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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전성기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만든 청사진 위에 아우구스투스가 진행한 제정으로부터 시작했다. 시오노 나나미의 말을 빌리면 '강대해진 육체에 걸맞은 내장'을 얻은 로마는 그 거대한 제국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600명의 원로원은 이제 단지 황제에게 지지를 보내는 통과 기관이 되어버렸고 국가의 집행기관을 선출하여 국정 운영에 깊이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은 형해화되었다. 원로원 회의로 의결할 수는 있지만 이는 단지 황제의 생각을 돌려달라는 조언에 불과했다.

원로원의 가장 큰 의미는 사회와 국가에 공헌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곳이었다(이마저도 제국의 쇠퇴기에는 문과 무가 불리 되면서 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가 극찬을 한(적어도 반대하지는 않는) 국가의 통치 형태가 후세의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대부분의 국가들이 취하고 있는 국가의 정치형태는 민주주의이고 이는 로마의 제정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로마의 제정은 우리나라의 정치형태에 시사해주는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즉 민주주의를 취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로마의 제정과 비교할 때 그 부족한 면을 분명히 볼 수 있게 되고 더욱 더 민주주의답게 만들어 그 사회의 구성원을 위한 국가가 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로마의 제정과 그 한계

카이사르가 설계한 로마의 제정(帝政)화에 시오노 나나미가 찬성을 한 것은 그 사회 구성원에게 이익이 되는 국가를 만들 수만 있다면 그 정치 체제나 정부 형태는 큰 상관이 없다는 데에 있다.

로마 전 시대에 부흥을 노렸던 그리스는 중우정치에 빠져 국가의 중대한 결정을 하지 못한 채 몰락의 길을 걸어갔다. 이로 인해 그 사회 구성원은 안전을 보장받지 못했고 안전이 보장받지 못한 사회에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리 만무한 것이다. 또한 로마제국은 여러 국가를 통합했고 여러 국가를 속주로 삼고 있는 거대한 영토의 국가에게 유리한 점이 있다.

거대한 영토를 거느리고 있다는 것은 많은 전장을 가진다는 것이고 국가의 유지를 위해 많은 군대를 가질 수밖에 없다. 군사력의 특성상 통일된 지휘 체계가 없다면 제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되기에 수직적인 통치체계를 누군가에게 맡기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군사의 운영은 신속함과 집중이 필수적이기에 로마시대에서 제정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제정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고대 로마는 인본주의적 국가라고 할 수는 있지만 인간에 대해 차별적인 인식을 여전히 유지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여전히 노예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벗어날 수 있다고 하여도 계층이 존재했다.

지배층은 서민들의 권익을 위해 신경 썼다. 하지만 이는 단지 서민들의 단결된 반발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피지배자 자신이 지배자와 완전히 동일한 인간이라는 인식이 부족했다. 고대 서양의 서민들은 자신의 권익에 대한 인식은 가지고 있었고 이를 사회에 표출했지만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평등한 인간이라는 점을 지각하지 못했다. 이러한 국가에서 제정은 용인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 존재의 평등한 존엄성에서 빗겨간 입장에서는 수많은 지배층의 이해관계로 인해 분열의 조정이 필요해 발생한 공화국보다는 그 이해관계를 아우를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중앙집권적인 군주 체제가 더 발전된 형태라고 하겠다. 하지만 왜곡된 인간관에서 벗어나 적어도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존엄성을 인정하고 있는 현재 우리의 지각에서는 제정은 더 이상 찬성 받기 힘들다.

제정은 황제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기에 그 운영의 전제로써 가장 완벽한 인간으로서의 황제를 요구한다. 역사는 우리에게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집요한 지를 보여준다. 그 어떤 인물도 권력을 잡게 되면 그것을 이용하고 싶은 욕망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집중된 권력을 가진 황제는 그 권력을 남용하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측근들에게 그 이익을 나누어 주고 부패하여 그 피해는 국가 전체가 고스란히 입게 된다.

이러한 역사의 조언을 받아들여 많은 국가들은 군주의 권력을 제어하고 분산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고 이는 국민주권을 실현하기 위한 국가 조직원리인 권력분립으로 나타나게 된다. 물론 전적으로 도덕적인 인물이 나타나 국가를 일관성 있게 운영하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효율적이겠지만 시스템은(시오노 나나미의 통찰을 빌려)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를 위한다기 보다 보통인에게 맞추어야'할 것이기에 국가 구성원리나 조직원리 역시 제정과 거리를 두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와 그 한계

로마의 제정도 로마시민의 의사를 받은 황제가 집행하는 것이므로 대의민주제와 다를 것이 없다는 반론도 가능하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인간의 평등한 존엄성을 인식하지 못하여 국민주권원리가 아닌, 국가의 효율적인 운영에 중점을 맞춘 제정은 결코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국민주권원리를 실현하기 위한 국가 구성원리이자 정치체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과연 괜찮은가?"라는 물음에 직면한다. 민주주의의 한계인 중우정치를 해결하고 현실적인 한계를 해결하기 위해 대의 민주제를 많은 국가가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대의 민주제는 그 속성상 민주주의와 반대되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대의 민주제는 대표자가 국민의 의사에 기속되지 않기 때문에 국민의 의견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국가의 의사를 결정할 수 있다. 시민의 의사가 아닌 지배계층의 의사에 의해 국가가 운영되는 것이다. 이렇듯 민주주의는 본래의 취지와 다르게 지도자 계층의 독재로 흐를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 정치 상황에서도 이러한 우려되는 점이 발견된다. 국민의 손으로 선출된 이후 국민에게 정치적 책임밖에 지지 않는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국가 전체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명목으로 일반 국민의 의사와는 다른 국정 운영이나 정책 결정을 한다. 그리고 그 결정으로 미치게 될 부정적인 영향에 따른 문책은 행정관료의 경질로 마무리된다. 마치 절대적으로 책임을 질 수 없는 군주의 잘못을 신하에게 전가하여 책임을 면하는 행태를 연상케 한다.

국민의 대표는 국민의 의사에 부합하는 지나 국가의 이익에 합당한 지보다 오히려 정치적 처신을 잘하여 적을 많이 만들지 않았는지에 더 큰 책임을 지게 된다. 이는 정당정치를 표방하면서 더욱 더 심화되었다. 민주주의의 역사가 일천한 우리나라에서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한 국회의원의 소신 있는 행동이 정착되기보다 정당에 기속되어 정당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로 묻혀 버렸다. 국민의 대표는 이제 정당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고 그들이 속한 정당의 세력에 따라 자신의 책임에 대한 판단이 좌우된다.

대통령제를 취하고 있는 우리는 대통령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이는 유신 헌법 시절의 잔재라고 할 수 있다. 임기가 보장된 대통령은 탄핵 외에는 법적으로 직접 제동을 걸 수 있는 방도가 없어 자신의 권한을 관철시킬 수 있기 때문에 이를 막을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이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과도한 권한의 부여는 대통령에게 그의 권한 행사에 대한 재고를 간과하게 만들고 다른 헌법 기관의 역할을 무시할 여지를 남겨 놓는다. 권력 집중으로 권력분립의 기능적 역할이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때에는 타 헌법기관이 대통령의 권위에 직접 상충되는 언행을 하지 못하지만 민주화가 정착되어 다양한 의사가 형성되고 집중된 권력의 권위가 무너지며 헌법기관이 제 기능을 발휘할 때 대통령은 예전처럼 운신의 폭이 넓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에게 집중된 권한과 그 권한 행사에 대한 적절한 제어 장치 미비로 대통령은 타 헌법기관의 권고나 국민의 의견에 귀를 닫아도 무방하게 된다. 대통령의 권한의 강화는 사회국가 경향과 급변하는 세계정세에도 있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의 비판을 받아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수정된 자본주의의 모습인 사회국가를 국가의 이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복지 정책은 그 집행에 많은 전문가들을 필요로 하고 이러한 전문가 집단이 행정부 내에 형성되면서 전문성이 다소 뒤처지는 국회는 행정부를 효율적으로 제어할 역량을 갖추지 못하게 된다.

또한 과학과 산업의 발전으로 인한 문제, 전쟁·핵문제 등 급박하게 처리할 문제들이 산적한 현재의 상황에 많은 사람들의 의견과 이해관계를 조율해야 결론에 다다를 수 있어 신속한 결단을 내리기 힘든 국회는 정부의 시책에 대해 뒷북치는 격이 되고 국회는 행정부가 제출한 법안을 통과시키는 기관으로 전락하여 로마 제정시대의 원로원과 비슷한 양상을 띠게 된다. 행정부의 권한의 강화는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의 지위의 강화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선거로 인한 민주적 정당성의 맹신 또한 민주주의 정신을 해친다. 민주주의는 선거를 전제로 한다. 국민의 지지를 받은 자는 민주적 정당성을 갖게 되고 그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선거가 지배층의 우월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간주되어 그 정당성으로 인해 지배층은 자신의 결정이 우월하다고 생각해 다른 의견을 무시하게 될 수 있다. 이는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반영해야 하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민주적 정당성으로 해치게 된다.

민주적 정당성은 대통령의 지위를 공고히 하지만 이는 타 헌법 기관과의 마찰을 부를 위험도 있다. 민주적 정당성을 얻지 못한 타 헌법기관의 결단에 대통령이 승복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헌법제정권자인 국민의 지지를 받아 제정된 헌법의 민주적 정당성과 현재 국민의 지지를 받은 대통령의 민주적 정당성과의 충돌로 볼 수도 있겠다.

민주주의를 더욱 민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우리는 대의제의 일부분을 포기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을 한 자리에 모일 수 없기에 대의제를 필요악으로 민주주의의 실현에 공헌했지만 이제 과학기술의 발달로 이러한 한계가 점점 극복되어지고 있다. 임기 보장으로 인해 안정성을 유지하는 이익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국민의 대표는 임기 내에도 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결단과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제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면에서 지방자치단체에서 시행되고 있는 국민소환제는 바람직하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서 이러한 노력뿐만 아니라 시민 스스로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

민주주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비제도화된 공론영역 활성화

민주주의는 그 자체가 표방하는 시민의,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국가형태를 포기하고 독단의 권력자에 의해 권력이 휘둘려질 수 있음은 앞에서 본 바와 같다. 이러한 위험을 제거하고 시민들에게 자신의 진정한 주권을 찾아주고 그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의식과 제도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버마스의 대화이론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현재 민주주의에서 시민이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하는 것은 공론영역의 부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주장하기 위한 매커니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자본주의적 경제와 근대적 관리국가의 확장은 생활 세계의 식민지화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출한 의회와 대통령으로 인해 결정된 의사가 자신의 의견인 양 무기력하게 불평을 토로하거나 다음 선출시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막상 선거 시기에는 정확한 정보를 받지 못한 시민은 왜곡된 정보로 그들의 의사와 다른 결정을 하게 되고 후회는 계속된다.

'로마는 병참으로 이긴다'라고 시오노 나나미는 말한다. 여기서 '병참'이란 단순히 군대의 보급 등을 의미하기보다 사회의 전반적인 제도를 일컬은 말이다. 만일 독재적인 제정을 취한 로마에서 법이라는 안정적인 제도를 마련하고 있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로마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로마에서 법이 발달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시민의 의식과 함께 제도적인 면이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시민은 제도의 거대한 장벽 앞에서 다시 한번 한숨을 쉴 수밖에 없다.

국회는 제도화된 공론영역이다. 이는 유권적으로 국민의 의사결정을 대표한다. 하지만 시민의 공론영역은 제도화되지 않은 공론영역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비제도화된 공론영역을 신장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역할을 하는 시민단체의 부상과 통제 없이 자유로이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인 인터넷은 비제도화된 공론영역을 활성화시키는 데에 크게 공헌한다. 하지만 이러한 비제도화된 공론영역 역시 제도화된 공론영역에 시녀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시민단체의 자금줄을 쥐고 있는 정부는 그들의 구비에 맞는 시민단체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이에 대한 제동을 걸기 위해 정부의 영향력이 없는 시민기구를 운영하여 시민단체의 지원에 대한 투명성을 제고해야 한다.

인터넷 역시 왜곡된 정보를 정화하는 시스템을 길러야 한다. 선거 전 왜곡된 정보를 유출하여 유권자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선거가 끝나면 미안하다는 식으로 마무리를 짓거나 더욱이 누가 그러한 정보를 유포했는지 가려지지 않는 인터넷은 민주주의를 오히려 해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비제도화된 공론영역의 안정적인 정착은 단지 말만 무성한 대화의 장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이해관계에 상당히 얽매여 있다. 이해관계의 적절하고 정확한 조정이 없는 대화는 대화 당시에는 이해하고 뒤돌아서면 만족하지 못해 다시 분쟁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대화의 장이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대화의 전제가 요구된다. 대화의 대상에 관련된 주체가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보장되어야 하고 그 대화의 대상은 대화의 주체에 의해 처분가능(처분에 대한 용인 가능성)해야 할 것이다. 주체가 참석하지 못하거나 처분가능하지 않다고 해도 그 사회의 구성원인 인간의 존엄성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면(예, 생명공학) 현실적으로 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제도의 정착은 시민의 의식과 밀접하게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시민들은 능동적으로 자신의 주권과 참여권을 행사하는 자세가 필요하고 자신의 언행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이해관계에 지나치게 얽매여 전체의 이익을 무시하는 집단이기주의를 벗어나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볼 수 있는 역량을 함양해야 한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역사학자의 명언과 더불어 역사는 변화한다는 명언도 존재한다. 전자는 역사에 발현된 인간의 본성에 중점을 둔 해석이고 후자는 그러한 한계를 보완하려는 인간의 노력에 초점을 둔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신에 대해 새롭고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국민주권을 국가의 원리로 삼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민주주의가 적합하다. 하지만 그 민주주의도 제 기능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집중된 권력에 시민이 제어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민 사회 자체의 대화의 장이 활성화될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시민 자신의 의식도 뒷받침되어야 함은 두 말하면 잔소리다.

로마인 이야기 1 (1판 1쇄)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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