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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갑갑해서 나왔지."
"네."
그는 섬진강변에 가면 쉴 곳이 있다면서 가보라고 했다. 그가 안내해준 곳은 얼마 전 이곳을 배경으로 찍은 드라마 세트장이었다.
초가로 이은 집이 기역자 모양으로 되어 있고 뒤편에는 대숲이 있었는데 대나무가 지붕을 뚫고 올라와 있어 이 집이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집 앞에는 섬진강이 예나 지금이나 흘러가고 있었고 버드나무 아래 평상 위에는 관광객이 남긴 소주병과 과자 봉지가 굴러다녔다.
조카와 나는 잠시 쉬어 가기로 하고 배낭을 내려놓았다. 배낭을 내려놓고 있을 때 좀 전에 만났던 노인이 그 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노인은 우리가 앉아 있던 마루에 앙상한 엉덩이 한 쪽을 걸치더니 이내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 노인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렇다.
그는 올해 나이 80살로 이곳에서 태어나서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그는 17살 먹던 나이에 강제징용으로 일본의 한 광산에서 일했고 해방이 되어서야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왔다. 해방된 지리산에는 빨치산이 누비고 있었다. 그는 빨치산이 젊은 사람은 모두 죽인다는 부모님의 말을 듣고 마산과 부산을 전전하며 타향살이를 했다.
그의 타향살이를 끝내고 돌아와 결혼을 했는데 신혼생활 3개월만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징집명령이 떨어졌다. 그래서 그는 가족을 남겨두고 다시 생사를 넘나드는 군인이 되었다. 그는 결국 7사단에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전선을 지켰다.
"매일 아침 이 밥이 마지막이다, 이밥이 마지막이다, 했는데 결국은 살아남았어."
그는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고향에 돌아와 평생을 농부로 살았지만 지리산 산촌에서의 농사 또한 힘겹긴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결국,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초가집을 개량한 집 한 채가 전부다. 그는 자신이 상이용사도 아니어서 한 달에 정부에서 주는 7만원으로 생활한다며 상이용사가 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노인의 눈가에는 시나브로 눈물이 맺혀 있었는데 어느 부분에서 눈물을 흘렸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크던 때는 초등학교 졸업하면 면서기가 되고, 중학교 나오면 군수와 서장이 되고 고등학교 나오면 도지사가 되던 시대였지."
노인은 자신의 인생이 징용과 도피, 군대, 농촌살림으로 이어지는 힘겨운 삶이 된 이유가 교육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교육을 받지 못한 자신의 처지에는 돈이 있었을 것이다.
"징집을 받던 징용이 나와도 돈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람을 사든지 어떻게든 빼돌렸으니까…. 우리처럼 돈 없고 힘없는 사람만 그렇게 살았던 거지, 내가 못 배운 것이 한이 되어서 숟가락이라도 팔아서 아이들 학교에 보내려고 했어."
노인과의 대화는 여기서 끝났다. 나는 조카의 눈치를 살폈다. ‘조카는 이 노인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돈이 없어 교육이라는 권력으로 가는 마지막 차표조차 구하지 못해 이렇게 살았다는 것을 조금은 이해했을까?’하고 조카를 찾아봤지만 조카는 이곳에 나룻배가 있었다는 노인의 말을 듣고는 강가로 내려가 나룻배를 찾는 데 여념이 없었다.
"삼촌, 나룻배가 없는데."
조카는 나룻배가 없다는 것이 실망이었는지 나룻배를 찾고 싶어 했다. 그것을 찾아서 무엇에 쓰려는 것일까?
노인은 우리에게 자신의 인생의 힘겨움을 모두 이야기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노인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기에는 우리는 지금 너무 바쁘다. 우리는 오늘 악양을 지나 회남재를 넘어야 하고 오늘 저녁 텐트를 치고 자야 할 곳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노인의 말을 어디쯤에서 중단시켜야 할지 몰랐다. 어느 새 눈물까지 흘리고 있는 노인에게 “저 이만.. 가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담배 한 가치를 꺼내 피워 물고는 물끄러미 섬진강을 바라보며 이미 늙어버린 어깨에 힘을 주었다. 아마 오래 전 젊었을 때 강에서 수영하던 젊은 날의 강한 어깨를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은 걷기도 불편하지만 한 때 그에게도 힘이 넘치던 날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조카의 나이에 그는 징용에 끌려갔다. MP3가 없어서 힘들어하는 조카와 징용의 끌려가 고생했던 할아버지의 17살은 그 힘겨움의 차이가 너무 커서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할아버지가 담배를 피며 회상하는 지금이 내가 떠나야 하는 때라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 이야기 잘 들었어요, 그만 가보겠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더운데 너무 힘들게 고생하지 말고 천천히 가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이제까지 그의 힘겨운 인생이야기를 들어서 그런지 그의 힘들게 고생하지 말라는 말이 조금은 현실성이 없다고 느껴졌다. 다시 도로에 돌아온 우리를 반기는 것은 더욱 뜨거워진 아스팔트였다.
"삼촌, 저 할아버지 너무 힘들게 사셨다. 그치?"
"그래 우리 현대사가 그대로 담긴 인생이구나."
섬진강은 강열한 8월의 햇살에도 묵묵하게 하류로 흘러갔다. 지리산과 백운산 그리고 그 많은 지류에서 새로운 물들이 강으로 흘러 들어왔지만 강은 하나가 되어 흘러갈 뿐이었다. 그 끝이 어딘지 물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고민하지 않았다. 흘러 들어온 것은 어딘가로 다시 흘러갈 뿐이니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친환경 우리농산물 살땐 참거래농민장터(www.farmmtae.com)에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