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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 어디에 눈을 던져도 바다와 구름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바다 위를 떠가는 것이 아니라 구름 속을 헤쳐 가는 배였다. 배 앞에도 배 뒤에도 먹구름뿐이었다. 주위가 급격히 어두워지면서 마침내 굵은 빗방울이 후드득 갑판을 때리기 시작했다.

둘은 그 비를 맞으며 잠시 걱정을 잊는 듯 했다. 얼마 만에 맞아보는 비였던가? 아니 오랜만에 맛보는 신선한 물이기도 했다. 둘은 갑판에 나란히 선 채 하늘을 향해 입을 최대한 크게 벌렸다. 굵은 빗방울이 입으로 들어가 목으로 넘어가면서 신선한 청량감이 몰려왔다. 동시에 소금기와 땀으로 범벅이 된 옷을 차갑게 적시자 기분이 상쾌해졌다.

방울지어 흩뿌리던 비가 금새 댓줄기로 뻗어 줄기차게 쏟아 내렸다. 머리 위로 빗물이 흥건히 배어 이마로 뺨으로 목덜미로 흘러내리는 물줄기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때 김충연이 외쳤다.

"어서 항아리를 가져와."

왕신복은 뱃집 주방에서 항아리를 있는 대로 가져왔다. 그걸 갑판 위에 올려놓고 흔들리지 않게 밧줄로 꼭꼭 묶어두었다. 금새 항아리에 빗물이 차 올랐다. 왕신복은 먼저 물이 차 오른 작은 항아리를 들고 뱃집으로 들어갔다.

다른 빈 항아리를 가지고 오는데 그만 중심을 잃고 기우뚱거리며 한쪽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바람이 거세고 파도가 높아지면서 배가 점점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겨우 중심을 잡아 몸을 일으킨 왕신복은 데굴데굴 굴러가는 항아리를 쫓아갔다.

항아리는 난간에 부딪치면서 그만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는데 배가 다시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었다. 동시에 옆으로 쓰러진 왕신복이 난간을 아슬아슬하게 잡아 바다에 빠지는 것을 면했다. 두 팔에 힘을 주었다가 한쪽 다리를 갑판에 걸쳐 다시 올라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김충연이 외쳤다.

"어서 갑판 밑으로 피해야겠어."
"안 돼. 비가 오는 동안 최대한 물을 많이 받아놓아야 해."
"물을 많이 마셨잖아. 이 정도면 이틀 정도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버틸 수 있어."
"항해를 얼마나 더 할지 모르는데 이 정도로는 턱도 없이 부족해."

왕신복은 기우뚱거리는 갑판 위를 힘들게 움직이며 넘어진 항아리들을 다시 세운 뒤 밧줄로 난간에 단단히 붙들어 매었다.
"넌 어서 갑판 밑으로 피해 있어. 나도 곧 내려갈게."

왕신복은 한쪽 다리가 불편한 김충연의 팔을 부축하여 뱃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너도 어서 들어와."
김충연이 외쳤지만 왕신복은 여전히 갑판 위에서 빗물이 가득 찬 항아리들을 뱃집으로 갔다 날랐다.

그때였다. 성난 파도에 실려 먹구름 속을 뚫어 오르듯 고물을 번쩍 추켜 올리던 배는 어느 새 형세를 바꾸어 고물은 물결에 잠기고 이물이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곤두박질하여 백 길 천 길 바다 밑으로 기어들 것만 같았다. 난간에 묶여 있는 항아리들이 모두 바다 속으로 빠져버릴 기세였다.

"이럴 수가……"

왕신복이 난간 쪽으로 향하려는 것을 김충연이 억지로 막았다.
"지금 갑판 위로 나가면 너까지 바다 속에 빠지고 말아."
"그렇다고 배가 이렇게 심하게 기울고 있는데 갑판 속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어. 이 배가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이 배의 주인은 바로 나야."
"몰래 배에 올라탄 삯은 지불해야지."
"삯이라면 키에 달라붙은 해초더미를 제거한 것으로 대신했잖아."

왕신복이 피식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진지하고 완고했다.
"이 배가 무사해야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어. 난 갑판에서 이 배를 지킬 것이야."

그렇게 말하는 동안 배는 더욱 요동을 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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