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측의 일방적인 '삼성기사 삭제' 건으로 1년 넘게 끌어온 <시사저널> 사태가 막을 내렸다. 기자들 22명 전원은 일괄 사표를 제출하고 새 매체 창간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에 '시사기자단'은 아직 제호와 정확한 창간 날짜가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하반기 새 매체 창간을 목표로 전력투구하고 있다. 지난주부터 시작된 모금운동은 5일 오전 현재 2억2800여 만원의 후원금과 정기구독 약정으로 이어졌다. <오마이뉴스>는 시사기자단의 새 매체 창간을 독려하는 릴레이 편지를 연재한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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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전 <시사저널>을 처음 보았을 때 든 느낌은 품위가 있다는 것이었다. 보통 품위는 나이먹은 사람이나 오래된 사물, 고전같은 데에서 나오게 마련이니 막 창간한 잡지에서 품위가 느껴진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 품위는 창간호 이전부터 오래도록 준비하여 선천적으로 타고나게 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품위는 디자인은 물론, 제목과 기사·사진·그래픽까지 일관되게 지향하는 어떤 가치에서 나오는 듯 했다. 그런데 그 정체가 무엇인가를 외부인의 입장에서 알아맞히는 게 쉽지 않았다. 차라리 그 품위는 '어떠하지 않다'를 통해 말하는 것이 손쉬울 것 같다.
<시사저널>은 서둘지 않았다. 주간지이므로 뉴스를 즉각 보도하는 일간지나 방송보다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고 심층분석과 주변 취재를 더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뜨거운 죽을 먹을 때처럼 호들갑스럽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이 분명히 있다.
내가 아는 시사저널은 하늘높이 맹금류였다
하지만 <시사저널>은 개개의 사안에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특종 ·낙종에 일희일비 하지 않았다. 하늘 높은 곳에 떠있는 맹금류가 지상을 살피며 전체를 파악하려는 것처럼 신중했다. 당연히 한 건을 크게 터뜨려 일거에 시장의 승자가 되려는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 한 건을 다시 확인하고 분석하고 두들겨 보는 때가 많았다.
<시사저널>은 선정적이지 않았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명목으로 눈이 아프도록 자극적인 표지, 그럴싸한 제목, 사진으로 점철되어 있는 잡지들과는 달랐다. 사실과 진실, 허위와 오보가 뒤섞여 있어 어느 걸 골라서 믿어야 할지 헷갈리게 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시사저널>은 화학조미료 맛이 없었고, 담담함으로 중심을 잡은 뒤에 천천히 다른 맛을 보여줄 요량인 듯했다.
<시사저널>은 다른 매체에 종속되지 않았다. 시사 주간지는 일간지를 발행하는 언론사에서 발행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본지'에서 다루지 못한 기사를 다룰 때도 있고 본지의 기자가 기사를 쓰는 경우도 많으며 본지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쓴 기사가 들어 있다. 알맹이도 있지만 자투리가 많다. 그런데 <시사저널>은 본지가 없었다. 아니 스스로가 본지였다.
<시사저널>은 자본에 휘둘리지 않았다. 어떤 잡지는 사주의 이익과 특권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어떤 잡지는 광고주들의 입맛에 거슬리는 기사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 <시사저널>은 발행인이 도산하고 경영권이 넘어간 적이 있지만 발행인을 비호하거나 방패막이 되는 걸 본 적이 없다.
<시사저널>에 여러 차례 기고한 적이 있는 사람으로서 나는 <시사저널>이 가지고 있는 금도를 벗어나는 글을 쓰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안다. 어떤 매체에 글을 쓸 때 그 매체가 가진 속성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다. 기왕 주고받을 영향이라면 좋은 영향을 주고받고 싶은데, 실린 글을 읽다 보면 슬그머니 기분이 좋아지는 경우가 시사저널에 기고할 때 자주 느꼈던 감정이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다른 기고자들의 글도 경박하게 튀거나 한쪽에 지나치게 치우친 경우가 없었다. 그러니 시끄럽지 않았다.
나직한 말투, 그 속의 쇠심줄 같은 고집
내가 만나본 <시사저널>의 구성원들 가운데 시끄러운 사람은 없었다. 대체로 말투는 나직했지만 이따금 킬킬거리며 잘 웃었다. 그러다가도 의문이 있는 사안에는 쇠심줄 같은 고집으로 파고들었고 옳다고 믿는 사안에는 대문을 활짝 열고 있는 포도청 앞에 서서도 양보하지 않았다.
자본과 방패막이 없어 받아들여야 했던 인고의 세월이 구성원들을 혈족처럼 화합하고 단결하게 했던 것 같다. 이런 게 품위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어떻든 그랬다는 것이다.
타고난 품위는 그렇다 치고 결국 만인이 공감하는 진정한 품위는 스스로의 부단한 연마와 심덕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시사저널>은 창간호부터 발간 17년에 이르기까지 타고난 품위에 후천적 노력으로 쌓아올린 품위를 합쳐 언론매체로서는 드물게 느껴지는 품격을 보여주었다. 밖에서 보기에는 자연스러워 보이는 이 품위를 지키기 위해 내부에서 어떤 번민과 투쟁이 있었는지 잘 모른다.
그런데 어느 날 단 한순간에 그 품위가 사라져 버렸다. 모든 게 저속하고 호들갑스러우며 아마추어적으로 보였다. <시사저널>이라는 제호조차 조악스러운 단어와 그림 속에 포위되어 누추해져 버렸다. 수상한 사실, 수상한 견해가 수상한 제목, 수상한 문장을 타고 춤을 추었다. 그 전의 <시사저널>에서 품위를 느끼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저런 잡지는 많고도 넘치며 그게 좋고 나쁠 이유는 없으니까.
그런데 그 품위가 자꾸만 생각났다. 어떤 존재가 한 번 잃어버리면 다시 찾기 힘들, 전당포에 맡겼다 되찾는 결혼반지와 다른, 내림굿을 골백번 해도 얻어지지 않는 그 품위가.
<시사저널> 기자들의 싸움이 내게는 그 품위를 되찾으려는 몸부림으로 보였다. 어쩌면 헛될 수도 있는. 싸움은 계속되었다. 안타깝지만 지켜볼 도리밖에 없었다.
좋은 잡지가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든다
내게 품위가 없는 <시사저널>은 <시사저널>이 아니라 시시한 시사와 너절한 저널을 합친 '시사 + 저널'일 뿐이다. 오염된 우물을 포기하라, 무너진 진지를 버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말해줄 사람이 없었다. 문득 싸움이 끝났다.
새로 태어날 잡지는, 분명히 예전의 품위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거기에 더해, 온 몸을 내던지는 격렬한 싸움 끝에 다시 본연의 일로 돌아간 '품위 있던 <시사저널>'의 구성원들의 끈기 있고 날선 기운이 보태질 거라고 믿는다. 서둘지 않고 선정적이지 않으면서, 스스로가 중심이며 엄정한 눈에 눈물까지 가진 잡지가 멀지 않은 어느날, 오래도록 알고 지낸 친구의 선물처럼 우편함에 들어있을 거라고 믿는다.
나는 좋은 잡지를 읽는 것이 좋은 잡지를 만드는 행동일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품위 있는 좋은 잡지가 우리의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들며 공동체의 건강에 유익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성석제는 소설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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