는 게 소원이거든. 글구 많은 돈은 못 벌어도 돈 걱정은 안하고 살게 해 줄 수 있어."

그래요. 당신의 소박한 희망사항에 망설이지 않고 결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2년 후 군산 경암동 이층 단독 주택에 신혼살림을 시작해서 이 달 5월 16일이면 21주년이 되네요. 밥 세 끼 따뜻하게 해 주지 못한 불량(?) 아내요, 가정 살림보다는 친목 모임과 취미생활에 열성이었던 간 큰(?) 주부였음을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래도 큰 탈(?) 생기지 않고 기 펴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침묵으로 신뢰했던 당신의 후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안해요. 고마워요."

잘못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 한마디 하는 게 참 힘들었습니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었을까요? 다툼이 생길 때마다 이유 없는 패자의 자리에서 돌부처가 되어 주었던 당신. 모든 일이 내 의견대로만 돌아가야 직성이 풀리는 아집과 고집을 통째로 누렸던 못된 아내였지요. 그 악담으로 가끔 당신이 했던 말이 생각나네요.

"내가 당신 구제해 준 것 알기나 아나. 나 아니었으믄 벌써 이혼녀가 되었을끼다."

그래요. 당신이어서 오래 지켜올 수 있었던 아내의 자리였습니다. 무조건 희생으로 살아온 당신에게 이 한 번의 편지로 잘못을 사과하고 다짐을 한다 한들 잊히게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정말 고맙다는 말 조심스럽게 이 자리에 함께 올립니다.

참, 당신은 잊었는지 모르겠네요? 명승이 결혼하면 따라 간다고 했을 때 그랬었지요.

"당신은 내 손만 잡고 와. 당신만은 내가 거둬 줄 테니까."

▲ 남편이 근무하는 회사의 지점장님께서 결혼기념일기념으로 주신 상품권입니다.
ⓒ 박영자
화롯가에 엿 붙여 놓은 것처럼 걱정이라던 당신 말이 자꾸 생각나는 요즘입니다. 몸 구석구석 삐걱거리기 시작하면서 철이 드는 걸까요? 참 고마운 당신의 생각이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스치는 말로 듣곤 잊고 살았네요. 그런 나에 대한 섭섭했던 감정 단 번에 다 쓸어내릴 수는 없겠지만 난 당신이 있어 누릴 수 있었던 행복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올 결혼기념일엔 지점장님께서 특별히 챙겨주신 영화 관람권으로 영화를 본 후 당신 손잡고 예전의 팔달로를 걸어보고 싶네요. 기대해도 될까요?

덧붙이는 글 | 남편이 근무하는 지점장님께서는 직원들의 결혼기념일을 챙겨주고 있답니다. 처음으로 결혼날자에 외출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한국인포데이타에도 보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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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방문 후 놀랬다. 한창 나이 사십대에 썼던 글들이 아직까지 남아있다니..새롭다. 지금은 육십 줄에 접어들었다. 쓸 수 있을까? 도전장을 올려본다. 조심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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