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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도끼를 바닥에 놓아두고 갑판으로 올라갔다. 올라가자말자 배의 선미로 달려가 바다를 살폈다. 검푸르기만 하던 바다 빛이 누르스름 흐려지며 파도가 조금씩 높아지고 있었다. 손바닥을 눈썹 위에 얹고는 멀리 서남쪽을 바라보다가 다시 뱃전에 출렁이는 물결을 굽어보았다. 이어 미간을 좁히며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헤아릴 수 없는 바다와 하늘의 변덕을 맥 짚어 보는 것이었다. 이어
"으음."
하고 두툼한 입술을 무겁게 다물고 길게 콧소리를 뿜었다.

김충연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살핀 왕신복이 바로 밑을 내려다보았다. 이물에 부딪쳐 두 갈래로 꼬리를 휘저으며 뿔뿔이 달아나는 물줄기의 빛깔이 검어졌다. 마치 먹물을 풀어놓은 것 같았다.

이어 멀리 시선을 던졌다. 저녁 햇살이 금빛 휘장을 드리운 가운데 뽀야니 안개가 엉켜 도는 듯하면서 불쑥 물기둥이 반공으로 치솟아 올랐고 그 끄트머리에 까만 구름장이 떠 있었다. 얼마동안 눈을 겨누고 있노라니 까만 구름장은 점점 옆으로 퍼지며 물기둥이 솟아오른 둘레를 온통 잿빛으로 감싸버렸다.

"저 물기둥이 무엇일까?"

"동해안을 떠돌며 바닷물을 감아올리는 회오리바람일 수도 있고, 아니면 국지적으로 쏟아지는 소나기가 멀리서 기둥으로 보이는 것일 수도 있겠지."

"어떤 경우든 저것이 우리 배 쪽으로 다가오면 큰 난리를 겪겠는 걸."

"걱정마. 이 배에 달린 키를 잘 조정한다면 피해 갈 수도 있어. 문제는…."

김충연은 말끝을 흐리며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어쩌면 폭풍이 몰려올지도 모르겠어."

"폭풍이라…, 거센 비바람과 함께?"

"한 여름에 동해로 폭풍이 찾아오는 것은 다반사로 있는 일이야. 우린 용케 그 폭풍을 피해 이때까지 온 것이지."

왕신복이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발해가 일본으로 보내는 사신을 겨울에 보내는 까닭은 동남쪽으로 부는 바람을 타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한 여름에 몰아치는 폭풍을 피하려는 이유가 더 컸다. 실제로 발해에서 일본으로 보내는 첫 사절단도 폭풍을 맞아 반 이상이 물귀신이 되고 말았었다.

발해에서 최초로 일본에 사절을 파견한 것은 무왕 9년인 727년. 그 사절단은 영원장군(寧遠將軍) 고인의(高仁義)를 우두머리로 한 24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을 태운 배는 일본 가까이 가면서 폭풍을 만나 배가 심하게 파손되어 대마도(對馬島) 해류에 떠내려가 일본 대와(出표)의 이찌(夷地)에 표착 하고 말았다. 거기서 책임자 고인의를 비롯하여 16명이나 되는 사절단이 에조 사람의 손에 죽고 말았다. 남은 8명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여 무예왕의 국서를 들고 헤이죠경(平城京)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후로 동해바다를 스쳐 가는 폭풍우는 발해 사절단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폭풍우로 바다에서 목숨을 잃어왔다. 왕신복은 여태 그 폭풍우를 만나지 않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먹장구름 속에 폭풍우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그 먹장구름이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바람이 더 세졌다.

시간이 흘러가자 퍼져 오르는 구름장은 마침내 해를 삼켜버리고 바다는 흐려왔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아직도 말갛게 높아 있지만 언제까지나 그대로 있을 것인지 기약할 수 없었다. 한 식경도 못 넘겨 주위가 온통 구름에 싸이고 말 것이다.

조금 전보다 배는 훨씬 더 흔들렸다. 바람이 이는 줄은 깨닫지 못하겠으나 출렁대는 물결은 한결 드높아갔다. 배가 한쪽으로 기울 적마다 배 전체에서 삐거덕 소리가 났다. 이어 쏴- 바람이 스쳐갔다. 급한 형세에 몰리듯 배가 한쪽으로 기우뚱했다.

선미 쪽으로 말갛게 올려다 뵈던 하늘은 어느 새 흔적도 없이 온통 뭉개 도는 검은 구름으로만 덮여 있었다. 하늘과 바닷가 맞닿은 것이 아니라 바다와 구름이 한 덩어리로 엉켜 도는 갑작스런 변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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