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때마침, 가을이 한창 무르익어 온통 감빛으로 물듭니다.
때마침, 가을이 한창 무르익어 온통 감빛으로 물듭니다. ⓒ 손현희
요즘 시골에는 가을이 한창 무르익어 빛깔 고운 감나무가 얼마나 멋스러운지 몰라요. 어제는 지난번 자전거 타기 모임에 갔을 때, 잠깐 들렀던 감나무가 남달리 많았던 낯선 마을에서 본 풍경이 참 멋스러웠던 생각이 나서 일부러 그 마을 풍경을 찍으려고 다녀왔지요. 감나무 사진을 찍으면서 참 많은 걸 생각했는데요. 무엇보다 내가 늘 우러르는 이오덕 선생님 생각이 참 많이 났어요. 오늘 내가 하는 이야기도 바로 '산처럼'에서 펴낸 <나무처럼 산처럼>이란 이 오덕 선생님이 쓰신 책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이오덕 선생님이 쓰신 여러 책을 읽어 보면, 남달리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새, 감자, 고양이, 하늘, 꽃, 돌, 감나무 이야기, 사람 이야기가 퍽 많아요. 그만큼 자연을 보는 눈빛이 퍽 남다른 분이셨어요. 선생님이 길에 나가면 늘 하늘 보고, 땅 보는 재미로 다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만큼 아무리 작고 하찮은 것이라도 흘려보지 않는 눈빛을 느낄 수 있어요.

<나무처럼 산처럼>(이오덕의 자연과 사람 이야기)[도서출판 산처럼]
<나무처럼 산처럼>(이오덕의 자연과 사람 이야기)[도서출판 산처럼] ⓒ 손현희
이 책에 나오는 여러 글 꼭지 가운데 '감나무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지구에는 산이 있어서 아름답다고 어느 시인이 말했지만, 나는 지구에는 나무가 있어서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다. 하느님이 만드신 만물 가운데 나무만큼 아름답고 착하고 성스럽기까지 한 목숨이 또 있겠는가?" <나무처럼 산처럼> 87쪽 '산처럼'

이렇게 감나무 이야기를 꺼내놓으시는데, '어느 나무 한 가지만 골라서 이야기해 보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감나무를 들겠다'고 하시면서 감나무 새잎부터 감꽃, 열매, 단풍잎, 홍시에 이르기까지 감나무를 지켜보면서 느끼는 모든 생각을 다 담으셨어요.

지난 날 어릴 적에 시골에서 살면서 먹을 것이 귀하여 산에 올라가 따먹던 참꽃(진달래꽃)과 감꽃 이야기가 먹고살기가 어렵던 그 시절에 겪었음직한 우리네 어른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또 자연의 모습을 제대로 보고, 자연의 소리를 놓치지 않고, 자연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을 퍽 기쁘게 여겼던 선생님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데, 감나무 아래서 하늘을 덮을 만큼 자란 짙푸른 감잎들을 보면서 그 잎들 속에 숨어서 짹짹거리는 아기 참새와 어미 참새의 소리를 듣는 기쁨을 찾아내기도 하지요.

이오덕 선생님은 이 감잎 빛깔 때문에 빨간빛 옷도 입고 싶다고 하셨어요.
이오덕 선생님은 이 감잎 빛깔 때문에 빨간빛 옷도 입고 싶다고 하셨어요. ⓒ 손현희
작은 잎사귀 하나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가을에 단풍든 감나무 잎을 손수 여러 장 주워서 뒷간에서도 들여다보고, 책장 위에 늘어놓고 틈나는 대로 만져보고 들여다보고, 빛깔이 바래지면 다시 새것으로 주워놓으셨대요. 한 번은 감잎에 물든 빨간 단풍이 하도 예뻐서 살아오며 한 번도 입어본 적 없는 빨간빛 옷이 입고 싶어졌다면서, 그 까닭이 바로 남들 앞에 자기를 드러나는 사람으로 보이는 게 싫어 빨간빛 옷을 입기를 싫어했던 거였다는 걸 깨달았는데, 빨간 감잎 단풍 때문에 사람의 성격마저도 바뀐다고 이야기하며 마음속에 일어난 엄청난 혁명인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도 해요.

이 책에 나오는 '홍시' 이야기도 참 재미있어요. 가을이 되어 감이 익어 홍시가 될 때쯤이면 오롱조롱 눈부신 감들이 보석처럼 박혀있는 가을 하늘을 쳐다보는 재미를 느끼며, 또 우리가 즐겨 먹는 홍시가 감나무에서 떨어지는데도 희한하게 터지지 않고 흙 하나도 묻지 않는 까닭이 따로 있다고 이야기해요. 그건 바로 감잎 때문인데요. 홍시가 떨어지기 한 달쯤 앞서 가랑잎이 많이 떨어진대요. 수북이 쌓여 푹신한 가랑잎 방석에 떨어지기 때문에 하나도 상하지 않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비밀이 숨겨져 있대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 이치를 모르고 지저분하다고 가랑잎을 싹싹 쓸어 없애기 때문에 맨바닥에 떨어져 툭툭 터져버리는 거래요. 참 재미있지요? 아무 생각 없이 보면 이렇게 놀라운 자연의 이치를 어떻게 깨닫겠어요.

마침 감나무 아래 수북이 쌓인 가랑잎 위로 홍시가 툭 떨어졌어요.
마침 감나무 아래 수북이 쌓인 가랑잎 위로 홍시가 툭 떨어졌어요. ⓒ 손현희

감나무는 홍시가 되어 떨어지기 앞서 감잎을 떨구어 푹신한 방석을 만들어 놓아요. 참 놀랍죠?
감나무는 홍시가 되어 떨어지기 앞서 감잎을 떨구어 푹신한 방석을 만들어 놓아요. 참 놀랍죠? ⓒ 손현희
이 책에서 나오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만 더 해 볼까요? 그건 바로 '사람 소리 듣고 여는 감' 이야기예요. 나는 이 꼭지를 읽으면서 다른 어떤 이야기보다 큰 깨달음을 얻었어요. 사람이 마음을 쏟고 정성을 다해 가꾸면 모든 자연이 반드시 그 보답을 하지요. 그 반대인 때에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런데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감나무는 이런 이치를 더욱 잘 말해주어요. 마을 둘레에 여기저기 감나무가 있는데 희한하게 감이 열리는 걸 본 적이 없대요.

알고 보니, 그 골짜기에 이삼십 년 앞서는 사람들이 살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는 곳이래요. 그걸 보고 깨달은 게 바로 '감도 사람 소리를 들으면서 여는구나!' 하는 거예요. 사람의 숨소리, 사람 말소리를 들어야 감이 달린다는 것이지요. 또 어느 집 임자가 바뀌면서 그 집에 감맛이 바뀐 이야기도 곁들여서 말해요. 본디 그 집에 있던 감이 영 맛이 없었대요. 그러나 새로운 집임자가 바뀐 뒤에 아주 달고 맛있는 감이 열렸대요. 이런 걸 보면, 감도 사람 소리를 들으며 열린다는 걸 알 수 있지요. 그만큼 자연도 사람이 얼마나 마음을 쏟고 정성을 다해 가꾸느냐에 따라서 그대로 보답한다는 거예요.

나도 이 글을 읽기 앞서는 이런 생각을 조금도 못했지요. 참 많은 걸 깨닫게 해주었죠. 그 뒤에 나도 이런 일을 겪었어요. 내가 사는 마을에도 감나무가 있는 집이 있었어요. 아침마다 운동을 하면서 그 집 앞을 늘 지나다녔는데 해마다 봄이면 노란 감꽃이 피고, 가을이면 빨간 홍시가 빽빽하게 열리는 걸 봤지요. 그러던 어느 봄날, 그 둘레에 큰길이 새로 나면서 이 집에 살던 사람이 집을 내놓고 보상을 받아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어요. 그 해 가을에 이상하게 그 집 감나무에 감이 열리지 않는 거예요. 감이 열리긴 했는데 몇 개 되지 않았어요. 처음엔 아무 생각 못했는데, 알고 보니 이 오덕 선생님 책에서 본 이 이야기가 생각났어요. 아하, 그렇구나! 선생님이 한 그 말이 참말이구나! 하고 깨달았지요. 이런 일을 겪은 뒤에 내가 쓴 시가 있는데, 어설프지만 소개해 봅니다.

임자 잃은 감나무

시 - 한빛/손현희

아침 운동 길에
모퉁이 돌아서면
대문 앞을 지키는
커다란 감나무 하나 있다.

여러 해 지나도록
봄이면 노란 감꽃 피고
가을엔 빨간 홍시 열어
오가는 사람들 눈을 즐겁게 했지.

올해 첫머리에
대문 앞 빈자리를
새로 난 큰 길이 가로막더니,
집임자가 딴 데로 이사를 갔나보다.

언제부터 집 둘레에
잡풀이 자라더니,
날이 갈수록 차츰차츰
집을 차지하고 말았다.

옳아!
그러고보니 지난해까지
가지가 휘도록 열리던 감이
올해는 몇 개 안 보이더라.

그랬구나!
감나무도 제 임자를 잃어버려
많이 아팠나보다.
거두어 줄 이 없으니,
저도 마음을 꾹 닫은 게지.


<나무처럼 산처럼> 이 책을 나는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읽었어요.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나무처럼 산처럼2>편도 나왔는데 그 책도 함께 읽었어요. 내가 위에 이야기한 감나무 이야기 말고도 참으로 귀하고 좋은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어요. 자연을 남달리 사랑했던 이 오덕 선생님의 삶과 작은 것도 귀하게 여기는 아름다운 마음씨가 고스란히 들어있어요. 또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이 쓴 어떤 책을 읽을 때보다 더욱 소중한 마음을 담을 수 있었던 건 나한테는 퍽 남다른 일이었어요.

이 책을 펴낸 건 이오덕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한 해 앞선 2002년 10월에 나온 책이에요. 선생님 나이가 여든이 다 되었을 때지요. 이처럼 나이 든 어르신이 쓴 책인데도, 그렇게 쉽게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거였어요. 책을 읽는 내내 마치 선생님이 내 곁에서 조곤조곤 이야기해 주시는 거 같았어요.

그건 아마 이 오덕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앞서 애쓰시고 힘을 다했던 '우리 말 살리는 운동'과 이야기가 맞닿을 거예요. 언제나 말하는 것처럼 글을 써야한다고 하셨던 선생님, 꾸미지 말고 있는 대로,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솔직하게 쓴 글이 좋은 글이라고 이야기하셨던 선생님! 바로 이런 말씀을 몸소 책에 담아 주셨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나는 오늘 많은 이야기 가운데 '감나무 이야기'만 했지만, 이 밖에도 마음이 맑아지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가 퍽 많아요. 선생님이 살면서 몸소 겪으시고 깨달은 이야기를 글로 쓰신 이 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이 땅에 낮고 하찮은 것들도 따뜻한 눈빛으로 보시고, 마음을 다하여 삶을 가꾸는 선생님의 귀한 가르침을 받아들여 자기 삶에 하나하나 채우는 사람이 많으면 참 좋겠어요. 아마 틀림없이 자연을 바라보는 눈길이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보석같이 눈부신 빛깔로 오롱조롱 매달려 있는 감이 참 예뻐요.
보석같이 눈부신 빛깔로 오롱조롱 매달려 있는 감이 참 예뻐요. ⓒ 손현희

덧붙이는 글 | <당신의 책,그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응모글입니다.
한빛이 꾸리는'우리 말' 살려쓰는 이야기가 담긴 하늘 그리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나무처럼 산처럼 - 이오덕의 자연과 사람 이야기

이오덕 지음, 산처럼(2002)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남편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오랫동안 여행을 다니다가, 이젠 자동차로 다닙니다. 시골마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정겹고 살가운 고향풍경과 문화재 나들이를 좋아하는 사람이지요. 때때로 노래와 연주활동을 하면서 행복한 삶을 노래하기도 한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