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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에 한 권씩 15년을 지나는 동안 매년 기다림에 떨렸던 가슴은 아마 나나미 작가의 긴장에는 댈 수 없을 일인지도 모른다. 단순한 이야깃거리를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얽으면서 그 속에 자신의 독특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역사 이해는, 한 권 한 권을 읽을 때마다 놀람의 광장이었다. 땀의 결정체가 있다면 이 이상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 속에서 그의 책을 진열한 책장 앞에서 흐뭇한 웃음을 지어보기도 한다.

역사에 관한 기록을 흔히 정사와 야사로 나누는 분류에 의한다면, 다분히 야사에 속할 수 있는 그녀의 책이 가보지도 살아보지도 않은 로마라는 세계에 대한 간접 경험으로 이만한 책이 없다고 자신한다. 야사라는 다소 폄하스러운 단어를 쓰면서도 나의 마음속에서 이 책은 정사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학자들의 역사서 분류를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분류의 기준이 누가 썼나라는 편견에 기초하지 않고 책의 내용을 찬찬히 살펴본다면 내 생각이 나 혼자만의 독단은 아닐 것이다. 물론 가끔 보이는 '…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라는 등의 다소 과장된 표현들을 그녀의 애교로 봐주고 넘어간다면 말이다.

이 장편의 로마사가 주는 첫 느낌은 역사 속에 나타난 일들을 '인간 본성'이라는 측면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를 만드는 인간의 개성과 능력이라는 관점이 옅어지는 역사서와는 달리 나나미의 책은 인간 본성에 자리 잡은 욕망과 생존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의 살아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의 장면을 무심하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역사를 만드는 인간들의 생생한 삶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읽는 이로 하여금 그 시대의 한복판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은 문자로 표현된 매체에서 얻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이 서술하고 있는 인물들에 매력을 느껴 그들에 대한 묘사가 다소 편파적일지는 모르지만 인간의 생생한 삶을 그린 이 책에서 그녀가 그린 매력적인 인물들은 그녀의 손끝에서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왜 우리는 이런 능력과 자신의 본성을 결합해 탁월한 정치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 없는 것일까? 하는 의문은 당연한 의문이었다. 과거를 배우는 목적이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이라면 정치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이 책은 교과서나 다름없다.

이 책이 한 권씩 나올 때마다 기다림이라는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로마제국의 흥망에 대한 기다림보다는 그 속에서 살아낸 과거의 인물들이 갖고 있는 다양한 능력에 대한, 특히 난관과 역경을 이겨내는 모습에서 개인적인 삶의 여러 유형의 난관들을 이겨내는 본보기일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었다.

사적인 일과 공적인 일이 마구 뒤얽혀 개인의 능력보다는 연줄이나 출신성분이 미래를 좌우하는 우리의 모습 속에서 제국의 경영을 합리적인 이성과 현실에 대한 철저한 이해에서 출발하는 그들의 모습은 역사가 이성과 합리화의 진척이라는 철학의 이해를 뒤집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헤겔이 역사를 자유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한 사람이 자유로운 시대에서 만인이 자유로운 시대로 되어가는 과정을 곧 진보로 언명한 그의 철학은 허물스럽다.

과연 지금의 시대가 카이사르가 살았던 시대보다 더 자유스러운지는 이 책을 읽고 나면 회의가 든다. 특히나 타종교의 존재를 넉넉히 인정한 그들의 유연성 속에서 중세가 잉태된 것은 하나의 역설이지만, 지금 우리의 모습은 이 문제에서는 그들보다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것만은 분명하다. 더구나 시대적 역경과 맞물린 인간 본성에 대한 억압과 자유의 제한은 종교라는 측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름을 인정하지 못해 생긴 기회비용은 지금도 양이라는 측면에서는 줄어가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있어 소통의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더구나 신자유시대를 맞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 자유는 인간의 자유가 아닌 자본의 자유만이 무한히 확장되고 있다. 자본의 유무가 인간 자유의 한 측면이 아닌 전적인 토대로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나나미의 책에서 보이는 로마제국은 지금보다도 인간의 자유가 더 보장된 시대는 아니었는지 한다.

적어도 그들이 만든 길(가도)은 자동차를 좀 더 팔기 위해 만든 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이 책을 읽고 로마제국을 생각했더라면 그의 자본론은 인간의 본성이나 윤리가 경제적 토대에서 완결된다는 결론을 조금은 유보했을지도 모른다. 경제적인 토대가 분명 과거보다는 나아졌고, 부의 자유스러운 축적이 가능한 시대임에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줄어드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몇몇 사람들이 주장하는 보이지 않는 세력들의 음모로 우리는 자본의 노예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상상도 일어난다.

제국의 황제들이 자신이 삶의 과정에서 보여주는 의무에 대한 충실한 수행은 그럴 필요가 없는 의무임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자신이 살고 있지도 않은 곳에 수도와 가도를 놓고 공공의 시설들을 사제로 지어 기부하는 모습은 세금이나 줄여보려고 사회사업을 하는 지금의 자본가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삶의 긍지이다.

여유와 자유가 확대되어 가는 지금 우리는 이 여유를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후세의 사회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부의 사회적 기부가 개인의 명예욕에 근거한 것이 아닌 기독교라는 종교의 독점으로 전락한 것이 사회적 복지의 쇠퇴의 또 다른 원인은 아닐까?

인간 개인에게 주어야 할 심성을 종교라는 조직에 독점적으로 부여하면서 개인들에게서 뺏어간 것이 공공심을 잃어버리는 현상의 또 다른 원인은 아닌가 한다. 복지가 발달한 유럽의 나라들이 다시 개인의 능력과 역할에 눈뜨면서 과거의 복지정책들을 수정하는 현상은 복지의 사업을 국가만이 독점적으로 한다는 것은 사회적 활력이 떨어지는 요소임을 알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로마제국의 역사를 교과서에서 수박 겉핥듯이 배운 우리에게 이 책이 주는 또 하나의 생각은 인간의 만들어가는 역사가 너무 재미있다는 것이다. 만약 카이사르가 암살되지 않고 살아서 죽을 때까지 제국의 독재관으로 살았다면 그는 후에 황제가 되었을까? 하는 추측은 교과서에서 배운 바에서는 쉽게 나올 수 있는 상상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무수히 많은 상상을 책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 부분이 이 책을 '야사'로서의 자격도 갖지 못하게 하는 단점일 수도 있지만 책을 손에서 떼지 못하게 하는 주원인임도 분명하다.

시·공간상으로 너무나 동떨어진 역사에 대한 관심을 둘 수 있게 한 점은 이 책의 최대 장점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나도 모르게 우리의 고대사나 선조들에 대한 관심이 생긴다. 어쩌면 최근에 일고 있는 고대 우리 역사에 대한 방송에서의 관심은 이 책으로 유발된 일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우리의 선조는 과연 로마인들과는 어떻게 다를까?

이 책에서는 인간의 삶의 근본원리를 '유대인은 종교에서, 그리스인은 철학에서, 그리고 로마인은 법률'에서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 우리 역사에서 단 한 순간도 떨어져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본인과 중국인과 관련지어서 생각한다면 재미있는 상상이 떠오른다. 동북아의 세 나라 민족들을 그들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삶의 모습으로 더듬어 본다면 과연 이 세 민족은 어떤 것을 삶의 중요한 원리로 여기고 살았을까? 쉽게 답할 수는 없지만 필자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었다.

일본인은 역(力), 중국인은 예(禮), 그리고 한국인은 정(情). 이런 상상을 책을 읽는 가운데 끓임 없이 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이 책을 읽는 동안 많이 행복했다고 말하고 싶다.

시대가 요구한 인재를 적절하게 배출한 것이 장구한 로마의 영속을 이끌어 낸 듯이 보이면서도 저자는 곳곳에 그러한 것을 가능하게 한 제도적 뒷받침이 있다는 것에 놀라웠다. 그들이 민족을 가리지 않고 우수한 인재를 제국의 중심에서 일할 수 있게 한 교육의 방향은 요즈음 우리의 교육 현실에 대한 갖가지 처방이 실제 현장에서는 무익한 것으로 보이는 것과는 심히 대조적으로 보였다.

최근 불거지고 있는 내신에 대한 교육부와 대학 당국 간의 갈등에는 미래에 대한 관심과 학생들에 대한 관심은 추호도 없어 보인다. 일찍이 총장병 환자들이 대통령병 환자들을 나무라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대학의 현실을 약간은 알 수 있었지만 이젠 이들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한 시대를 살다가는 사람들이 후대의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은 것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살다간 흔적만은 남겨야 한다는 노래 가사는 어쩌면 그냥 한 소리일지도 모른다. 좀 더 나은 사회가 되기만을 바라는 것이 살아가는 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면 장구한 역사 속에서 한 알의 밀알은 될 것이라 믿는다. 시오노 나나미의 책에서 늘 나오지만 한 번도 이름이 거론된 적이 없는 중무장 보병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로마인 이야기 1 (1판 1쇄)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1995)


#로마인 이야기#시오노 나나미#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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