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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비가 와 뒷산에 고사리를 꺾으러 갔다가 막 돌아온 길이었다. 몸은 흠뻑 젖었어도 기분은 좋았다. 좋은 기분을 망쳐놓은 그놈의 전화만 아니었다면 저녁까지도 기분은 좋았을 것이다.

몸이 젖어서 목욕을 하려 하는데 전화가 울렸다. 요새 유행하는 녹음된 목소리가 나오는 전화였다. "귀하께서는 지난 오월 칠일 전주지방법원에 출석하라는 요구를 특정한 이유 없이 불이행하셨습니다. 다시 듣기는 1번 자세한 문의는 9번……."

나는 순간적으로 뒤통수를 가격당한 듯이 멍해졌다. 전화기를 든 채로 한참을 있다가 9번을 눌렀다. 상냥한 여성의 목소리가 '네에' 그런다. 그 순간에 내가 무슨 말을 했는가는 지금 기억에조차 남아 있지 않다.

법원이니 검찰이니 경찰이니 하는 곳은 그 용어만으로도 일단 주죽이 드는 세대인 나, 어리버리 어떻게 무슨 일로 출석을 요구했느냐, 출석요구서를 받은 적이 없다, 받지도 않은 출석을 어떻게 한단 말이냐 어쩌고 그런 볼멘소리가 내 입에서 나온 것 같다. 그러자 그녀는 내 주민등록번호를 묻는다. 사건내용을 알아야 하는데 주민번호가 필요하댄다. 무지무식한 나는 착실하게 번호를 불러주고, 그녀는 다시,

"확실한가요? 출석요구서를 받은 적이 없다 이거죠?"

두세 번 반복해서 확인을 한다. 그리고는 한다는 말이 "귀하께서는 지금 국제금융사기단에 연루된 것으로 나와 있거든요. 사기단의 일부를 검거했는데 귀하의 계좌번호가 나왔어요, 그런데 본인이 모르신다니 담당형사님과 통화를 해보십시오. 저희가 수사대 쪽으로 팩스를 보내면 그쪽에서 전화를 하실 겁니다."

법원으로 이미 넘어간 사건을 형사와 통화하라니? 미련 곰탱이 같은 나, 이 대목에서 수상하다는 낌새를 챘어야 하는데 전혀 그러지를 못했다. 국제금융사기 어쩌고 하는 말에 정신이 반쯤 나가버린 것이다.

어쨌든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목욕을 하기로 했다. 한참 물을 끼얹고 있는 중인데 전화가 울린다. 참 빨리도 전화가 왔다. 우리나라 공무원들의 일처리가 이렇게도 신속했던가? 그 와중에서도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지능범죄 수사대의 xxx형사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 코멘트도 수상하다. 수사관은 자신의 이름과 계급을 밝히지 형사니 뭐니 그런 말 안 쓸 것이다. 어쨌든 얼이 빠져 바보가 되어버린 나, 예, 예, 소리나 반복하고 있는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사뭇 엄청나다.

"이 사건이 지금 매우 엄중한데요. 귀하의 명의로 된 통장으로 사기를 당한 사람의 피해액이 수백억원대이고........."

어쩌고저쩌고 엄청난 말들이 형사라는 자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데 내가 금방이라도 체포돼서 한 삼십 년쯤 징역형을 받을 것만 같다. 겁에 질린 채로 아니라고, 전혀 모르는 일이라는 소리만 되풀이하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말투를 부드럽게 바꾸면서 이런다.

"아, 본인은 전혀 모르신다구요?"
"글쎄 그렇다니까요."
"그렇다면 귀하의 신상정보가 유출된 것 같습니다. 최근에 통장을 타인에게 대여한 적 있으십니까?"
"아니오."
"타인에게, 본인 명의의 통장을 개설해준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오."
"본인의 금융거래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가요?"
"글쎄요. 통장에 찍혀 나오는 것 정도밖에는."
"통장은 몇 개나 되시나요?"
"우체국과 농협에........"
"현금카드 사용하시나요?"
"네."
"통장정리를 마지막으로 한 것은 언제지요?"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허술하고 말도 안 되는 질문들, 그런 질문에 답변을 하는 나, 어쨌든 그런 상투적인 질문과 답변이 몇 차례 더 반복되고, 마침내 그는 자신의 최종 목적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귀하는 지금 국제금융사기단에 의해 피해를 입고 계신 건데요. 귀하와 같은 피해자가 현재 밝혀진 것만 오백여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귀하께서 범죄자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확실하게 아니라는 증거는 없거든요. 따라서 귀하의 모든 금융거래는 금융감독위원회의 보호관찰을 받게 됩니다."

어쩌고 그런 얘기가 한동안 이어졌는데, 이상한 전문용어 같은 것들이 많이 나왔고, 처음 듣는 단어들인 까닭에 나는 아쉽게도 그만 그 단어들을 잊어 버렸다. 어쨌든 그 형사라는 작자의 이야기인즉 내가 범죄자가 아니라는 것을 자기가 알고 있고, 그래서 금융감독위원회에 통보를 해서 나의 예금통장을 보호하는 절차를 밟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금융감독위원회의 전화가 오면 그 지시대로 따르라는 얘기였다.

뭐가 뭔지 얼떨떨한 채로 앉아 있는데 삼 분도 채 안 되어 전화가 온다. 이번에도 참 빠르다. 야아 공무원들의 일처리 참 빠르다. 나는 아마도, 어렴풋이 그런 느낌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금융감독위원회의 무슨 과장이라는 여자와의 통화, 여기서부터는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서 나도 이미 알고 있던 수법이기는 했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감을 잡지 못한 채로 그녀의 얘기를 열심히 듣고 있었고, 착실하게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핸드폰 있으시지요?"
"아니오, 저는 핸드폰 안 쓰는데요."
"옆집에서 잠시 빌릴 수는 있으시지요?"
"여긴 시골이고, 산속이라서 한참을 가야 하는데요."
"몇 분이나 걸릴까요?"
"아니 그런데 핸드폰이 꼭 있어야 하나요?"


이 질문을 나도 모르게 불쑥 던진 뒤에서야 나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아아, 내가 만일 남들처럼 핸드폰을 갖고 있었더라면, 멍청하게도 순진한 나는 아마 틀림없이 그녀의 요구대로 핸드폰과 현금카드를 들고 은행으로 달려갔을 거다.

어쨌든 그 뒤로도 나는 긴가민가한 채 그녀와 통화를 계속했다. 약간의 의구심으로, 그때부터는 그녀의 말을 듣기보다는 내가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곳이 어디라고 하셨죠?"
"금융감독위원회라니까요."
"아니, 금융위가 그렇게 작은 곳은 아니잖습니까. 부서가 어디냐고요."
"은행감독과입니다."
"그러면은요. 제가 핸드폰을 빌린 다음에 전화를 드릴 테니까 그쪽 전화번호를 말씀해 주시죠."


나의 이 한 마디, 나는 그녀의 답을 들을 수 없었다. 달칵 전화를 끊어버리는 소리가 들렸을 뿐이었다.

무섭다. 징그럽다. 첨단문명이라는 이십일세기를 사는 오늘의 현실이 무섭고 징그럽다. 소시민들의 가장 약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법률까지 들먹거리며 사기를 치고자 광분해서 날뛰는 저 개만도 못한 인간들과 함께 하는 오늘이 너무도 무섭고 징그럽다.

이제 너희들에게 묻고자 한다. 그렇게 사기를 친 돈으로 뭘 할래? 아들내미 딸내미 과외를 시킬래? 아니면 여기저기 팔도에 하나씩 애인을 둘래? 그러지 말자. 성실하게 살아도 힘들고 슬픈 것이 인간이다.

#국제금융사기단#사기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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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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