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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표현하는 말은 지식·정보 시대부터 디지털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넓고 다양하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 이전과는 다른 특징이 있으며, 점점 변화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지금의 시대를 표현하는 많은 특성 중에는 ‘디지털 시대’도 있다. 이른바 IT혁명이라고 하는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현대인은 온라인상에서 의사소통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지금껏 사람들의 의사소통은 얼굴을 마주 보고 대화하는 면대면 소통과, 편지와 같은 간접적 소통의 방식 이 두 가지가 전부였다. 하지만 이젠 의사소통의 유형이 변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전통적인 인문학이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전통적인 인문학은 인간의 존재 자체와 인간으로 표출하는 의미, 행동체계를 학문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런 모든 현상 또는 연구의 바탕에 ‘언어’가 자리한다. 의사소통의 유형이 변화하고, 그에 맞춰 요즘의 언어 환경은 급속히 변했다. 변화하는 언어 환경과 전통적인 인문학 사이에 거리가 생겼다. 요즘 흔히 말하는 인문학의 위기는 여기에 있다.

인문학의 역사는 깊다. 이건 인문학의 속성을 가장 잘 드러낸다. 인문학은 자연과학, 응용과학처럼 최신성이 주목받는 학문이 아니다. 오랜 세월동안 차곡차곡 쌓이기 마련인 인간의 사색(철학), 믿음(종교), 언어 같은 현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해 학문의 기반으로 삼는 것이 인문학이다. 그래서 인문학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인간의 변화에 주목한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인 요즘에 이르러서는 인간의 변화 요인이 단지 시간의 흐름만이 아니란 사실을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과거엔 자신의 생각을 여러 사람에게(대중) 널리 전할 수 있는 계층이 제한적이었다. 즉, 발신자-수신자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처럼 디지털 시대에는 그것을 구분하는 경계가 모호해졌다.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불특정다수에게 전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의사소통의 혁명이라고 할 만한 변화다. 인문학의 대상과 범위가 넓어졌다고 할 수 있다.

디지털 사회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웹상에서 표현하는 방식은 자유로움과 더불어 심지어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인터넷의 익명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아마도 ‘수동적인 수신자’의 위치를 벗어난 탓일 것이다.

과거의 대중은 수신자의 역할밖에 할 수 없었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자기표현이 제한적이었으니, 대중은 그 동안 쌓아놓은 말들을 ‘언론의 자유’를 맘껏 누릴 수 있는 디지털 시대에 풀어놓는 것이다. 이젠 수신자의 역할이든 발신자의 역할이든 ‘능동적’으로 할 수 있다. 디지털 시대의 특징 중 하나인 정보의 홍수엔 이렇게 대중의 자기표현이란 물줄기도 더해졌다.

많은 사람들의 많은 생각으로 웹상엔 말·글이 넘쳐난다. 많은 말·글을 보면서 <말의 귀환>의 저자 김정란은 “자신의 말”을 하라고 말한다. <말의 귀환>의 내용은 다들 많은 말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진정 자신의 생각인지, 타인의 생각 혹은 매체·사회가 요구한 생각이 아닌지 고민해 봐야 하며 그런 다음 “자신의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끔 자기표현에서 주저함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 의문스럽다. 자신의 생각이 아닌데 마치 자신이 생각한 것인 양 말하는 사람들.

그들을 비난하고 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현상도 디지털 시대의 한 특징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그렇기에 디지털 시대에 인문학은 위기와 기회를 동시에 맞는다. 자신의 생각, 자신의 말이 어떤 것인지 알기 위해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타인의 생각을 공유해야 한다.

인간 자신에 관한 생각, 타인의 생각, 그리고 그 생각을 표현하는 언어와 표현물인 문화·예술을 다루는 것이 인문학이다. 인간을 둘러싼 사회의 여타 환경이 변하면서 인문학은 위기를 맞기도 하고, 기회를 얻기도 한다. 아이러니컬한 이 시대의 특성이다. 한 가지 희망적인 생각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인문학이 비록 위기는 맞을지라도 사라지진 않을 거란 확신이 든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대중은 표현방식에서도 이전과는 다른 방식을 택한다. 통신어, 외계어, 이모티콘 등 정체불명의 언어가 난무하고 있다. 이처럼 언어 환경의 변화는 시나브로 일어나 이젠 본말까지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인문학은 할 일이 많아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인문학의 한 분야인 언어학은 지금껏 발화된 텍스트를 그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제 언어학은 웹상에서 나타나는 변형된 언어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인문학이 사람을, 그리고 사람의 생각과 행동체계를 연구하는 학문이기에 인문학의 위기라 일컬어지는 요즘 진행해야 할 연구가 많아져야 함을 의미한다.

디지털 매체로 유포되는 담론은 기존의 견고한 체계에서 벗어났다는 전제 아래 다양한 담론이 생겨나고, 배포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담론을 생산해내는 디지털 매체는 문화적 다양성과 이해의 저변을 넓히고 있다. 디지털 매체로 전달되는 콘텐츠에는 무분별한 복제성과 저작권 훼손 등 역기능도 많지만, 점차 그 역기능을 해소하려는 움직임이 있을 것이다.

디지털 매체의 특성이라 치부하던 것을 사회적 의제로 설정해 공동의 생각이 나온다면 디지털 매체는 역기능을 줄여, 기존의 담론 체계에는 신선한 자극을 주며 발전해 나갈 것이다. 이런 일련의 변화의 과정에 인문학이 무관심할 수 없다. 그래서 디지털 시대에 맞은 인문학의 위기는 기회의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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