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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보산 모세기념교회에 세워져 있는 놋뱀 형상
느보산 모세기념교회에 세워져 있는 놋뱀 형상 ⓒ 이승철
요르단과 시리아를 여행하는 동안 이틀 밤을 묵은 요르단의 수도 암만, 그러나 암만에서는 그냥 쉬고 잠만 잤을 뿐이었다. 첫날 들어갔을 때도 깊은 밤에 들어가서 호텔에서는 바로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은 아침 일찍 곧바로 시리아로 향했다. 시리아 여행을 마치고 암만의 호텔에 돌아왔을 때도 역시 깊은 밤이었다. 하룻밤을 더 묵고 나면 다시 아침 일찍 출발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젊은 일행들 몇 명은 잠깐 시내관광을 나갔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역시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관광 일정이 빠듯하여 강행군을 했기 때문에 모두들 피로에 지친 것이다. 다음날 아침 우리 일행은 다시 호텔을 출발하여 사막 길을 달렸다. 점심은 국경을 넘어 이스라엘에서 먹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호텔을 출발한 지 40여분 만에 도착한 곳은 암만 남서쪽 32㎞ 지점에 있는 작은 고도 메드바였다.

아침 이른 시간이어서 일까, 고색창연한 도시는 아주 조용한 정적에 싸여 있었다. 옛 성벽 같은 담장에 둘러싸인 주차장에 버스를 세워 놓고 우리들이 찾은 곳은 성 조지 교회였다. 교회로 올라가는 비좁은 도로 옆에는 카펫 가게와 함께 모자이크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문을 열고 있어서 이 작은 도시가 모자이크로 유명한 도시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 메드바는 성경에도 나오는 도시로서 규모는 작지만 3500년의 아주 오래된 고도입니다."

3500년이나 된 고도라니 얼마나 오래된 도시인가. 지금의 인구는 약 4만여 명으로 작은 도시에 지나지 않지만 오랜 풍상을 겪은 고도의 흔적은 어디에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메드바 성 조지교회
메드바 성 조지교회 ⓒ 이승철
성 조지교회의 예루살렘 시가지 지도
성 조지교회의 예루살렘 시가지 지도 ⓒ 이승철
이 도시는 성경에도 여러 번 등장한다. 최초의 기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갈 때 사해 동쪽에 위치한 메드바를 점령하였다. 다윗 왕 때는 이스라엘군의 총사령관 요압이 메드바 근처에서 암몬과 아람 사람들의 연합군과 싸웠다는 기록이 있다.

중동의 역사에서도 기원전 9세기경에 모압왕 메사가 수도 디본에 세운 메사 승전비에는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던 메드바를 수복하였다고 새겨놓은 글이 남아 있다고 한다. 서기 106년 메드바는 아라비아 지방의 도시로 편입되면서 기독교 문화가 급속히 확산되어 나갔다.

로마 디오클레시안의 박해 때에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 후 서기 451년의 칼케톤 회의록에 근거하여 메드바는 보스트라의 대주교 밑에 주교를 세울 만큼 기독교가 번성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서기 614년에 있었던 페르시아의 침공에 의해 메드바의 비잔틴 도시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더구나 8세기 중반에 이 지역을 덮친 강력한 지진으로 폐허가 되어 버렸다. 사라져버렸던 도시가 다시 복구된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다.

서기 1880년대 초에 케락 지역에 사는 기독교인들과 회교도들이 종교 문제로 충돌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기독교도들은 회교도들에 의하여 추방당할 위기에 처했다. 다급해진 기독교도들은 당시의 지배자 오토만 터키 당국에 기
독교도들이 이주해서 살 수 있는 땅을 배정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성 조지교회 모자이크 지도
성 조지교회 모자이크 지도 ⓒ 이승철
느보산 모세 기념교회
느보산 모세 기념교회 ⓒ 이승철
이들의 요청에 따라 오토만 제국은 케락에서 북쪽으로 약 8㎞ 떨어진 이곳 메드바의 땅을 그들에게 살도록 해주었다. 오토만 제국은 회교도들에게 밀려 오갈 데 없는 케락의 기독교도들에게 거의 폐허로 묻혀있던 잊혀진 도시 메드바 지역을 배정해 줌으로써 이곳 메드바는 다시 기독교 도시로 복원이 된 것이다.

"이 교회가 바로 그 유명한 성 조지교회입니다. 예배당 바닥에 모자이크 지도가 그려져 있는 교회지요."

6세기경 이 메드바 지역에는 모자이크 미술이 성행하였는데 예배당바닥에 만들어 놓은 지도도 그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교회는 당시 모자이크 지도로 남아 있던 터 위에 세워진 것이다.

우리들은 그러나 그 유명한 모자이크 지도를 직접 볼 수는 없었다. 마침 예배 중이었기 때문이다. 예배 중에 우르르 몰려 들어가 방해할 수는 없었다. 대신 교회 외벽에 그려져 있는 지도와 카펫과 종이에 그려져 있는 지도를 보고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성 조지교회를 둘러보고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골목길도 고풍스러운 모습이, 이 작은 도시가 얼마나 오래된 도시인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버스를 타고 달려간 곳은 상당히 높은 산악지역이었다.

고원지대를 잠깐 달려 도착한 곳은 느보산이었다. 이 산지는 대부분 700~800미터대의 고원지대여서 산 위에 올라서자 사방의 사막지역이 발 아래로 내려다 보인다. 우리들이 버스에서 내리자 수도사 한 사람이 우리들을 안내한다. 우리들이 따라 들어간 곳은 모세기념교회 옆 마당이었다. 교회 안에서는 서양인 순례자들이 예배를 하고 있었다.

모세 기념교회 내부 모습
모세 기념교회 내부 모습 ⓒ 이승철
모세 기념교회 바닥의 모자이크 그림
모세 기념교회 바닥의 모자이크 그림 ⓒ 이승철
모세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위대한 지도자다. 성경에는 모세가 유대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지 40년 만에 이 산에 당도하여 가나안 땅을 바라본 다음 바로 이곳에서 120세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산은 세 개의 높고 커다란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장 높은 봉우리가 높이 835미터의 니바로이고, 두 번째 높은 봉우리는 높이 790미터의 무카야트,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는 높이 710미터의 시야가다.

모세가 유대백성들을 이끌고 와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았다는 비스가 봉우리는 이 산의 세 번째 봉우리인 시야가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우리들이 올라와 있는 이 봉우리인 시야가는 실제로 가나안 땅을 바라보기에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었다.

서북쪽 아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는 바라보이는 곳의 지명을 써놓은 안내 표지판이 놓여 있었다. 표지판에는 이곳에서 초기 예수 시대의 유대교 수도원 유적지인 쿰란동굴, 오아시스 도시 예리코와 요르단강, 요르단강과 예루살렘 사이의 유대사막, 그리고 예루살렘의 동부 구릉지역에 있는 올리브산 꼭대기 등을 바라볼 수 있다고 표시되어 있었지만 안개가 약간 끼어 있어서 시야가 흐렸다.

"자! 이제 모세기념교회로 들어가시죠?"

우리들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동안 예배를 마친 서양인들이 교회안에서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교회 내부는 역시 고풍스러운 모습이었다. 특별한 것으로는 바닥에 역시 모자이크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었다.

아스라한 저 사막 너머가 가나안 땅
아스라한 저 사막 너머가 가나안 땅 ⓒ 이승철
가나안 쪽의 위치 표지판
가나안 쪽의 위치 표지판 ⓒ 이승철
이곳의 유적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프란체스코 성서연구소에서 1933년부터 1976년에 걸쳐 발굴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연구소에서는 많은 건축물과 유적들을 발굴해냈다. 모세의 죽음을 기념하여 4세기경에 세운 것으로 알려진 작은 교회와 함께 세례당과 장례당 등의 부속시설을 갖춘 예배당이 발굴된 것이다.

이 예배당은 5세기에 지어진 것으로서 부속실에서는 시골 풍경과 사냥하는 모습을 그린 모자이크가 발굴되었다. 이 모자이크 그림은 기원 후 531년에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함께 발견되었다. 우리들이 보고 있는 모자이크 그림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예배당이 바로 모세의 무덤 위에 세워져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래쪽에는 모세의 무덤으로 알려진 곳이 바라보인다. 교회를 무덤 위에 세운 것이다. 교회 내부를 둘러보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럼 저 아래쪽이 가나안 땅입니까?"

그렇다고 했다. 40년이라면 짧은 세월이 아니다. 그 기나긴 세월을 수백만 명의 백성들을 이끌고 사막을 떠돌던 모세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바라만 보고 이곳에서 죽어 땅에 묻혔으니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모세는 죽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누군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다. 그도 아마 같은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엄청 억울하지 않았을까요? 그 고생을 하며 이곳까지 왔는데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죽게 되었으니…."

사막의 양떼
사막의 양떼 ⓒ 이승철
사람들의 생각은 대개가 비슷하다. 인간적으로야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르죠? 저 땅이 아무리 좋다한들 삶이라는 것은 어차피 고달픈 것 아니겠습니까? 빨리 하나님의 품에 안겼으니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 깊은 뜻을 누가 감히 헤아릴 수 있을까?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다만 인간적인 생각과 신앙적인 생각의 차이일 것이다.

"자.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지금부터 당시 모세가 들어가지 못했던 그 땅으로 우리들이 직접 들어가 보겠습니다."

우리들을 태운 버스는 고원의 산지를 내려와 바다보다도 깊은 낮은 땅을 따라 줄기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1월22일부터 2주간 북아프리카 이집트 남부 나일강 중류의 룩소르에서 중동의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까지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이 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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