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과 함께 갯것들이 입맛을 돋우는 계절이다. 횟집에 가면 주문한 요리보다 먼저 나오는 것들이(예를 들어 개불, 소라, 성게 등) 더 입맛을 당긴다. 얼마 전까지 동해에선 오징어가 그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오징어는 더 이상 조연을 거부하고 있다.
최근 우리 영화나 드라마에서 연기파 조연들이 주연을 능가하는 사랑을 받고 있다. 정말 바람직한 일이다. 꼭 오징어가 그 모습이다.
조연의 참 모습을 보면, 더욱 사랑스러워지고 연기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이제 동해의 오징어는 더 이상 끼어서 나오지 않는다. 당당히 '한 접시' 한다.
오징어 배들은 왜 남쪽으로 갔을까?
가을철 주문진과 거진항을 찾은 목적 중 하나는 새벽에 포구에서 벌어지는 오징어 중매를 보기 위해서였다. 만 원짜리 한두 장이면 한 가족이 먹을 만큼 오징어를 손질해 주던 기억도 있다. 그런데 포구가 조용하다. 오히려 놀래미 주낙이나 간재미 잡는 어구를 손질하는 손길만 바쁘다. 도대체 오징어잡이 배들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선생님, 서망(진도 남쪽에 있는 포구)에 오징어 배들이 많이 들어 온데요."
며칠 전 만났던 여수의 이 목사님의 전화가 생각났다. 처음에는 갑오징어겠지 생각을 했다. 그게 아니었다. 거진항에도 주문진에도 묵호항에도 그 많던 오징어 배들이 없었다. 간혹 몇 척의 배들이 오징어잡이 포구였음을 알리려는 듯 눈에 띌 뿐이다.
모두들 오징어를 따라 남쪽 바다로 내려갔던 것이다. 전라남도 진도 서망어판장에서 때 아닌 오징어 파시가 형성되었다. 멀리 주문진과 울진 죽변의 오징어잡이 배까지 흑산도 근해로 몰려들고 있다. 내동시설을 갖추지 못한 작은 배들은 흑산도까지 조업이 어려워 포구에 발이 묵이고 큰 배들만 서해로 몰려들고 있다.
오징어, 드디어 주연의 자리를 꿰차다
거진항은 내게 특별한 곳이다. 5년 전 거진항의 새벽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기 때문이다. 밤새 오징어잡이를 마치고 돌아온 배들에 토해내는 오징어로 거진항이 출렁거렸다.
당시 오징어는 20마리에 만원짜리 1장. 손질하는데 약간의 비용과 상추와 초장 등 몇 가지를 갖추는데 좀 더 지출을 하니 끝이었다. 부모님을 포함해 형제들까지 모여 열댓 명이 <가을동화>를 촬영했던 화진포에서 모처럼 휴가를 지내고 있었다.
새벽시장에서 산 오징어를 즉석에서 손질해 얼음에 담았다. 두 상자가 가득했다. 새벽부터 소주에 오징어회를 먹고, 점심에는 오징어회 비빕밥을 먹었다. 정말 질리도록 먹었다. 그리고 휴가를 마치고 가는 길에 또 그곳에서 오징어를 사서 얼음상자에 넣어 갔다.
그렇게 흔하던 오징어가 지금은 귀한 몸이 되었다. 평소 같으면 회를 주문하면 먹어보라고 서비스로 줄 법도 한데, 오징어는 수족관에서 신나게 춤을 추고 있을 뿐 나올 줄 모른다. 멍게나 고등회를 줄지언정 오징어회는 없다. 오징어회가 주빈이 되었다. 거진항 한 횟집에 들어온 손님들의 상을 둘러봤다. 오징어를 먹고 있는 사람이 없다.
죽변항에서 '귀하신 몸' 된 '오징어'를 만나다
결국 몇 번을 망설이다 저녁에 주문진항에서 오징회를 시켰다. 2마리를 손질해서 접시에 담아주고 2만원이다. 엄청 비싸다. 그렇다고 이곳까지 와서 오징어 회 맛을 놓칠 수 없지 않는가.
소주를 잔에 붓고 오징어를 한 젓가락 집어 입안에 넣었다. 초장은 생략이다. 일단 오징어 맛을 제대로 보려면 처음부터 초장을 찍어 먹으면 안 된다. 맛있다. 안 먹고 갔으면 후회할 뻔했다.
어두운 주문진항에는 간간히 고기잡이를 마치고 들어오는 배들이 불을 내뿜으며 바다를 가르며 들어온다. 포구에 정박 중인 오징어배의 등이 그 때마다 불빛에 반짝거리며 존재를 알린다. 금방 소주 한 병이 바닥이 났다. 안주가 남았으니 한 병 더.
오징어를 잡아온 배를 제대로 만난 것은 죽변항이었다. 울진의 죽변항에서 산오징어를 대형수족관을 갖춘 트럭에 옮겨 싣고 있었다. 여기서도 오징어는 귀한 몸이었다. 열 마리씩 담아서 조심스럽게 옮기고 있다. 줄지어 오징어를 받으려고 차례를 기다리는 차량에 비해 오징어잡이 배는 몇 척이 되지 않았다.
미끈한 오징어에 눈을 떼지 못하다
7번 국도를 타고 내려오다 보면 곳곳에서 오징어 말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귀한 탓인지 차를 타고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기 위한 전시용 피데기 오징어 몇 마리만 걸려 있을 뿐이다. 삼척 묵호항도 오징어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포구에는 오징어 배들이 제법 많이 정박해 있다. 그러나 오징어잡이를 하고 들어온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이곳에서는 만난 중매인은 80마리를 사서 하루 종일 팔았다며, '오징어도 안 잡히고 기름 값도 나오지 않아서 바다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 시장에서는 오징어가 3마리에 만원에 거래되었다.
그것도 사람들이 와서 구경만 할 뿐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다. 모두 제철음식을 아는 탓에 입맛을 다시며 발걸음 옮긴다.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쉬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것은 산오징어회의 참맛을 알기 때문이다.
묵호항 주차장에는 관광버스가 가득하다. 일요일의 국민유니폼 검정 등산바지에 분홍 셔츠를 입은 여자들과 쥐색 셔츠를 입은 남자 등산객들이 포구로 쏟아져 들어온다. 이들도 포구에서 오징어 회 맛을 보기 위해 찾았다.
그런데 오징어는 쳐다만 보고 장어를 비롯해 흔한 횟감에 눈을 돌린다. 벌써 한쪽에서는 손질만 전문으로 해주는 상인 옆에 앉아서 소주잔을 기울이는 관광객들도 있다.
오징어가 동해를 떠난 까닭은 수온이 낮아지는 등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오징어가 서식하는 수심 100m 지점의 적정수온은 섭씨 12∼18도. 하지만 근래 동해의 수온은 섭씨 4∼6도를 기록하고 있다.
보다 정확한 원인에 대해선 해양생물학자들이 규명해야 할 일이지만, 늘 있던 자리에 있어야할 '녀석'이 그 자리에 없으니, 아쉽기 그지없다. 있을 때는 귀한 줄 몰랐는데, 오징어가 떠난 자리가 그렇게 커 보이는 것은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