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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후계자로 낙점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터였다. 하지만 자신이 후계자가 되지 않는다 해도 그녀는 이곳을 벗어날 명문이 주어질 터였다. 그녀는 그 사내아이를 찾고 싶었다. 어떻게 변해있을지는 모르나 그녀가 손짓만 하면 달려올 것이었다.
헌데 오늘 그 사내아이가 운중보에 온 것이다. 너무나 많이 변해서 그녀조차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녀가 잊지 않은 것은 그 사내아이의 눈빛이었다. 너무나 익숙한 그 눈빛. 자신에게 쾌락을 안겨주고 스스로는 고통에 헐떡거리던, 하지만 그녀를 불쌍하게 바라보던 그 음울한 눈빛이었다.
언제나 게으른 듯, 아무런 걱정 없이 태평하게 지내던 아이에게서 절대로 볼 수 없었던 그 눈빛은 오직 그 순간에서만 나타났고, 그 눈빛을 기억하는 사람 역시 오직 자신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가 진짜 그 옛날의 그 아이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모험을 하기로 했다. 그가 그 아이가 아니라면 분명 오해받을 일이었지만 그녀는 그 아이와 은밀히 알고 있는 공간을 떠올리며 쪽지를 보냈다.
그리고 그녀의 생각대로 그 사내아이는 자신의 손짓 하나에 그녀의 나신이 퍼덕이던 그곳으로 왔고, 그녀는 그 사내아이에게 처음으로 몸을 열었다. 사내아이는, 아니 이제는 자신보다 머리통 하나 더 큰 그 사내는 십이 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자신을 원하고 있었고, 그 보다 자신이 더욱 간절하게 그를 원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 사내는 너무나 많이 변해 있었다. 과거의 그 아이가 아니었다. 가장 서운한 변화는 그가 이미 여자를 알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사내는 여자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처음에는 자신이 가르쳐 주었지만 십이 년이 지난 지금에 그 사내는 완벽하게 여자 다루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너무나 능숙하게 다루었고, 자신은 사내에게서는 처음으로 끝도 없는 쾌락을 맛보았다.
두 번이나 자신의 몸 깊숙한 곳에 씨앗을 뿌린 그 사내 앞에 그녀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완벽하게 그 사내에게 굴복했음을 알았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수많은 사내 중에 자신을 안을 수 있는 유일한 사내임을 알았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그 사내의 발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옷을 모두 입혀주고 그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 그녀는 나신으로 있다가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이미 어둠이 내린 차가운 연못에 몸을 담갔다. 방사로 인한 뜨거운 몸을 식히기에는 차가운 물이 가장 적당했다. 아직까지 몸에 남은 잔 여운을 즐기며 그녀는 한참동안이나 그렇게 있었다.
그녀는 운중보주의 다섯 명 제자 중 유일한 홍일점이자, 네 번째 제자인 궁수유(宮秀柔)였다.
27
느닷없는 일이었다. 숲을 벗어나자마자 어디선가 한 줄기 도기(刀氣)가 그의 왼쪽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너무나 급작스럽고 또한 위험을 느끼는 순간 이미 도는 그의 옆구리를 파고들었기 때문에 상대를 파악할 사이도 없이 오른쪽으로 몸을 굴렸지만, 먹이의 숨통을 문 맹수처럼 기세를 누구러뜨리지 않고 여전히 옆구리를 파고드는 도기에 그는 팔뚝을 빠르게 교차시켜 막으며 두세 바퀴를 데굴데굴 굴렀다.
치익---!
금속과 금속이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팔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파고 든 도기는 그의 양 팔뚝에 매어져 있는 소도로 가까스로 막아냈지만 도에 실린 경력에 팔뚝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사사사삭----
그는 빠르게 몸을 세우자마자 본능적으로 서너 걸음 빠르게 미끄러지듯 물러났다. 일단 상대의 공격권에서 벗어나 잠시라도 여유를 찾아야 했다. 허나 상대는 더 이상 공격해 오지 않았다.
“제법이야.....”
어둠 속에서 상대가 보였다. 의외였다. 희디 흰 백의에 하얀 피부. 백양목을 깎아놓은 듯한 반듯한 얼굴. 분명 감탄이라고 느껴져야 할 말이었음에도 억양의 변화가 없다. 도신(刀身)마저도 어둠 속에서 하얀 빛을 뿜고 있다.
‘백도 자인....!’
철담의 대제자로 언제부터인가 운중보 내의 인물들에게 막연한 두려움을 주는 인물. 어린 그에게도 왠지 그의 앞에 서면 몸이 굳어들게 만들었던 인물이다. 설중행은 저 자가 왜 자신을 기습했는지에 대한 의혹보다 우선 몸이 본능적으로 팽팽하게 긴장됨을 느꼈다.
“당신은 누구요? 무엇 때문에 나를 기습하는 것이오?”
소매가 갈라져 나풀거린다. 그 속으로 팔뚝에 매어져 있는 소도가 보인다. 허나 몸이 긴장되었음에도 그 역시 표정의 변화 없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그 역시 수없는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살기 위해서 난관을 헤쳐 온 인물이다. 경험은 어떠한 것보다 소중하다. 특히 한 순간에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무림에서 어떠한 경우에는 무공보다 더 필요한 것이 경험인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어떨지 봐야겠군.”
무슨 뜻일까? 허나 말이 끝나는 순간 이미 백도 자인의 신형이 흐릿해 지더니 주위에 하얀 섬광이 피어올랐다. 마치 용의 비늘(龍鱗)처럼 보이는 도광(刀光)은 일순간 설중행의 전신을 감돌며 쏘아들었다.
단순하게 주먹을 휘두르더라도 그 예비동작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백도 자인의 출수는 도대체 예상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갑작스럽게 쏘아오는 저 수많은 용린은 몸을 스치기만 해도 피부를 쩍쩍 갈라놓을 터였다.
“왜....?”
이런 순간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설중행은 조심스럽게,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보법(步法)을 밟으며 양 소매를 떨쳤다. 소매 속에서 희끗한 빛이 쏘아지며 줄지어 쏘아드는 용린의 도기를 끊어놓으며, 오히려 이미 모습이 보이지 않는 백도 자인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곳을 향해 달려들었다.
갑작스런 기습에 몸을 피하려고만 한다면 당한다. 그것은 기습한 자의 예상 속에 있는 행위다. 이럴 때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현명한 행동이다. 일반인들은 머리로 판단하지만 무인이라면 이미 몸으로 결정을 내린다. 본능적인 그의 움직임은 매우 쾌속했다. 용린이 주춤하는 순간 그의 양 발은 바람을 가르며 허공을 휘젓고 있었다.
쉬이익..... 파파파팍---!
한 순간에 열두 번이나 발이 엇갈려 공격해 들어갔다. 머리 위를 노리는가 싶더니 이미 허리께를 짓쳐들었다. 발의 잔영이 어둠 속에서 춤을 추는 듯 했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설중행의 발 공격은 쏘아오던 용린의 사이를 누비며 파고들고 있었다. 정말 한 순간의 반격치고는 매우 실전적이고 효과적인 공격이었다.
띠리리링----!
허나 상대는 백도 자인이었다. 갑자기 백색 도광이 변화를 일으키며 아래서부터 용권풍(龍卷風)이 일어나는 듯 했다. 거대한 백광의 회오리가 설중행의 하체부터 감싸며 엄청난 기세로 솟구치고 있었다. 상대의 옆구리와 허벅지를 강타하려던 설중행은 일시에 도광의 회오리에 말려들었다. 몸을 옥죄는 도기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한순간 삐끗하면 다리가 허벅지서부터 잘릴 판이었다. 설중행은 온 몸의 진기를 끌어올리며 몸을 옆으로 비틀려 했다.
‘어헉----!’
무슨 일인가? 진기를 구성까지 끌어올리자 가슴에 통증이 느껴지며 뒷머리에 화끈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진기의 운용이 문제가 생겼고, 혈도 어딘가가 일부 막혔다는 증거였다. 자칫 진기를 더 끌어올리면 혈도가 파열되거나 혈맥이 터질 위험이 있었다.
‘내상을 입은 적은 없었다!’
그들에게 쫓기며 외상은 입었다 해도 내상을 심하게 입은 적이 없었다. 체력이 고갈되기는 했지만 젊은 나이라 그런지 하루 반나절을 푹 쉬고 나자 체력 역시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오히려 외상의 경우에는 이상할 정도로 보통 때보다 훨씬 빠르게 아물었던 것이다. 이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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