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살 먹은 내 아들은 가수 비를 좋아한다. 가끔 마룻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비의 춤을 흉내낸다.
며칠 전 TV 채널을 돌리다보니 한 케이블 방송에서 하는 비 특집이 우연히 눈에 띄었다. 아들이 좋아하는 가수라서 지켜봤는데 비가 서울 신촌에서 자랐다는 것을 이때 처음 알았다. 비가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는 D상가에서 떡 장사를 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D상가면 신촌 현대백화점 길 건너편에 있는 '다주상가'일 것이다.
"대학 다닐 때 학내 행사 준비를 위해 다주 상가에서 떡을 산 적이 있었는데 어쩌면 비의 어머니 집에서 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가 1982년생이라는 내용도 이때 처음 알았는데 "1987년 6월 항쟁 때 비는 겨우 다섯 살이었네… 정말 세월 많이 흘렀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비는 아마 아무 영문도 모른 체 최루탄 냄새에 눈물을 흘리며 "엄마 왜 이렇게 매워"라고 보챘을 것이다.
1967년생인 나의 나이는 올해 겨우 41살. 아직 한창인 것 같은데 87년과 이리저리 관련된 사건과 마주치다 보면 "벌써 세월이 이렇게 흘렀나?"라는 늙은이 같은 생각이 제일 먼저 든다.
지난해 6월 9일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이한열 추모의 밤 행사에 갔을 때 사회자가 "1987년에 태어난 아이들이 이제 07학번으로 대학 1학년이다"라고 소개하는 말에 놀랐다. 최루탄에 맞은 한열이가 세브란스 병원에서 삶을 위한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겨우 3살로 "호헌철폐 독재타도"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해맑기만 했던 그의 큰 누나의 딸, 그러니까 한열이의 조카는 이미 대학생이 됐다.
나는 한열이의 제삿날인 7월 5일이면 해마다 광주 지산동 유원지 부근에 있는 한열이의 집에 내려간다. 한열이가 죽은 뒤 태어난 그의 조카들이 생전에 본 적도 없는 삼촌 또는 큰아버지의 위패 앞에서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뭉클하다.
세살이던 어린 조카는 벌써 대학생으로 자라고
내가 한열이를 처음 만난 것은 1986년 겨울 방학을 앞 뒀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열이는 첫 만남에서 "나는 혁이라고 해"라면서 나한테 악수를 청했다. 당시 학생운동권은 본명이 아닌 예명을 많이 사용했는데 혁은 '혁명'의 준말이었을 것이다.
한열이는 1학기 때까지 당시 학내에 많았던 비공식 독서서클에서 활동했는데 겨울방학을 앞두고 내가 활동했던 공개 서클(민족주의연구회)로 옮겨오게 됐다.
1986년 겨울방학 때 한열이는 광주 집에 내려가 있었다. 나는 대전에 살던 이아무개 선배와 함께 한열이 집에 가서 하룻밤을 묵고 망월동을 참배했다.
당시만 해도 망월동 묘역은 여전히 금단의 영역이었다. 시내버스라고 해야 하루 2번 왕래가 고작인데 승객이 없다는 핑계로 운행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한열이와 나 그리고 선배는 어깨동무를 하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걸어서 망월동을 참배했다.
연세대는 봄이 되면 백양로 주변의 진달래와 개나리 꽃이 참 예쁘다. 1987년 봄이었는데 한열이가 양복을 입고 학교에 와 같은 독서서클에서 활동했던 한 여학생과 함께 백양로에서 사진을 찍었다. 당시 나와 친구들은 지나가다가 이 모습을 보고 "둘이 사귀냐?" 놀려댔다.
삭막했던 당시 학생운동권 분위기에서 한열이의 낭만적(?)인 행동은 여전히 기억에 또렷하다.
1987년 나는 만화사랑이라는 서클 회장을 맡았다. 당시 분위기상 회장은 대외적인 정치 사업 때문에 바빴고 기획부장이던 한열이가 서클 내부 살림을 열심히 챙겼다. 그는 진흥고 학생회장을 했던 경력 때문인지 리더십이 있었고 특히 후배들을 잘 다독거렸다.
그는 학생운동에 참여했지만 사고가 경직되지는 않았다. 만화사랑이라는 서클 정체성에 맞게 열심히 만화도 그렸다. 이한열 열사가 그렸던 만화라고 6월 항쟁 당시 석간이었던 <동아일보>에 소개되었던 그림이 그 한 예다.
그러나 그도 고민이 많았다. 특히 장남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던 부모님과 구속이나 제적의 위험을 무릅쓰고 민주화운동에 나서야 하는 것은 항상 선택의 문제로 다가왔다. 이 문제를 놓고 학교 앞 보은집이나 페드라에서 우리들은 밤늦게까지 소주잔을 기울였다.
"혁이 오빠가 쓰러졌어요!"
결국 운명의 날이 왔다. 1987년 6월 9일 연세대 도서관 앞에서 6·10 항쟁 출정식이 열렸다. 당시 만화사랑에서는 이 집회가 끝난 뒤 내부 토론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교내 집회에는 거의 참석했었는데 토론회 준비를 위해 학생회관 3층 휴게실에서 보고서를 작성 중이었다. 이 때문에 그날따라 집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집회가 거의 끝나갈 무렵 87학번 여자 후배가 토끼처럼 놀란 눈이 되어 나한테 뛰어왔다. "혁이 오빠가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어요!" 그 후배는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외쳤다.
나는 처음에는 큰 부상이 아닌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 전경들은 SY-44라고 불리는 최루탄을 직격탄으로 많이 쐈다. 나도 시위에 나갔다가 다리나 가슴에 맞은 적이 몇 번 있었다.
"조금 치료하면 괜찮을 거야"라며 후배를 달랬는데 그게 한열이를 마지막으로 보낸 순간이 되고 말았다. 이후 한 달 동안 나와 동료들은 한열이를 지키며 세브란스병원에서 노숙을 했다.
대통령 직선제를 뼈대로 하는 6·29 선언이 나왔고 국민이 승리했다는 환호성이 울려 퍼졌지만 결국 7월 5일 새벽 한열이는 영원히 눈을 감고 말았다. 7월 9일 연세대에서 '애국학생 고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 장'이 치러졌다.
우리 서클 동료들은 운구를 맡았다. 신촌에서 노제를 지내고 운구를 매고 서울시청 앞까지 걸어갔다. 서대문 고가도로를 지날 때 당시 치안본부(현 경찰청) 청사 옥상에는 경찰들이 빼곡히 올라서 운구 행렬을 지켜봤고 우리들은 야유를 보냈다.
운구 행렬이 서울시청 앞에 도착했을 때 광장은 군중으로 가득 찼다. 그런데 시청 국기게양대의 깃발들은 정시 게양 상태였다. 군중들은 "조기 게양"을 외쳤는데 시청 당국이 이 말을 들을 리 만무했다. 암벽 등반을 할 수 있는 누군가가 시청 벽을 타고 올라가 고쳤는지 어느 순간 국기를 조기로 만들었고 군중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한열이가 살아있다면
20년 세월이 정말 화살처럼 지나갔다. 6월 항쟁의 주역들이 정권 핵심부를 차지하게 되는 일도 발생했다. 그러나 민주화라는 형식적 틀은 완성되었으되 실질적 내용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이것이 누구의 책임인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논란이 분분하다. 그러나 결국 중요한 것은 전체 국민들의 뜻과 행동일 것이다. 영웅도 그런 국민의 뜻이 있을 때 탄생하는 법이지 어느 날 하늘에서 벼락치듯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만화사랑 회장이었던 탓에 가끔 '이한열 열사'에 대한 인터뷰 요청을 받는다. 그때마다 만약 한열이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어떻게 살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대학 졸업 뒤 노동운동에 투신해서 투사로 살고 있을까? 아니면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고 있을까?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믿음은 있다. 과묵하고 책임감 있던 그의 성격으로 볼 때 어느 자리에 있던 그가 할 수 있는 민주화의 행로를 계속 걸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