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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측의 일방적인 '삼성기사 삭제' 건으로 1년 넘게 끌어온 <시사저널> 사태가 막을 내렸다. 기자들 22명 전원은 일괄 사표를 제출하고 새 매체 창간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에 '시사기자단'은 아직 제호와 정확한 창간 날짜가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하반기 새 매체 창간을 목표로 전력투구하고 있다. 지난주부터 시작된 모금운동은 5일 오전 현재 1억5000여 만원의 후원금과 정기구독 약정으로 이어졌다. <오마이뉴스>는 시사기자단의 새 매체 창간을 독려하는 릴레이 편지를 연재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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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요의 갈래 중에 '참요'가 있다. 대개의 구전 동요가 역사 현실과 무관하게 발생하는데 비해, 예언의 동요인 참요는 역사와 연관이 있다.
조선시대에 숙종이 장희빈의 미색에 빠져 인현왕후를 폐위시키자, 장안의 아이들이 '미나리요'를 부르고 다녔다. "장다리는 한철이나 미나리는 사시사철"이라는 노랫말의 예언대로 장씨는 몰락하고 민비는 복위되었다. 동학혁명이 좌절되기 전에는 전봉준의 패전을 예언하고 애달파한 '파랑새요'가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갔다.
근대의 참요로는 광복 직후 유행했던 '미국사람 믿지 마소요'를 들 수 있다. "미국사람 믿지 마소 소련 사람 속지마소 일본은 일어난다 조선사람 조심하소'라는 가사는 현실을 통찰한 민심을 보여준다. 지도자들이 그 민심을 외면하고 천심을 거스른 결과가 동족상잔의 전쟁과 분단이었고, 그로 인한 질곡이 우리 삶을 아직 옥죄고 있다.
이처럼 민중은 예로부터 정직하게 현실을 꿰뚫어봐 왔지만, 권력자들은 오히려 늘 진실을 외면해 왔다. 진실을 인정하는 것은 자신들에게 불리하고도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권력자들이 외면한 진실을 간파한 시민들
<시사저널> 사태도 마찬가지다. 정직한 시민들은 본질을 대번에 간파했다. 그래서 파업 기자들을 지지하는 독자모임을 자발적으로 만들고, 1년이라는 긴 시간 기자들 곁에서 함께 싸웠다. 생업을 꾸려가기에도 빠듯한, 하나같이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누가 모이라고 한 것도 아니고, 큰 소리로 외친 것도 아니었다. 저마다 제 발로 쭈뼛쭈뼛 모여든 이들이었다.
22명의 기자도 대단하지만, 낮은 자리에서 기꺼이 파업 기자들의 손발이 되어주고, 자기 일을 제쳐놓고 길거리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내겐 더 경이로웠다. 기자들이 단식을 할 때는 핏줄이 굶는 듯 애타 하고, 그들 때문에 눈물 흘리고, 죄 지은 것 없이 미안해하는 사람들을 보며 세상 살 맛이 났다. 성별·연령·학력·소속·지위·재산·거주지, 이런 것들이 아무 의미도 제약도 되지 않는 성숙한 시민 연대를 체험하며 행복했다.
그러나 권력의 중심에 보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시사저널> 사태를 외면했다. 극소수 개인을 빼고 언론인도, 학자도, 문인도, 정치인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특히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의 유수한 언론이 보여준 침묵의 카르텔은 기묘하다 못해 괴기스럽기까지 하다. 덕분에 대다수의 국민들이 1년이 지나도록 <시사저널> 사태를 까맣게 모른 채 지내긴 했지만 진실이 언제까지 감추어지진 않는다.
세상에 비상식적인 일이 한두 가지이고 억울한 사람이 어디 하나 둘이겠는가. 왜 하필 <시사저널> 사태에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하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금력과 언론 자유 수호를 위한 싸움은 이전부터 늘 있어왔던 일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러나 <시사저널> 사태는 결국 언젠가 곪아서 터질 수밖에 없게 형성되었던 우리 사회 환경적 조건이 농익어 터진 한 극점이다. 만물이 극단에 이르면 소멸하고 정반대의 것이 일어나게 되는데, <시사저널> 사태가 그 분기점이었다.
평범한 독자들이 금방 알아보았고, 어린이를 위한 글을 쓰는 나 같은 비전문가의 눈에도 보이는 현상이 언론계 종사자와 그 분야 전문가들에게 보이지 않았을 리 없다. 그 많은 문화 엘리트들도 모르진 않았으리라. 아마도 더 크고 중요한 일들로 바빴던 것이겠지.
기업권력이 지배하는 피라미드에서 튕겨져 나온 기자들
시사기자단의 저항은 소수의 기업권력이 다수의 삶을 지배하는 구조가 강고하게 고착된 우리 사회 틀에 대한 거부의 표시이며, 비인간적 삶을 강요하는 시장 전체주의에 대해 사람다운 사람으로 존재하고자 한 자유의지의 표현이었다.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우리는 좀 더 온당한 밥벌이를 위해 싸웠을 뿐이며, 기자정신이니 언론자유니 하는 거창한 말은 모르겠다고 시사기자단 기자들은 말할지도 모른다. 허나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의미를 부여하든 여기선 중요치 않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현상은 현상이고 발생한 의미는 의미인 것이다.
촘스키와 허먼의 이론을 받아들여 내가 나름대로 이해한 <시사저널> 사태는 이러하다.
경제 엘리트들은 이미 형성된 사회의 틀을 유지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이를 위한 의도적 계획이나 음모는 따로 필요치 않다. 왜냐하면 일단 틀이 형성되면 구성원들 스스로가 안정된 경제 피라미드 구조 유지를 위해 자발적으로 검열하고 통제하기 때문이다.
경제 엘리트들은 기업 이익의 극대화가 최고의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것을 위태롭게 하는 위협은 의도적으로 적대시한다. 협조적인 언론기관이나 편집자와 기자 그리고 문화인들은 경제라는 피라미드에서 안정적인 위치를 찾고자 하며, 틀을 위협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들은 자유를 보장받고 충분한 대가도 지불받는다. 그러나 이 경제 구조 유지 협조에 반항적이거나 의문을 제기하는 등 위협적 성향을 보이는 구성원은 피라미드에서 제거되거나 밖으로 튕겨져 나간다.
즉, 전 <시사저널> 기자들은 기업 권력에 비협조적인 반항아였기에, 현재의 사회적 틀을 안정되게 지키고자 한 사장과 사주의 자발적 통제에 의해 피라미드 바깥으로 튕겨져 나오게 된 것이다. 여기서 삼성의 직접 개입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간접적 배후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약자의 언어'를 말했던 '독수리 오형제'
메이저 언론들이 보여준 침묵의 카르텔은, 동료를 왕따시킴으로써 지배 권력에 대한 협조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는 점에서 적극적 표현의 한 형태인 셈이었다. 이에 비해 부지런히 떠들어 주었던 '독수리 오형제'- 즉 <오마이뉴스> <미디어오늘> <프레시안>, 한국기자협회 등의 매체들이야말로 '지배자의 언어'가 아닌 '약자의 언어'를 말하는 입임을 새삼 확인시켜 주었다.
기업 권력이 지속시키고자 하는 사회의 틀 속에서는 모든 가치가 효용성만으로 평가된다.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고 생명이 그 자체로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면, 인간을 부품으로 만들고 욕망의 노예로 길들이는 사회적 틀 자체를 허물어야 한다.
하지만 그래도 돈이 있어야 신매체 창간도 하고 지속적 유지도 해 갈 수 있겠기에, 할 말 다 하겠다고 하는 어수룩한 기자들을 지켜보는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지배 권력에 순응하기를 거부하고, 안정된 틀조차 위협하려는 기자들이 기업들 눈에 곱게 보일 리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허나 돈을 부리는 것도 사람이니 지나친 걱정은 하지 않는다. 기자들이 지금의 겸손과 정직을 잊지 않고 정도를 걷는다면 민심이 그들을 외면하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민심의 지지를 받는 한 길은 늘 새롭게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선안나 기자는 동화작가이며 단국대 초빙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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