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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야누스 시장
ⓒ 한길사
<로마인 이야기>를 처음 만난 건, 대학생이 되던 해였다. <삼국지>의 재미에 한창 심취해있던 터라 <로마인 이야기>에서도 비슷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1권을 펼쳤다. 하지만 금세 책을 덮었다. 여포나 조조 같은 영웅들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책을 무슨 재미로 읽나?'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로마인 이야기>의 1권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다시 <로마인 이야기>를 펼친 것은 내 관심이 '영웅'에서 '민중'으로 옮겨가던 시기였다. 1권을 본 기억에 따르면 <로마인 이야기>에는 민중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것을 확인할 겸 다시 책을 펼쳤다가 내처 읽게 됐다. 영웅에 집착하지 않게 되자 <로마인 이야기>를 통해 로마 번영의 비밀이 보였기 때문이다.

<로마인 이야기>를 다시 펼친 이유

<로마인 이야기>하면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부터 떠올리곤 한다. '팍스 로마나'라는 단어로 상징될 만큼 그들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하지만 그들은 '로마'를 발전시키는 계기를 제공했을 뿐, 만든 이들이 아니다. 그 긴 세월동안 번영할 수 있도록 만든 이유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것은 영웅의 이름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아니, 불가능할뿐더러 옳지 못하다. 그것은 '로마인'이라는 단어의 절대적인 숫자를 차지하는 민중들을 무시한 처사이기 때문이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사실이다. 로마는 아주 천천히 만들어졌다. 그런 이유에는 역시 카리스마형 군주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만 보더라도 고구려하면 '주몽', 고려하면 '왕건'이라는 지도자가 떠오르지만 로마는 달랐다.

그런 탓에 로마는 건국 초부터 주변 국가들의 침입에 온갖 수모를 당해야 했다. 민중들이 모두 언덕 위로 도망가는 일도 있었다. 주변국 그리스는 로마를 노골적으로 무시하기도 했다. '로마 제국'이라는 사실만 알고 <로마인 이야기>를 본다면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 숱하게 벌어졌다.

그럼에도 로마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로마인의 기질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아주 천천히, 동시에 튼튼하게,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일을 추진했다.

전쟁으로 집이 무너지면 튼튼하게 다시 지었고, 성벽이 무너지면 착실하게 성벽을 세웠다. 그 과정은 정말 느렸다. "빨리! 빨리!"를 외치는 우리 입장에서 보면 속이 터질 정도다. 그들은 왜 그렇게 느렸던 것일까? 로마인들은 시간과 경쟁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속도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 로마인들은 적을 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로마가 안정화에 접어든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던 것이 바로 '로마 연합'이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싸워 이긴 상대를 징벌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맹자로 만들려고 했다. 이것은 보기 드문 관계 맺기다. '21세기 십자군'이라는 단어로 알 수 있듯이 오늘날의 강대국은 적을 '악마'로 규정해 쑥대밭으로 만든다. 패배는 곧 죽음이라는 공식을 보여주고 있다.

로마인들은 달랐다.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적을 친구로 삼았다. 왜 그런 것일까? 배려심일까? 아니면 관용일까? 그 시절은 내가 이기지 못한다면 노예가 되거나 목숨을 빼앗기는 냉혹한 시대였다. 공포가 감도는 때에 로마인이 그런 여유로운 생각을 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왜 그런 것일까? 혹시 살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닐까?

로마인들은 언제나 싸움을 해야 했다. 적을 무너뜨리면 그곳에서 새로운 적이 나타났다. 전쟁이란 승자에게도 피해를 주는 것이다. 로마인 입장에서는 새로운 적을 만들 바에야 아량을 베푸는 것이 나았을 것이고 그래서 '연합'을 만들었다. 이런 생각 덕분에 로마인들은 뜻밖의 사실을 깨닫는다.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지 않는다면 예상치 못했던 '국력'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역사를 돌이켜 보건데 전쟁에게 이기면, 약탈이 '포상'의 개념으로 이루어졌다. 심할 경우 초토화되기도 했다. 누가 지나가면 풀 한포기 안 남는다는 말만 생각해도 그렇다. 가깝게는 20세기 초 아시아를 정복하던 일본이나 21세기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의 경우를 떠올려도 그렇다. 이것이 옳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건데 그것이 자연스러운 욕구라고 생각한다. 상대를 어렵게 정복했으니 '승자'의 권리를 그런 식으로 누리고 싶을 것이 뻔하다. 내가 마음대로 해도 상대가 저항하지 못하니 충분히 그럴 것이다.

그런데 로마인들은 그것을 넘어섰다. 로마인들은 전쟁 중에 자신의 재물을 잃더라도, 그것을 빌미로 상대 국가를 초토화시키지 않았다. 몇 차례에 걸쳐 배신하지 않는 이상, 동맹국가로 대우해 위기에 처하면 지원군을 보내기도 했다. 꽤나 고생스러운 일임에도 그것을 지켰다. 그것의 결과는 오래지 않아 나타난다. 로마가 위기에 처해도 로마연합이 와해되지 않고 로마를 지탱해줬기 때문이다.

천천히 나라를 세우고 또한 친구들을 만들면서 로마는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안정화에 접어든 것이다. 그러자 귀족과 평민 사이에 갈등이 생겨난다. 나라가 혼란에 빠질 정도로 그 갈등의 폭은 심각했다. 이건 어느 사회에나 있었던 일이니만큼 새로운 모습은 아니다. 새로운 것은, 한니발이 침입한 순간에 로마인들이 보여준 모습이다.

한니발을 물리칠 수 있었던 원동력은?

▲ 포로 로마노
ⓒ 한길사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허를 찌르는 방법으로 로마를 공격한다. 그러자 로마인들은 적을 상대하기 위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싸움을 멈춘다. 일치단결한 것인데 이 모습은 경이롭다. 한니발의 편에 붙을 수도 있고, 그 틈을 이용해 자기 이익을 꾀할 법도 한데 그들은 하나가 되어 한니발을 상대했다.

나는 이것이 로마인들이 한니발을 물리친 원동력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역사에서는 스키피오가 있어 로마가 한니발을 물리칠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설명이다.

스키피오가 군대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로마인들이 일치단결한 뒤에야 가능했다. 아무리 스키피오가 명장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없었다면 사정이 달라졌을 것이다. 한니발만 하더라도 그런 이유로 물어나야 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국가가 위기에 빠지면 거짓말처럼 일치단결하는 로마인들의 모습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무엇이든지 체계화하고 표준을 만들려고 했던 로마인들의 모습도 간과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얼렁뚱땅 임시방편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을 텐데, 로마인들은 도로를 건설하거나 군대를 이동할 때도 매뉴얼대로 하려고 했다. 그 정도가 너무 집요해서 소름이 끼칠 정도다. 그런 노력이 통한 것일까? 로마인들은 지도자가 바뀐다 하더라도 '혼란'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쿠데타 같은 방법으로 권력을 내준 경우가 아니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도록 전국 곳곳에서 나라의 기틀을 잡아놓은 것이다.

이런 특징을 보여준, '로마인들'이라는 단어로 시작하는 문장들은 화려하지 않다. 카이사르나 술라처럼 영웅의 이름으로 시작하는 문장에 비하면 무미건조하게 보일 정도다. 하지만 '로마'라는 이름의 영광을 만든 비밀은 바로 이 문장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바로 로마인들이라 불렸던 로마 민중의 기질과 삶에서 그것이 보이는 것이다. 이런 것이 없었다면, '팍스 로마나'라는 단어는커녕 로마라는 국가 이름도 역사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시오노 나나미의 글만 보고 그들을 저렇게 평가하는 것이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또한 후기로 접어들면서 저런 특징이 퇴색되는 것이 자주 보인다는 점이 생각을 흔들리게 만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생각을 지우고 싶지는 않다. 적을 친구로 삼으면 좋다거나 일치단결해야 위기를 타파할 수 있다는 것과 같이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못하는 것들을 로마인들은 몸소 보여줬기 때문이다.

역사의 장면 속에서 또 그런 사람들이 있었을까? 세계 지도를 펼쳐 봐도 보이지 않는다. 로마까지 거슬러 올라 가야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찌 칭찬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로마인들'로 시작하는 문장이 무미건조하지만, 무엇보다도 아름답게만 보인다.

로마인 이야기 1 (1판 1쇄)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1995)


태그:#로마인, #시오노 나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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