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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2년 7월 호주 현지조사를 진행한 뒤 '카우라 수용소 보고서'를 처음으로 작성한 이용택 전 의원.
ⓒ 오마이뉴스 권우성

1992년 8월, 한 편의 보고서가 청와대 등에 전달됐다. '해외희생동포위령사업회'(위령사업회)가 작성한 <호주희생동포 진상조사보고서>. 1945년 8월 일본이 패전을 선언하기 전까지 150여명의 한국인들이 머물렀던 호주 카우라 수용소에 관한 최초의 보고서였다.

하지만 정부는 무관심했다. 보고서 내용에 대한 문의조차 없었다. 당연히 위령사업회가 보고서에 적시한 건의사항(카우라 수용소 수용 한국인 명단 입수 요청 등)도 빛을 보지 못했다. 결국 8일간 발품을 팔아 작성한 '카우라 보고서'는 그렇게 14년간 묻혀 있었다.

"일본으로부터 청구권 자금 받고 과거사는 묻혔다"

당시 호주 현지조사를 직접 진행한 이용택 전 의원(위령사업회 회장)은 지난 10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조사결과를 보고서로 작성해 대통령과 국무총리, 외무부, 보사부 등 네 군데에 보냈지만 정부로부터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도 듣지 못했다"고 정부를 향한 깊은 서운함을 드러냈다.

그는 "외국은 다 국가에서 하고 설사 민간단체에서 하더라도 예산은 국가에서 지원해준다"며 "서해교전에서 죽은 미망인이 미국 이민가는 판이니 (정부가) 60년이나 지난 그 사람들을 생각해주겠나"라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정부가 정치적인 과거사는 들추면서 치욕적인 민족사는 정리를 안하고 있다"며 "과거사를 정치에 이용하려는 정치인 등 사회지도층의 찰나주의에 수치심을 느꼈다"고 통탄했다.

또 이 전 의원은 "일본은 카우라 묘지를 공원화하고 문화관도 만드는 등 성역화했는데 우리는 거기에서 누가 죽었는지도 모른다"며 "이렇게 일본과 우리의 국민성에 차이가 있다는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지난 65년 한일 국교정상화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6억불의 청구권 자금을 받은 뒤 일본에 대한 과거사는 묻혔다"며 "이것이 일본이 바라는 바"라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 국민과 정부는 역사성이 희박하고, 과거에 대한 망각증이 심하다"며 "그 사람들이 희생된 데 책임감도 없고 무관심한 상태에 있었다"고 꼬집었다.

또 이 전 의원은 카우라 수용소 발굴의 의미와 관련 "일제 치하에서 징병·징용 당한 우리 동포들이 포로수용소에 갇힌 유일한 사건"이라며 "특히 수용소 안에서조차 한국인들은 일본인들로부터 민족적 차별을 당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충일에 기념하는 것은 6·25나 베트남전쟁 희생자들 위주로 돼 있다"며 "일본군 포로 대탈출사건 때 희생된 14명의 신원을 확인해서 유족을 찾고 그분들을 위해 위령비라도 세우는 것이 같은 동포로서 사명을 다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이 전 의원은 대구농림고와 단국대(법학과)를 졸업한 뒤 중앙정보부 국장을 거쳐 11대·12대 국회의원,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 특보 등을 지냈다. 현재 농서장학회 회장과 자유민주수호국민운동총연합 집행본부장, 파라우공화국 명예대사를 맡고 있다.

특히 그는 지난 1975년 위령사업회를 발족시킨 뒤 2차 세계대전 당시 해외에서 희생된 동포들을 찾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마샬군도와 파라오섬, 사이판, 티니안, 사할린, 마이크로네시아 등지에 9개의 위령탑을 세웠다. 티니안섬에서는 5000명의 한국인 유골을 발굴하기도 했다.

그는 92년 작성한 '카우라 보고서'를 통해 ▲카우라 수용소 수용 한국인 명단 입수 ▲일본군 포로 대탈출사건 때 희생된 한국인 명단 입수 ▲전 해외공관에 2차 세계대전 당시 희생된 한국인 현황 조사 보고토록 지시 등을 정부에 건의한 바 있다.

다음은 이용택 전 의원과의 인터뷰 전문이다.

"일본인들은 포로수용소에서도 한국인들을 차별대우했다"

▲ 해외희생동포위령사업회에서 작성한 '카우라 수용소 보고서'는 청와대와 국무총리실, 외무부, 보사부 등에 전달됐지만 빛을 보지는 못했다.
ⓒ 오마이뉴스
- 카우라 수용소 현지조사는 언제 했나?
"92년으로 기억한다. 7월 16일부터 23일까지 했다."

- 어떻게 현지조사를 하게 됐나?
"92년 <동아일보> 호주판에 난 기사를 보고 카우라 수용소에 알게 됐다. 물론 나중에 78년 10월 21일자 <동아일보>에 카우라 수용소 관련기사가 났더라. 루비황이란 재미교포가 호주에 방문했다가 카우라 일본인 전몰자 묘지에 한국인들이 묻혀 있다고 <동아일보>에 제보해서 보도됐다. 당시 해리 고든이 <붕어처럼 죽어라>라는 저서를 통해 당시 카우라 수용소 비화를 공개한 바 있다."

- 호주 현지에서는 누구 누구를 만났나?
"6·25전쟁 전우인 한례훈씨에게 호주방문 목적을 설명했더니 '나도 <동아일보> 기사 보고 알고 있다'면서 박병태 <동아일보> 호주판 편집주간을 소개해주었다. 박 주간을 통해 얘기를 듣고, 돈 깁블러(Don Kibbler A.M), 라이오넬 부어맨(Lionel Boorman), 토니 무니(Tony Mooney), 노랠(Norrall OE), 마리온 스타(Marion Starr) 등을 만나 증언을 들었다.

마리온 스타는 카우라 수용소 이야기(story)를 집필해서 상당히 많이 알고 있었다. 토니 무니는 카우라 일본공원 추진위원회 회장이다. 카우라 묘지는 전부 일본 사람 이름으로 돼 있는데 한국 사람은 없는지 알아보려고 만났다.

라이오넬 부어맨은 변호사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카우라 수용소를 관리하던 연합군 정보과 선임하사관으로 근무했다. 노랠은 한국전쟁 때 일등상사로 참전했는데 당시 수용소에서는 일본어 통역을 했다. <붕어처럼 죽어라>의 저자인 해리 고든은 만나지 못했다."

- 현지조사를 진행하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카우라 수용소를 조사하면서 느낀 점이 몇 가지 있다. 당시 일본은 한국인을 '황국식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 국민을 일본 정부 법령에 따라 징병·징용하고 군 위안부로도 끌고 갔다. 그러던 중에 일부는 연합군에 포로로 잡혔다. 한국인도 일본인도 포로수용소에서는 같은 포로인데도 일본인들은 거기에서조차 한국인들을 차별대우했다. 침을 뱉고, 린치하는 등 충돌이 많이 생겼다.

일본인은 겉 다르고 속 다르다. '황국식민'이라면서 징병·징용하고 군위안부로 끌고 갔으면서 포로가 되어서도 한국인을 차별대우를 했다는 것은 일본의 이중인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포로수용소를 관리하던 연합군이 '같은 일본인들인데 창씨개명을 해서 종족이 다르구나' 하며 한국인 보호조치를 해주었다고 한다.

일본군 포로 1000여명이 수용소 B동에서 탈출했다. 호주는 섬이다. 그래서 일본군 포로들은 '우리는 어차피 죽으니 우리가 탈출하면 총을 쏠 것 아니냐, 그걸 세계 만방에 알려 연합군을 국제적으로 망신시키자, 연합군의 사기를 죽이고 일본 국민의 전쟁결의를 높이자'는 국수주의 분위기가 있었다(일본군 포로 대탈출 사건은). 철저하게 국가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일본 포로들로부터 진술서를 받았던 사람이 얘기해주었다. 일본 군인은 전쟁에서 죽으면 영웅인데 전쟁포로는 수치다, 이렇게 수치스럽게 사느니 수용소 안에서 저항을 해서 전의를 북돋워주자는 거다. 일본 사람들의 잔악한 정신상태를 엿볼 수 있다.

당시 카우라 수용소에는 한국 사람들이 150여명 수용돼 있었다. 실제 (일본군 포로 대탈출사건으로) 죽은 사람은 13-14명인가 그렇다. 하지만 우리한테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루비황이라는 여성이 호주로 여행 갔다가 카우라 묘지에 한국 사람 이름이 있는 것 같다고 <동아일보>에 알리고 이를 <동아일보>에 보도하면서 처음 알려졌다.

(정부가) 정치적인 과거사는 들추면서 치욕적인 민족사는 정리를 안하고 있다. 과거사를 정치에 이용하려는 정치인 등 사회지도층의 찰나주의 정신에 수치심을 느꼈다."

▲ 이용택 전 의원은 92년 호주 현지조사 때 시드니에 살고 있는 라이오넬 부어맨을 만났다. 그는 카우라 수용소를 관리하던 연합군의 정보과 선임하사관이었다.
ⓒ 이용택 전 의원 제공

"우리 국민은 과거에 대한 망각증이 심하다"

- 카우라 수용소에서 근무했던 증언자들은 당시 한국인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나.
"정보과 선임하사관이었던 부어맨만이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일본군 포로들이 수용된 막사에서 자주 충돌과 싸움이 일어났다. 부어맨의 부하들이 순찰하면서 정보를 입수했는데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집단폭행한다는 것이었다.

조사를 해보니까 폭행을 당한 사람은 자신은 코리안(한국인)이라고 얘기해서 그때서야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안되겠다 싶어 격리수용했다. 당시 10명 정도 격리수용했다고 한다. 한국인은 법을 어기지 않고 양순했다고 하더라. 부어맨은 한국인들이 억울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더라고 얘기해주었다."

- 카우라 수용소는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는가.
"제가 이 사업을 31년째 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는 우리 동포들이 징병·징용 당하고, 군 위안부로 끌려가서 맞아 죽거나 했다. 하지만 카우라 수용소는 (우리 동포들이) 포로수용소에 갇힌 유일한 사건이다. 우리가 처음 발견한 사건이다. 수용소 내에서 민족적 차별을 당하고, 일본군 대탈출사건 때 14명의 한국인들이 강제로 끌려가 죽었다.

그러나 우리 정부나 국민은 전혀 모르고 있다. 망각의 사각지대였다. 우리도 일본도 독립국가다. 일본은 카우라 묘지를 공원화하고 성역화하는데, 우리는 거기에서 누가 죽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일본과 우리의 국민성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다."

- 호주 교포들로 구성된 '카우라 한국인 희생자 추모사업회' 조사 결과에 따르면, 카우라 묘지에 묻힌 한국인은 1명(이인대)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위령사업회는 26명으로 추정했다.
"일본 이름으로 창씨개명할 때 한국인들이 많이 쓰던 이름이 26명이 나왔다. 그래서 그렇게 추정했던 것이다. 또 정보과에 근무한 사람이 대탈출사건 때 14명이 죽었다고 증언했다."

- 일본은 카우라 묘지를 공원화하는 등 국가 차원에서 큰 관심을 기울여왔다.
"제가 현지조사를 갔을 때는 일본공원화를 추진하고 있었다. 그 후에 공원으로 만들고 문화관도 만들고 해서 성지화했다. 우리나라는 일본으로부터 청구권 자금이라고 해서 6억불인가 받았다. 100대 재벌 치고 그 돈 안 갖다 쓴 기업은 없다. 그 돈 받고 과거사는 묻혔다. 또 우리 외교관들은 카우라 수용소을 찾으려는 애국심은 없다. 주말이면 관광지 유람 등 놀러나 다니지."

- 호주 교민들조차도 우리 정부가 카우라 수용소에 무관심하다며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고 들었다.
"한국 사람들에게 역사성이 희박하다. 과거에 대한 망각증이 심하다. 그리고 당시 우리나라에 주권이 없어서 자주성이 없었다. 그 사람들이 희생된 데 책임감도 없고, 무관심한 상태에 있었다. 당시 행정권도 일본에서 가지고 있어 우리 정부에게 관련자료가 없다.

1972년까지만 해도 우리가 GNP 면에서 북한에 뒤졌다. 우리는 먹고 사는 데 급급해 과거사니 민족사의 비극을 치유할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그게 작용했다. 65년 한일간 국교 정상화할 때 우리 정부가 대일청구권 자금을 받고 나서 우리 정부나 국민이 일본에 대한 과거사에 대해 청구권을 행사 안 한다고 합의돼 있었다.

그러니 발굴해봐야 별 의미가 없다, 과거를 잊어비리자 그런 거다. 이것은 일본이 참 바라는 바다. 용서는 하되 잊어서는 안된다."

▲ 카우라 일본인 전몰자 묘지에 매장된 명단들. '카우라 수용소 보고서' 뒷편에 실려 있다.
ⓒ 오마이뉴스 안홍기

"정부에 조사결과 보냈지만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도 없었다"

- 현지조사 결과는 어떻게 처리했나.
"당시 조사결과를 보고서로 작성해 대통령과 국무총리, 외무부, 보사부 등 네 군데에 보냈다. 하지만 가타부타 얘기가 없었다.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도 없었다. 건의사항도 냈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 정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돈을 얼마나 투자했는지 모른다. 정부 지원금 없이 회비와 사비를 들였다. 여기에서 술이 생기나, 명예가 생기나, 돈이 생기나? 외국은 다 국가에서 하고 있다. 설사 민간단체에서 하더라도 예산은 국가에서 지원한다.

미국도 전쟁참가자들에게 10만불 준다. 국방성 산하에 별도 기구가 설치돼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부는 미국 등 국제사회에서 떠드니까 군 위안부에 신경 좀 쓰고, 사할린 동포도 일본 정부가 적십자를 통해 지원해주니까 마지못해 지원해주는 정도다. 서해교전에서 죽은 미망인이 미국 이민 가는 판이니 60년이나 지난 그 사람들을 생각해주겠나?

보고서 하나로 끝났다. 당시 경비가 더 없어 카우라 수용소 명단도 구하지 못했다. 아직도 우리 동포들이 희생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못간 곳이 많다."

- 위령사업회 언제 시작했나?
"1975년에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이판 옆에 있는 티니안(Tinean) 섬에 5000명이 매장돼 있다는 말을 듣고 찾기 시작하다가 1977년에 그 섬에서 5000명의 유골을 찾아냈다. '조선인지묘'라고 쓰여 있더라.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해외에서 희생된 동포들을 찾는 일을 시작했다."

- 무엇이 계기가 되어 사업회를 결성했나.
"1951년 12월, 당시 6·25 전쟁 중이었다. 육군장교로 임관되자마자 특수훈련을 받으러 미국에 갔다. 미국 본토에 가서 학술 공부를 하고, 괌이나 사이판 등에서 상륙작전이나 적진 투하 작전 등 실전 연습을 했다. 우리는 사이판에 주둔했다. 훈련을 받다 보니까 신발·핸드백·군화·수통·철모 등이 없는 데가 없었다. 여기는 2차대전 격전지였다.

사탕수수 옆에 말뚝이 하나 있었는데, 일본어로 '마리아나군도 사이판도'라고 씌여 있었다. 사이판에서 일본군이 다 죽었다.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1975년엔가 이우새씨(전 <서울신문> 사장)가 그쪽을 여행하다가 2차대전 때 징병·징용으로 희생된 한국인들이 방치되고 있다는 걸 알고 <서울신문>에 두세 차례에 걸쳐 보도했다. .

대구대 설립자인 이영식 목사가 그 얘기를 듣고 자기 아들에게 나를 데려오라고 했다. 내가 거기서 훈련받았다는 얘기를 아버지에게 했던 모양이다. 5000명이 죽었다고 해서 그걸 발굴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결국 1977년 시신들을 발굴했다. 우리가 가져간 용기가 모자랐다. 일부는 (한국의) 망향의 동산에 묻고, 나머지 티니안 섬에 묻고 거기에다 위령비를 세웠다."

- 어떤 성과를 거두었나?
"이후 파라오섬에서 17명, 사할린에서 1명을 찾아 망향의 동산에 모셨다. 일본 구라시키에서 한 구를 찾아 대구에 사는 유족을 찾아 유골을 인도했다. 마셜군도, 파라오, 사이판, 괌, 티니안, 중국 등지를 돌아다녔다. 사이판과 티니안, 사할린, 마이크로네시아, 마샬공화국 등에 9개의 위렵탕을 세웠다.

올해 77살이다. 해가 갈수록 기력이 떨어진다. 최근 미국에 갔다 오면서 느낀 점이 장시간 비행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파라오섬에 탑을 세우고 있다. 예전에 세웠는데 무너져서 다시 세우는 것이다. 돈 있는 기업인들이 참여해주었으면 한다. 일본의 경우 그런 데 돈 안 내는 재벌은 없다."

▲ 카우라 수용소의 존재를 처음으로 국내에 알린 <동아일보>의 기사(78년 10월 21일자).
ⓒ 오마이뉴스

"현충일 기념대상에 그런 희생동포는 빠져 있어"

- 앞으로 카우라 수용소 건은 어떻게 마무리할 생각인가?
"당시 정보과 선임하사관이었던 부어맨이 얘기한 것처럼 대탈출 사건 때 희생된 14명의 신원을 확인해서 유족을 찾고, 그분들을 위해 최소한 위령비라고 하나 세우고 위령제를 지내는 것이 같은 동포로서 사명을 다하는 길이다.

현충일에 기념하는 것은 6·25나 베트남 전쟁 희생자들 위주로 돼 있다. 또 임정에서 독립운동한 분들은 국민훈장·포장 다 주고 보훈처에서 유공자로 인정해 유족들에게도 보상금을 지급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그 대상에도 못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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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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