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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지. 무학대사가 주지로 있던 회암사에 태조 이성계는 궁실을 별도로 짓고 상주하다시피 했다. 권력과 밀착했던 사찰은 조선 중기 문정왕후의 총애를 받았던 보우가 주지로 있을 때까지 번창했으나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소실되어 폐사되었다. 흙속에 파묻혀 있던 회암사지는 발굴되어 오늘날 계단석과 주춧돌만 잡초에 묻혀 있다.
회암사지. 무학대사가 주지로 있던 회암사에 태조 이성계는 궁실을 별도로 짓고 상주하다시피 했다. 권력과 밀착했던 사찰은 조선 중기 문정왕후의 총애를 받았던 보우가 주지로 있을 때까지 번창했으나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소실되어 폐사되었다. 흙속에 파묻혀 있던 회암사지는 발굴되어 오늘날 계단석과 주춧돌만 잡초에 묻혀 있다. ⓒ 이정근
강제 이주민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한 태종 이방원에게 고민이 다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등극 이후 끈질기게 따라붙는 하늘의 조화(造化)였다. 오늘날의 과학으로 해석하면 기상재해이지만 그 당시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않으면 임금의 부덕이라 인식했다. 왕은 근신했으며 신하들은 자책감에 사직했다.

갑인년과 무진년의 가뭄은 살인적이었다. 서운관을 총동원하여 24시간 하늘을 관찰했지만 햇무리가 지고 달이 태미성 우액 북문으로 들어갔다는 그 당시 최첨단 천문관측 보고는 올라왔지만 비가 왜 안 오는지, 언제쯤 올 것인지에 대한 보고는 없었다. 하늘을 향하여 비를 내려 달라고 비는 수밖에 없었다.

금주령을 내리고 먹는 음식 가짓수를 줄인 임금이 종묘사직과 명산대천에 기우제를 지내고 소격전에서 초제를 지냈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하늘이 노여움을 풀어주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뙤약볕에 들판이 타들어가면 임금의 가슴은 재가 된다. 이렇게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데 승려들이 받쳐주지 못했다.

조선은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하는 유교국가다. 고려의 패망 원인을 불교에서 찾았던 정도전은 억불숭유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했다. 4대문 안의 사찰을 폐쇄하고 승려들의 도성 출입마저 금지했던 정도전이 물러나고 급변하는 정변의 와중에서 억불정책이 느슨해진 틈을 이용하여 승려들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태조 이성계가 하나 밖에 없는 말벗 무학대사를 찾아 회암사를 드나들고 신덕왕후 강씨를 위한 대장불사를 일으키기 위하여 흥천사에 드나드는 것이 사찰에는 바람막이가 되고 승려들에게는 좋은 빌미가 됐다. 그러나 이보다 승려들이 기승을 부리게 된 더 큰 이유는 강력한 제재가 없었기 때문이다.

좌정승 하륜이 발 벗고 나섰다. 불교를 손봐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 이념에 배치되는 불교가 풍속과 사회기강을 저해하는 행위는 좌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심은 태종 이방원과 하륜이 이심전심이라기보다는 하륜이 임금의 마음을 읽고 있었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금산사 주지 도징이 그 절의 종 강장과 강덕을 강간하고 와룡사 주지 설연이 그 절 종 가이를 간통했다. 이에 깜짝 놀란 조정은 부녀자들의 사찰출입을 제한했지만 부녀자들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이것을 오히려 즐기고 있었다. 사간원에서 칼을 빼어들었다.
#회암사#이방원#이성계#태강전#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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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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