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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쟁력 강화'를 외치는 정부의 시책을 따라했지만 돌아온 건 반토막난 식량자급률과 3천만원에 육박하는 농가부채뿐이다. 한미FTA 반대집회에 소를 끌고 나온 한 농민의 모습.
ⓒ 오마이뉴스 권우성

"결국 농산품도 상품으로서 경쟁력이 없다면 앞으로 농사를 더 못 짓게 된다."
"우리 농업 GDP가 22조원 가운데 42%가 국가 재정투자이며, 농촌 지원책으로 연간 16조원을 지원하는 기반 위에서 한국농정 불신을 얘기할 수 있나."
"농업에서도 시장이 할 일은 시장에 맡기고, 정부가 바로 사업자가 되지는 않을 것."


3월 20일 농림부 업무보고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다. 이날 노 대통령은 농민들을 모아놓고 "이제 농업도 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고 일장훈시를 하며 한술 더 떠서 "언제까지 정부의 지원만 바랄 것이냐"는 훈계도 곁들였다.

농민 훈계하는 대통령, 지난 15년을 돌아보라

"시장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스스로 경쟁력을 키우는 것만이 농업과 농민이 살 길."

지난 20년 동안 정부와 보수언론은 농민들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이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해 왔다. 그렇다면 정부가 '시장'과 '경쟁력'을 강조한 농업정책을 실시한 지난 15년의 결과를 살펴보자.

지난 15년간 식량자급률은 40%대에서 20%대로 반토막이 나버렸고 국내총생산(GDP)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9% 대에서 3%대로, 농가 인구는 700만명 수준에서 300만명 수준으로 급격히 감소했다.

ⓒ 오마이뉴스 성주영
전 세계적인 추세 아니냐고? 하지만 이 같은 몰락은 같은 기간 동일한 세계화의 물결에 휩싸인 다른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초고속 붕괴 현상이다. 2005년 한국을 방문한 미국의 한 농민단체 대표도 "농민에 대한 국가의 테러"라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시장'과 '경쟁력'을 최우선으로 삼으며 생산규모를 대형화해 생산비용을 절감, "가격 경쟁력을 갖추는 것만이 이 나라 농업의 살 길"이라고 주장하며 실시한 소위 농어촌구조개선대책(1991년). 막대한 재원을 투입해 소수의 전업농에게 농지와 시설을 몰아주어 생산규모를 확대했고, 대형 농기계를 대량으로 공급했다. 유리온실과 같은 대규모 시설농업을 장려했고 대규모 토목사업으로 생산기반 정비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지난 15년 동안 규모화를 통한 가격경쟁력 제고를 위한 올인한 결과, 과연 장밋빛 꿈이 실현됐을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농가의 평균 생산규모는 1990년 1.19㏊에서 2005년 1.43㏊ 수준으로 미미하게 증가하는 데 그쳤다. 여전히 전체 농가의 62%가 1ha 미만의 경지를 갖고 있으며, 정부가 그렇게도 강조하는 경지면적 6㏊ 이상의 농가는 전체의 3.9%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정도로 평균 100ha의 경지를 가진 미국 농민과 비교해 가격이나 비용 측면에서 경쟁력을 가지는 게 가능할까? 여전히 예나 지금이나 한국 농업의 가격 혹은 비용 측면의 경쟁력은 제자리걸음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정부 기관은 배부르고, 농민들은 빚만 늘었다

그렇다면 정부의 정책을 충실히 따라 규모화 노선을 시행했던, 그러나 종국에는 가격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 그 많은 농민들은 어떻게 됐을까? 헤어날 수 없는 부채더미만을 짊어지게 됐다.

대형 유리 온실들은 대부분 폐업하거나 버려진 채 흉물로 변한 지 오래고, 농기계는 과잉공급으로 '폐농기계 처리'라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정부가 국책사업으로 시행했던 대규모 건축사업이나 토목사업은 해당 정부 (산하) 기관이나 업체의 배만 불렸을 뿐이다.

ⓒ 오마이뉴스 성주영
규모 확대를 위해 농지를 사고 시설을 확충하는 데 쓰기 위해 농협 등 은행에서 빌린 돈은 고스란히 부채가 되어 돌아왔다. 농가의 평균 부채는 1990년대 초반의 800만원 대에서 최근에는 3000만원에 육박할 정도로 크게 늘어났다.

특히 1억원 이상의 악성 고액부채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기까지 했다. 농가 부채 때문에 자살하는 농민은 과거의 역사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사실 이러한 재앙에 가까운 결과는 처음부터 예상됐다. 많은 전문가들과 농민단체들은 규모화를 통한 가격과 비용의 경쟁력 제고가 가져올 파괴적인 결과에 대해 처음부터 근본적인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했다. 하지만 시장과 경쟁력을 신봉하는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밀어붙였다.

여전히 그들은 시장과 경쟁력을 농업에 들이대고 있다. 자신들의 명백한 정책 실패를 인정하기는커녕 6㏊ 수준의 전업농 7만 농가를 집중적으로 육성해 경쟁력을 키운다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생산규모를 아무리 키운다고 해도, 설사 6㏊의 전업농이 7만명이 된다고 해도 경지 면적이 100ha 수준인 미국 농민과 경쟁할 수 있을까? 미국 농민과 경쟁할 수 있는 수준으로 규모화한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좁은 경지면적 때문에 애초부터 실현 불가능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설사 규모화해 부분적으로 비용을 줄인다고 해도 생산비용의 약 40~50%를 차지하는 토지 용역비 때문에 대략 4~6배의 가격 차이를 보이는 미국이나 중국의 농산물과 경쟁하기란 쉽지 않다.

부자만 유기농 먹는 '먹을거리' 양극화 올 수도

이러한 규모화가 잘 먹혀들지 않자 1990년대 말부터 새로운 교리가 탄생하는데, 바로 최근에 유행하는 소위 '품질경쟁력'이다. 시장 소비자들의 트렌드에 맞추기 위해 친환경농산물, 기능성 식품원료, 고품질 브랜드 농산물 등을 생산하여 경쟁력을 갖추자는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시장'으로부터 제공된 것이다.

그런데 시장지배체제에서 친환경농산물, 기능성 식품원료, 고품질 브랜드 농산물 등은 소위 '틈새시장'에서만 생존할 수 있는 제한적인 역할에 불과하다. 세계적으로도 유기농산물 생산비율이 5%를 넘는 국가는 극소수이며,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 OECD 국가들은 1~4%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한국의 친환경농산물 시장은 향후 아무리 크게 성장하더라도 전체 농산물의 10%를 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친환경농산물 유통에서 가장 큰 비중한 차지하는 생협 조직들은 이미 친환경농산물의 공급이 수요를 초과해, 상당한 재고 부담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 한미FTA로 우리 농업은 더욱 쇠락할 것이다. 농촌에 희망이 없는 시대, 우리는 무얼 먹고 살 것인가.
ⓒ 강기희
결국 틈새시장을 노리는 품질경쟁력에 '올인'한다고 해도 그 결과는 규모화 노선이 가져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친환경농산물·기능성 식품원료·고품질 브랜드 농산물은 상대적으로 수입농산물이나 일반 농산물에 비해 가격이 높다. 자칫하면 소득 수준 상위 10~20%에 해당하는 부유층에 소비가 집중되고, 대다수 서민들은 중저가 농산물을 소비하는, 먹을거리의 양극화가 발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규모화를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친환경농산물처럼 농산물의 품질을 강조하는 것은 활용하기에 따라 우리 농업을 살리는 대안이 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시장'이라는 우상을 깨야 한다.

유기농으로 대안 만드려면 '시장'부터 깨라

시장지배체제에서 친환경농업은 틈새시장으로밖에 기능할 수 없다. 그런 친환경농업이 시장의 지배에서 벗어나 공공의 영역으로 들어온다면 농업과 농촌 그리고 농민이 살아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할 수 있다.

시장의 지배력이 미치지 않는 공공영역은 국민 일반의 동의를 바탕으로 국가가 직접 지원하고 발전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농업이 갖는 식량주권과 다원적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는 것은 물론이고 먹을거리의 양극화 같은 문제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남미의 쿠바를 보라. 사회경제적인 배경이나 자연환경이 다르기는 하지만 쿠바는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친환경농업이 공공영역에서 기능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유기농업의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가 됐다. 또 식량안보를 헌법에 명시하고 농업을 공공영역으로 인정, 국가의 지원을 의무화하면서 농업의 발전을 이루고 있는 베네수엘라의 최근 상황도 눈여겨봐야 한다.

결국 이 사례들은 우리 농업을 살리기 위해서는 '시장'의 우상을 깨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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