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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남한산성, 그 곳에서 아주 튼실한 꿩의다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그 곳에서 그를 만났을 때 거의 2m가 훌쩍 넘는 키에 꽃을 피우고 있었으니 자잘자잘 피어있는 털중나리와 뱀무에 정신을 팔려 그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무성한 풀섶에 묻혀 보이지 않는 꽃은 없을까 싶어 뜨거운 열기가 올라오는 풀섶을 천천히 바라보면서 걷던 중이었다.

등줄기에 흐르는 땀을 식히고, 딸기나무 줄기에 긁힌 다리를 쉬게 하기 위해 잠시 쉴 곳을 찾아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신갈나무 아래 꿩의다리가 폭죽처럼 화들짝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제껏 만난 꿩의다리 중에서 가장 실한 것이었다.

그가 꽃을 화들짝 피고 있는 것을 보고서야 '아, 저것이 봄에 올라온 순을 꺾어 먹던 그 나물'이란 걸 알았다. 그러니까 그냥 봄나물이 아니라 '꿩의다리나물'이었던 것이다. 먹을 것과 관련이 지어지니 달콤한 솜사탕을 보는 듯도 했다. 폭죽이든 솜사탕이든 축제 아니면 소풍과 관련이 있다. 아마 꿩의다리가 품고 있는 마음은 '축제'인지도 모르겠다.

ⓒ 김민수
나물의 맛은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그냥 살짝 데쳐서 다른 봄나물들과 함께 고추장에 버무려 먹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날로 고추장을 찍어 먹었던 것도 같은데 그것이 '꿩의다리'였다. 작아서 카메라에 담기도 쉽지 않은 산꿩의다리와 개인적으로 꿩의다리 종류 중에서는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금꿩의다리를 보면서도 봄나물과 연관시키지 못했었는데 내 키보다 훌쩍 큰 꿩의다리를 보는 순간 어릴 적 산나물을 할 적에 할머니 무덤가에서 꿩의다리를 꺾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다니.

어떤 추억들을 잊고 살아가다가도, 그 추억과 관련된 것들을 잊고 살아가다가도, 어느 하나만 만나 추억의 실타래가 풀리면 그간 잊고 지냈던 것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는 것, 그것이 추억의 힘인 것 같다. 좋은 추억이든 나쁜 추억이든 아련하다는 것도 추억의 힘인듯 하다.

ⓒ 김민수
꿩의다리 뿌리는 "마미연(馬尾連)"이라고 하는데 지사제나 눈을 밝게 해 주는 약으로 쓴다고 한다. 줄기는 꿩의다리를 닮고, 뿌리는 말의 꼬리를 닮기나 한 것일까? 미나리아재비과는 독초가 많은 편인데 꿩의다리는 어린순은 나물로, 뿌리는 지사제나 눈을 밝게 하는 데 사용이 된다니 미나리아재비과에 속하는 꿩의다리는 별종일지도 모르겠지만 사람의 처지에서는 참으로 고마운 식물이다.

뿌리가 하는 일을 조금 풀어보니 '속을 편안하게 다스려주는 일과 눈이 제대로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그것이 꿩의다리의 마음일 것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속을 뒤집어 놓는 일도 많고, 제대로 보지 못하도록 하는 것들도 많다. 이런저런 불필요한 것들에 눈을 팔다보면 탈이 나는 법이다. 지금이야 약국이나 병원에 가면 쉽게 지사제도 구하고, 안약도 구할 수 있을 것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육체적인 것에 국한된 것일 뿐이니 속내를 편안케 하고, 마음의 눈을 밝혀주는 것이야 우리 산하에 피어나는 들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런 의미만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그런 효용을 담고 있다고 하니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다.

ⓒ 김민수
꽃에 대해서 관심도 없던 사람이 몇 번 나와 산행을 하더니만 어느 날 갑자기 꽃이 보이기 시작했는지 내가 보지도 못하는 꽃들을 보면서 이름을 물어본다. 들어도 들어도 이름을 알지 못하겠다고 하더니만 꽃 이름을 기억하게 해주려고 꾸며낸 이야기들을 듣고는 좋아라 한다.

날씨가 더워 까치가 수영하러 물가에 나와서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는 것 같아 '까치수영', 꽃은 작아도 물고기 잡을 때 이 나뭇가지를 잘라 작살로 사용하면 그만이라서 '작살나무', 꿩의다리를 닮아서 '꿩의다리', 귀지를 파는 귀이개를 닮아서 '귀이개'라고 하니 이런 이름은 한 번만 들어도 잊지 않을 것 같단다.

그런데 세상에 잊지 말고 살아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데 꽃이름을 잊지 않을까? 꽃이름 척척 불러준다고 그를 더 사랑하는 것도 아닌데, 그를 바라보는 마음이 중요한 것인데 이름 좀 더 많이 안다고 더 사랑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살아가는 것이지.

꿩의다리는 폭죽 같기도 했고, 솜사탕 같기도 했다. 시원하게 죽 뻗은 가지에서 하얀 축제의 꽃을 피운 꿩의다리, 그 꽃의 마음을 닮고 싶다.
#꿩의다리#미나리아재비과#봄나물#독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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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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