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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밖에는 꽃비가 내립니다. 산벚꽃이 봄바람을 타고 하얀 눈처럼 비가 되어 대지에 내려앉습니다. 나비들이 봄 하늘을 날아다니는 듯합니다. 어린 아이의 시절로 돌아간다면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려고 산벚나무 아래를 뛰어다닐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꽃을 기다렸는데 꽃비가 내리니, 봄도 이제 저만치 거리를 두고 따라갈 수 없을 만큼의 걸음걸이로 도망치는 것만 같습니다.
지난 겨울, 봄이 오면 만나고 싶은 꽃들의 목록을 정리하면서 이번 봄에는 꼭 만나리라 했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니 일상에 치여서 이루지 못한 꿈으로 간직하고 내년을 기약해야만 하는 꽃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합니다.
얼마 전 만나고 싶은 꽃 목록에 들어 있는 꽃을 찾아 왕복 400㎞를 마다지 않고 다녀왔지만, 허탕을 치고 돌아온 이후 들꽃을 만든 신이 만나게 해주지 않으면 만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그냥 내게 주어진 시간, 가장 편안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꽃들로 만족하자 자족했습니다.
만나고 싶은 목록에는 홀아비바람꽃도 들어 있었습니다. '홀아비'가 주는 이미지와는 달리 지난해 만났던 홀아비꽃대는 너무 깔끔했는데, 올해 홀아비바람꽃을 만나고 보니 그 역시도 너무 깔끔해서 '홀아비'라는 이름 대신 다른 이름을 붙여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는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서울 하늘 가까운 곳에서는 그런 꽃을 만나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미련함, 늘 사람이란 먼 곳에 대한 동경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가까운 곳에 있는 행복들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바람꽃은 그리스말 '아네모네' 즉 '바람'에서 온 말입니다. 꽃말 중에는 '비밀스러운 사랑'이라는 것도 있는데 홀아비바람꽃에게 꼭 필요한 꽃말 같습니다.
너무 깔끔하게 생겨서 보는 순간 "새 장가들어도 되겠네?" 했더니 동행한 아내가 깔깔 웃습니다.
"왜, 결혼 이십 년이 다 되어가니까 새 장가들고 싶어서 그래?"
"아니, 그냥 홀아비로 살란다. 그게 자유스럽지 뭐."
"퍽도, 홀아비로 살겠다."
함께 있을 때 소중함을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허점이겠지요.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 그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는 따스한 손을 내밀어 주기만 해도 행복하게 느낄 사람들이 많습니다. 누군가의 따스한 손을 잡는 것이 평생소원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홀아비바람꽃이 함께 어우러져 바람이 불면 서로 부대끼며 체온을 나눕니다. 그들도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하는 것만 같습니다.
신영복 선생의 <더불어 숲>이라는 책 중에 프랑스 콩크드 광장에서 쓴 글을 읽었습니다. 그 글 중에 이런 구절이 마음을 때립니다.
'…너른 대지에 한 알의 씨앗으로 추락함으로써 역사의 긴 이랑을 푸르게 일구는 장구한 서사시로 일어서기 때문입니다.' (위의 책 p.152)
'씨앗의 추락'이라는 기막힌 단어를 찾아낸 심성, 사람의 눈으로만 보아서 그런지 단 한 번도 그것을 '추락'이라고 생각하질 못했습니다. 이틀 전 씨앗을 뿌리면서도 그것을 '추락'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습니다. 작은 씨앗들의 추락, 그로 인해 홀아비바람꽃도 바람을 타고 이곳저곳으로 자기의 영역을 넓혀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추락이 없었다면 그들은 그렇게 풍성하게 자라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추락'은 아픔입니다. 포기입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는 말도 있지만 날개 없는 것들도 추락합니다. 그러나 그 아픔 뒤에 긴 이랑을 푸르게 물들여 갈 수 있다니….
홀아비바람꽃, 그는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제주 한라산에 있는 세바람꽃을 본 이후 바람꽃 중에서 그렇게 순백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낸 바람꽃은 처음입니다. 홀아비바람꽃같이 깔끔한 총각(?)이 있으면 우리 딸 신랑으로 삼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