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하타 제철소 굴뚝에는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 | | | | ⓒ 김종수 | 7월의 첫 날, 아힘나의 평화학교의 학생들이 조선인 강제연행 유적지를 찾아갔다. 일본은 이 때 장마철이었는데 밤에만 비가 오고 낮에는 비가 오지 않고 잔뜩 흐리기만 하였다. 잔뜩 흐린 하늘 아래 태평양전쟁 당시 군수물자를 공급했던 야하타 제철소가 보인다. 일제시대에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현해탄을 너머 이 곳으로 끌려와 강제노역을 당했다. 이른 아침에 본 이 제철소의 굴뚝에는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죽은 이들의 인권을 생각하는 이누까이 목사님
| | | | ⓒ 김종수 | |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아힘나 아이들은 후꾸요시 전도소에서 사역하시는 이누까이 목사님을 찾아나섰다. 언제나 그랬지만 오늘 이누까이 목사님 부부의 얼굴이 무척 밝다. 아이들을 만나기 때문이었을까?
이누까이 목사님은 대학시절 탄광으로 봉사활동을 하다가 그 지역 어린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에 빠져 탄광지역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고, 점점 이 지역으로부터 선교과제를 찾게 되면서 지금까지 민중선교를 해오시는 목사님이셨다. 그러다가 이 지역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숨져간 조선노동자들의 넋과 만나게 되었고, 이 곳에서 죽은 이들의 인권을 생각하며 매일 이 곳을 찾는 이들을 마다하지 않으며 강제연행 역사유적지들을 안내하고 있다.
| | | | ⓒ 김종수 | |
70세 가까이 되시는 이누까이 목사님은 언제나처럼 앞장서서 석탄박물관으로 아이들을 인도하였다. 석탄박물관에는 지꾸호지역에 있던 탄광의 수와 규모, 그리고 당시 탄광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노동환경 등을 볼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한편, 현 일본 외상인 아소의 조부가 운영했었던 아소탄광도 이 지꾸호에 있었다. 그 곳에서도 역시 강제연행되었던 조선노동자들이 있었다.
석탄자료관에는 지꾸호에 있었던 대기업 탄광에서의 채탄과정과 운반과정이 매우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 | | | ⓒ 김종수 | |
하지만 이누까이 목사님의 설명은 전혀 달랐다. 이것은 눈속임이었다는 것이다.
| | | | ⓒ 김종수 | |
명치유신 때의 탄광내부 모습이라고 설명하는 사진의 이 모습이 반세기가 지난 당시 실제 탄광내부 가장 아래층에는 여전히 존재하였다는 것이었으며, 그 열악한 작업환경에 바로 강제연행된 우리 조선노동자들이 혹독한 노동을 강요 당했고, 최소한의 인권조차도 보장받지 못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는 것이다.
휴우가 묘소 뒤 후미진 곳에 묻힌 강제연행 조선노동자들의 한
이렇게 혹독한 노동현장에서 견디다 못해 죽어나간 조선인들은 얼마였을까? 이누까이 목사님과 고꾸라 교회의 주문홍 목사님은 일본의 한 개인가족묘인 휴우가(日向)묘소로 아이들을 인도하였다. 휴우가 묘소 옆에는 묻힌 이들이 평소에 기르던 애완동물의 무덤까지 가지런하게 있었다.
| | | | ⓒ 김종수 | |
그러나 조금 더 올라가자 뒤쪽 후미진 곳에 봉분도 묘비도 없고 그저 돌덩이만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어 언제 어떻게 얼마나 많은 이들이 묻혀 있는지 알 수 없는 '조선노동자들의 무덤'이 있었다.
| | ▲ 지꾸호 곳곳에는 이렇게 탄광에서 죽어간 조선인들의 무덤이 널려 있다. | | ⓒ 김종수 | |
필자가 이 곳을 찾아 온 것이 벌써 다섯 번째이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곳을 다녀갔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 곳에 묻혀 있는 조선인들의 수가 얼마인지, 누가 묻혀 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저런 문제가 있을 수 있었겠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그 누구도 조사하겠다고 나선 이가 없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묻힌 이들의 신원을 밝혀내는 것이 죽은 자와 산 자의 인권을 회복하는 길
아힘나의 아이들은 재일조선인도 아닌 일본인으로서 이러한 일들을 계속하는 이유에 대하여 물었다. 이누까이 목사님은 얼마 전,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최대의 강제수용소이자 집단학살수용소인 아우슈비츠수용소를 방문하고는 심히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 부끄러움 이란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된 유태인들의 사망자 명단은 있는데, 나는 이 곳에 조선인노동자들이 묻혀 있다고는 하지만, 누가 얼마나 묻혀 있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어찌 그 뿐인가? 일본군국주의자들은 강제연행 조선노동자들의 산재*사망기록을 숨겨버렸으며, 그리고 원자폭탄으로 숨졌거나 후유증에 시달리는 이들의 기록, 그리고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고간 조선여성들의 명단을 은폐하였고, 관동대지진 때 극심한 혼란을 안정시키려고 온갖 유언비어를 날조해 국민들의 분노를 조선인들에게 향하도록 하여 소위 마을 자경단들이 아무런 죄없는 조선인들을 남녀노소 가릴 것없이 6000여명 이상을 학살하도록 조장했던 그 기록 역시, 그 어디에도 남겨 놓지 않았다.
| | ▲ 아힘나 임수진 기자의 질문을 받고 있는 이누까이 목사(오른쪽) | | ⓒ 김종수 | |
그래서 이누까이 목사님은 휴우가묘소에 묻혀있는 조선인들의 신원을 밝혀내는 일이 남은 여생에 꼭 해내야만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일들이 억울하게 숨져간 조선노동자들의 인권이 회복되는 길이며, 또한 이 일이 바로 나의 인권이 회복되는 길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어찌 한 목회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랴? 반가운 것은 이 지꾸호의 양심적 일본인들도 지꾸호에 묻힌 수많은 조선인들의 인권을 위해 그들의 신원을 밝혀내는 일에 나서려 하고 있다. 그러나 민간시민단체가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양쪽 정부가 나서야 한다.
일본 정부는 더 이상 역사를 은폐하거나 왜곡하지 말고 강제연행으로 희생된 조선인들의 신원만이라도 밝혀 주기를 희망한다. 아울러 한국정부 역시 기민정책으로 일관했던 지난 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식민지 백성으로서 당해야만 했던 재일동포들의 서러움과 그 맺힌 恨을 풀어드리기 위해 지금이라도 일제의 만행을 드러내는 일에 조금더 주저해서는 안될 일이다.
| | ▲ 한국에서 가져간 흙을 무덤 주변에 뿌리고 있다. | | ⓒ 김종수 | |
| | | | ⓒ 김종수 | |
아힘나의 아이들은 미리 준비해 간 고국의 흙을 무덤 주위에 뿌리고 한반도기와 태극기를 꽂고, 이 곳에 묻힌 우리 선조들의 恨과 만날 수 있었다. 아이들의 미래에 다시는 이러한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역사에 대한 책임과 현재 우리가 해야할 책임을 다하고 앞으로 살아가야할 미래의 역사를 스스로 써 나가기를 다짐하면서 아린 가슴을 안고 휴우가 묘소를 내려왔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재일코리안의 삶을 통해 우리 민족의 잃어버린 얼을 찾아나선 아힘나 아이들의 다큐멘터리 제작과정의 기록 2편입니다.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