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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서열을 무시하기 어려웠던지 같은 배분의 첫째 사고(師姑)가 장문인이 되었고, 그녀는 아미파 사상 가장 어린 나이로 장로 직에 올랐다.

"그렇소. 회운사태께서는 칠일 전에 이곳에 당도하셨고, 성곤어른께서 도착하신지는 벌써 보름 정도 지났을 거요."

성곤 어른이란 동정오우 중 한 명인 성곤(聖棍) 담자기(譚紫麒)를 말함이었다. 묵철(墨鐵)로 만든 곤(棍)을 독문병기로 사용하는 그는 동정오우 중 세간에 가장 덜 알려진 인물이었다. 있는 듯 없는 듯한 그의 행동은 다른 친구들이 위명을 쟁쟁하게 날리고 있는 것에 비해 그의 존재조차 미미하게 만들었다. 명리에 연연하지 않고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는 그의 담백한 성품이 그리 만든 것 같았다.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양 방안을 휘휘 둘러보다가 그것도 싫증이 났는지 창가에서 밖을 바라보던 설중행은 회운사태와 성곤이란 명호가 나오자 쓴웃음을 흘렸다. 적어도 자신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이곳에 와 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들은 자신을 알아볼지 모른다. 회운사태에 대한 기억은 이미 희미해져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없었다. 얼굴마저도 뚜렷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허나 어떠한 연유인 모르지만 회운사태를 문득 떠올리게 되면 그녀에 대한 기억은 오직 두 가지였다.

자신을 애처롭게 바라보던 눈길… 그리고 푸근하지만 안타까운 듯 보이던 미소.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벌써 십오륙 년이나 되어가지만 그의 뇌리에는 아직까지 회운사태의 눈길과 미소가 남아있었다.

또한 성곤 담자기 역시 마찬가지. 혈혈단신 운중보에 들어온 자신에게 유일하게 편안하고 푸근하게 대해주었던 어르신이었다. 아마 성곤어르신이 철담처럼 운중보에 머무시는 분이라면 설중행은 운중보를 쫓겨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쯤 손님을 맞아들이는 보주의 제자 중 한 명이나 성곤어르신의 직전제자라도 되어 있었을지도 몰랐다.

운중보를 나서게 되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넌지시 부탁까지 했던 어른이었다. 하지만 운중보를 쫓겨난 그는 성곤어른을 찾지 않았다.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했지만 운중보와 관련된 모든 인물들이 싫었다. 아무리 자신의 부친이 부탁을 했다고는 하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운중보로 보낸 아미파마저도 싫었다.

이미 십이 년이 지난 일이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살았었는데 지우고 싶었던 그 기억들이 운중보에 들어오자 비온 뒤 땅거죽을 뚫고 솟아오르는 죽순처럼 불쑥불쑥 깨어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아픔이 가슴 속에 통증을 가져왔다.

'그래도… 나는 아무 상관이 없어…!'

그는 또 다시 초점 없는 시선으로 밖을 보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이미 쫓겨났던 운중보였고, 자신의 의지로 다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자신과는 관계가 없었다. 오직 관심이 있다면 운 좋게 이곳에 들어온 서교민 그 개 같은 작자를 은밀하게 만나 족치는 일이었다.

설중행의 복잡한 심사와는 상관없이 풍철한은 함곡과 좌등의 대화를 들으면서 철담의 시신 가까이 다가갔다. 편안하게 앉아 있었고, 다른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약간 기운 상체 아래로 그의 오른손에는 그의 독문병기인 철담이 쥐어져 있었다.

'자신의 거처에서 오른 손에 독문병기를 쥐고 있었다? 위험을 느꼈단 말이군. 하지만 상대의 급작스런 공격에 손을 쓰지 못하고 당했다?'

철담 하후진 같은 인물이 상대의 공격을 느끼는 순간 당할 수도 있는 것일까? 친한 친구이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거처에 있으면서 자신의 독문병기를 오른손에 쥐고 있을 이유가 있었을까?

있다면 오직 하나 상대가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졌을 경우에 그러했을 것이다. 친한 사이이고, 믿을 수 있는 사이였지만 상대가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졌다? 이것은 사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었다.

'도대체 이 무기는 상대의 빠른 공격에 쓸모가 있을지 모르겠군.'

그는 힐끗 좌등을 바라보다가 하후진의 오른 손에 잡힌 철담이란 무기를 잡았다. 마치 한자 반 정도의 봉이 세 개 겹쳐있는 모습이었는데 그것은 시신의 손아귀에 꽉 쥐여져 있었다. 하지만 풍철한은 도대체가 눈치니, 예의니 하는 것을 모르는 인간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에서 철담이란 무기를 빼내들었다. 좌등의 얼굴에 불쾌감이 스쳤다.

"조심하시오!"

좌등이 불쾌한 기분을 최대한 억누르며 급히 경고했다.

차차---착--!

헌데 좌등의 말이 끝나기 전이었다. 세 개의 봉을 잡아들고 펼쳐놓는 순간 세 개의 봉은 마치 살아있는 듯 기쾌한 소리와 함께 하나의 창과 같은 무기로 변해버렸다. 동시에 어느새 나타났는지 한자 길이의 새하얀 날이 전면을 향하고 있었다.

"어…?"

그는 당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따끔한 느낌이 든 턱밑을 문질렀다. 손에 피가 묻어 나오고 있었다. 세 개가 합치되면서 날 쪽이 자신의 턱밑을 스친 모양이었다. 자칫했으면 졸지에 목이라도 날아갈 만큼 예리한 병기였다. 풍철한은 호기심이 생긴 듯 자신의 손에 들린 철담을 세세하게 살폈다.

'그렇군… 봉과 봉 사이에 교룡삭(蛟龍索) 같은 것으로 연결해 놓았고, 연결 부위는 자철(磁铁:자석)을 박아 놓아 연결이 순식간에 되도록 했군.'

그는 다시 철담을 세 조각으로 분리하였다. 기이하게도 분리가 되자 한자 길이의 날은 다시 봉속으로 들어가 그 형체를 감추었다. 그는 손잡이가 있는 봉을 쥐고 앞으로 펼쳐냈다. 그러자 그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하나의 형체를 만들어냈고, 날카로운 빛을 뿜고 있었다.

"기가 막히는군. 신속히 대응 할 수 없는 병기란 생각은 취소해야겠어."

그는 신기한 듯 철담을 쥐고 허공을 한두 번 휘둘러보았다. 끝에 달린 줄을 손잡이에 당겨 잡고 보니 완벽하게 결합되어 아무리 휘둘러도 세 조각으로 분리되지 않았다. 정말 신기한 병기였다. 그는 천천히 철담을 세 조각으로 분리했다. 그리고는 본래 하후진의 오른 손에 끼우고 있었다.

"철한…! 자네 그게 무슨 말인가?"

머리 속에서 혼자 생각했던 것을 취소한다고 말했으니 다른 사람들은 의아심이 들만도 하였다. 지금껏 눈빛만 주고받을 뿐 서로 대화하기를 꺼려했던 함곡이 묻자 풍철한이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함곡을 재수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한 배에 탄 것이다. 오일이란 시간 속에서 두 사람이 어찌되었던 이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철담께서 이 병기를 너무 꽉 쥐고 있었단 말이야. 그것은 곧 바로 출수하기 위함이었을 거야. 헌데 나는 세 조각으로 분리된 이 병기를 가지고 상대의 느닷없는 공격에 어찌 맞설 수 있을까 생각했지. 혹시 병기 때문에 기습에 당한 것이 아닐까 말일세."

"결국 아니었군."

"흉수는 철담 어른이 대응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출수를 했다는 결론이지. 철담 어른과 같은 최고수가 손에 쥐고 있는 병기를 펼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야. 아니면..."

풍철한이 말끝을 흐리자 함곡이 빠르게 움직이더니 서탁 위에 놓인 잔을 살폈다. 이미 찻잔은 말라붙어 있었다. 그는 재차 자기(瓷器)로 만들어진 차 주자(注子:주전자)의 뚜껑을 열었다. 아직 바닥에 찻물이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오래되어서인지 변색되어 있었고, 그리 좋은 냄새가 나지 않았다.

"산공독(散功毒)이나 군자산(君子酸)과 같은 것을 복용했다면 반응이 늦어졌겠지."

그래서 살펴 본 모양이었다. 함곡은 옆에 있는 화선지로 차 주자를 꼼꼼하게 싸기 시작했다. 그 행동을 지켜 본 풍철한이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눈치 하나는 정말 빠른 놈이야. 재수 없는 놈….'

그는 고개를 돌려 좌등을 보면서 물었다.

"중의(仲醫) 어른께서는 아직 오시지 않으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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