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골에는 가을이 한창 무르익어 빛깔 고운 감나무가 얼마나 멋스러운지 몰라요. 어제는 지난번 자전거 타기 모임에 갔을 때, 잠깐 들렀던 감나무가 남달리 많았던 낯선 마을에서 본 풍경이 참 멋스러웠던 생각이 나서 일부러 그 마을 풍경을 찍으려고 다녀왔지요. 감나무 사진을 찍으면서 참 많은 걸 생각했는데요. 무엇보다 내가 늘 우러르는 이오덕 선생님 생각이 참 많이 났어요. 오늘 내가 하는 이야기도 바로 '산처럼'에서 펴낸 <나무처럼 산처럼>이란 이 오덕 선생님이 쓰신 책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이오덕 선생님이 쓰신 여러 책을 읽어 보면, 남달리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새, 감자, 고양이, 하늘, 꽃, 돌, 감나무 이야기, 사람 이야기가 퍽 많아요. 그만큼 자연을 보는 눈빛이 퍽 남다른 분이셨어요. 선생님이 길에 나가면 늘 하늘 보고, 땅 보는 재미로 다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만큼 아무리 작고 하찮은 것이라도 흘려보지 않는 눈빛을 느낄 수 있어요.
이 책에 나오는 여러 글 꼭지 가운데 '감나무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지구에는 산이 있어서 아름답다고 어느 시인이 말했지만, 나는 지구에는 나무가 있어서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다. 하느님이 만드신 만물 가운데 나무만큼 아름답고 착하고 성스럽기까지 한 목숨이 또 있겠는가?" <나무처럼 산처럼> 87쪽 '산처럼'
이렇게 감나무 이야기를 꺼내놓으시는데, '어느 나무 한 가지만 골라서 이야기해 보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감나무를 들겠다'고 하시면서 감나무 새잎부터 감꽃, 열매, 단풍잎, 홍시에 이르기까지 감나무를 지켜보면서 느끼는 모든 생각을 다 담으셨어요.
지난 날 어릴 적에 시골에서 살면서 먹을 것이 귀하여 산에 올라가 따먹던 참꽃(진달래꽃)과 감꽃 이야기가 먹고살기가 어렵던 그 시절에 겪었음직한 우리네 어른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또 자연의 모습을 제대로 보고, 자연의 소리를 놓치지 않고, 자연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을 퍽 기쁘게 여겼던 선생님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데, 감나무 아래서 하늘을 덮을 만큼 자란 짙푸른 감잎들을 보면서 그 잎들 속에 숨어서 짹짹거리는 아기 참새와 어미 참새의 소리를 듣는 기쁨을 찾아내기도 하지요.
작은 잎사귀 하나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가을에 단풍든 감나무 잎을 손수 여러 장 주워서 뒷간에서도 들여다보고, 책장 위에 늘어놓고 틈나는 대로 만져보고 들여다보고, 빛깔이 바래지면 다시 새것으로 주워놓으셨대요. 한 번은 감잎에 물든 빨간 단풍이 하도 예뻐서 살아오며 한 번도 입어본 적 없는 빨간빛 옷이 입고 싶어졌다면서, 그 까닭이 바로 남들 앞에 자기를 드러나는 사람으로 보이는 게 싫어 빨간빛 옷을 입기를 싫어했던 거였다는 걸 깨달았는데, 빨간 감잎 단풍 때문에 사람의 성격마저도 바뀐다고 이야기하며 마음속에 일어난 엄청난 혁명인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도 해요.
이 책에 나오는 '홍시' 이야기도 참 재미있어요. 가을이 되어 감이 익어 홍시가 될 때쯤이면 오롱조롱 눈부신 감들이 보석처럼 박혀있는 가을 하늘을 쳐다보는 재미를 느끼며, 또 우리가 즐겨 먹는 홍시가 감나무에서 떨어지는데도 희한하게 터지지 않고 흙 하나도 묻지 않는 까닭이 따로 있다고 이야기해요. 그건 바로 감잎 때문인데요. 홍시가 떨어지기 한 달쯤 앞서 가랑잎이 많이 떨어진대요. 수북이 쌓여 푹신한 가랑잎 방석에 떨어지기 때문에 하나도 상하지 않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비밀이 숨겨져 있대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 이치를 모르고 지저분하다고 가랑잎을 싹싹 쓸어 없애기 때문에 맨바닥에 떨어져 툭툭 터져버리는 거래요. 참 재미있지요? 아무 생각 없이 보면 이렇게 놀라운 자연의 이치를 어떻게 깨닫겠어요.
이 책에서 나오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만 더 해 볼까요? 그건 바로 '사람 소리 듣고 여는 감' 이야기예요. 나는 이 꼭지를 읽으면서 다른 어떤 이야기보다 큰 깨달음을 얻었어요. 사람이 마음을 쏟고 정성을 다해 가꾸면 모든 자연이 반드시 그 보답을 하지요. 그 반대인 때에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런데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감나무는 이런 이치를 더욱 잘 말해주어요. 마을 둘레에 여기저기 감나무가 있는데 희한하게 감이 열리는 걸 본 적이 없대요.
알고 보니, 그 골짜기에 이삼십 년 앞서는 사람들이 살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는 곳이래요. 그걸 보고 깨달은 게 바로 '감도 사람 소리를 들으면서 여는구나!' 하는 거예요. 사람의 숨소리, 사람 말소리를 들어야 감이 달린다는 것이지요. 또 어느 집 임자가 바뀌면서 그 집에 감맛이 바뀐 이야기도 곁들여서 말해요. 본디 그 집에 있던 감이 영 맛이 없었대요. 그러나 새로운 집임자가 바뀐 뒤에 아주 달고 맛있는 감이 열렸대요. 이런 걸 보면, 감도 사람 소리를 들으며 열린다는 걸 알 수 있지요. 그만큼 자연도 사람이 얼마나 마음을 쏟고 정성을 다해 가꾸느냐에 따라서 그대로 보답한다는 거예요.
나도 이 글을 읽기 앞서는 이런 생각을 조금도 못했지요. 참 많은 걸 깨닫게 해주었죠. 그 뒤에 나도 이런 일을 겪었어요. 내가 사는 마을에도 감나무가 있는 집이 있었어요. 아침마다 운동을 하면서 그 집 앞을 늘 지나다녔는데 해마다 봄이면 노란 감꽃이 피고, 가을이면 빨간 홍시가 빽빽하게 열리는 걸 봤지요. 그러던 어느 봄날, 그 둘레에 큰길이 새로 나면서 이 집에 살던 사람이 집을 내놓고 보상을 받아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어요. 그 해 가을에 이상하게 그 집 감나무에 감이 열리지 않는 거예요. 감이 열리긴 했는데 몇 개 되지 않았어요. 처음엔 아무 생각 못했는데, 알고 보니 이 오덕 선생님 책에서 본 이 이야기가 생각났어요. 아하, 그렇구나! 선생님이 한 그 말이 참말이구나! 하고 깨달았지요. 이런 일을 겪은 뒤에 내가 쓴 시가 있는데, 어설프지만 소개해 봅니다.
임자 잃은 감나무
시 - 한빛/손현희
아침 운동 길에
모퉁이 돌아서면
대문 앞을 지키는
커다란 감나무 하나 있다.
여러 해 지나도록
봄이면 노란 감꽃 피고
가을엔 빨간 홍시 열어
오가는 사람들 눈을 즐겁게 했지.
올해 첫머리에
대문 앞 빈자리를
새로 난 큰 길이 가로막더니,
집임자가 딴 데로 이사를 갔나보다.
언제부터 집 둘레에
잡풀이 자라더니,
날이 갈수록 차츰차츰
집을 차지하고 말았다.
옳아!
그러고보니 지난해까지
가지가 휘도록 열리던 감이
올해는 몇 개 안 보이더라.
그랬구나!
감나무도 제 임자를 잃어버려
많이 아팠나보다.
거두어 줄 이 없으니,
저도 마음을 꾹 닫은 게지.
<나무처럼 산처럼> 이 책을 나는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읽었어요.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나무처럼 산처럼2>편도 나왔는데 그 책도 함께 읽었어요. 내가 위에 이야기한 감나무 이야기 말고도 참으로 귀하고 좋은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어요. 자연을 남달리 사랑했던 이 오덕 선생님의 삶과 작은 것도 귀하게 여기는 아름다운 마음씨가 고스란히 들어있어요. 또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이 쓴 어떤 책을 읽을 때보다 더욱 소중한 마음을 담을 수 있었던 건 나한테는 퍽 남다른 일이었어요.
이 책을 펴낸 건 이오덕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한 해 앞선 2002년 10월에 나온 책이에요. 선생님 나이가 여든이 다 되었을 때지요. 이처럼 나이 든 어르신이 쓴 책인데도, 그렇게 쉽게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거였어요. 책을 읽는 내내 마치 선생님이 내 곁에서 조곤조곤 이야기해 주시는 거 같았어요.
그건 아마 이 오덕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앞서 애쓰시고 힘을 다했던 '우리 말 살리는 운동'과 이야기가 맞닿을 거예요. 언제나 말하는 것처럼 글을 써야한다고 하셨던 선생님, 꾸미지 말고 있는 대로,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솔직하게 쓴 글이 좋은 글이라고 이야기하셨던 선생님! 바로 이런 말씀을 몸소 책에 담아 주셨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나는 오늘 많은 이야기 가운데 '감나무 이야기'만 했지만, 이 밖에도 마음이 맑아지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가 퍽 많아요. 선생님이 살면서 몸소 겪으시고 깨달은 이야기를 글로 쓰신 이 책을 많이 읽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이 땅에 낮고 하찮은 것들도 따뜻한 눈빛으로 보시고, 마음을 다하여 삶을 가꾸는 선생님의 귀한 가르침을 받아들여 자기 삶에 하나하나 채우는 사람이 많으면 참 좋겠어요. 아마 틀림없이 자연을 바라보는 눈길이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