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암(白樺庵)터에는 그 규모가 당당한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부도 몇 기와 함께 부도비가 자연스레 흩어져 있다. 이곳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자 진을 치고 있지만 그 자리에 제대로 끼어들지 못하는 이방인은 혼자서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린다.
남들은 열심히 설명을 듣고 있는 사이 서산대사의 부도비를 대충 읽어 내려간다.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좌의정(左議政) 이정구(李廷龜)가 글을 지었다고 되어있네. 그리고 신익성이라는 사람이 글을 적었다고 한다.
옆의 친구에게 대광보국숭록대부는 정1품의 최고관직을 가진 사람에게 주는 관계명이며 이정구는 조선시대 뛰어난 문장가라고 슬쩍 말을 건넨다. '물론 이정구라는 인물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려면 돌아가서 자료를 준비해야 하겠지만'이라는 말과 함께. 뭔가 특이한 것이 있나 싶어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슬쩍 자리를 피해 풍담당(楓潭堂)의 부도비로 자리를 옮겼다. 풍담이라는 승려에 대한 자료도 찾아봐야 한다는 숙제를 또 얻었다.
아래로 내려오면 삼불암(三佛岩)을 만난다. 석가여래, 아미타불, 미륵불이라는 세 부처를 조각해놓은 큰 바위를 말한다.
불교문화를 조금 접해본 사람이라면 여기서 일단 약간의 의문이 생겨야 한다.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정토라는 공간을 다스리는 부처라서 동쪽 유리광 세계를 다스리는 약사여래와 짝을 이루며, 미륵불은 56억년 뒤에 나타날 미래의 부처이므로 석가여래보다 과거에 나투신 연등불과 짝을 이루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아미타불-석가여래-약사여래'를 일러 삼계불이라 하며, '연등불-석가여래-미륵불'을 일러 삼세불이라 칭한다.
요즘 나는 이렇게 엄격하게 따지는 모습에서 약간 뒤로 물러선 모습이다. 과거 불교 문화재를 바라볼 때 지식을 바탕으로 꼼꼼하게 따지는 것이 진지한 답사자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믿음의 대상인 부처로 바라보는 불교신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꼭 그렇게 들어맞아야 할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로서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희망을 전해주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삼불암과 울소에 담겨있는 고려말 나옹화상과 김동거사의 이야기를 뒤로하고 장안사 터로 내려온다. 장안사 석탑은 마을 안에 있어 보지 못하고 구석진 곳에 외로이 서 있는 한 기의 부도와 개망초의 천지로 변한 장안사 터로 오른다.
북측 사람들은 돌멩이 몇 개만 있고 아무것도 없는 여기에 왜 오느냐고 묻는다. 그 돌멩이 몇 개 때문에 온다고 대답할 수밖에.
마지막 금강산 - 다음을 기약하며
마지막 날 되돌아가는 시간에 맞추려면 만물상이나 구룡연을 돌아보기엔 너무 빠듯하여 포기하고 해금강과 삼일포로 향한다. 곳곳에 늘어선 어린 군인들을 향해 차 안에서 손 흔드는 사람은 무슨 심정일까? '누가 동물원의 원숭이일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해금강으로 가려면 비무장지대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비무장지대의 늪지에는 노랑어리연꽃처럼 보이는 작은 연꽃도 피어있고 부들도 간혹 보인다.
해금강이라 해서 특별한 감흥은 없다. 동해안을 잇는 7번 국도를 타면 만날 수 있는 경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많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는 유원지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다. 그래도 의미를 부여하자면 여기도 뭇사람들이 가고파 하던 금강의 한 구역이라는 것이겠지.
해금강에서의 좋은 느낌은 마음이 통하는 친구와 함께했다는 것이다. 그는 김홍도를 열심히 보고 왔다고 한다. 지금 그는 김홍도가 되어 저 먼바다를 보면서 어느 곳에 자리를 잡고 어떤 그림을 그릴까 하는 마음이다.
나는 바다 위에 떠 있는 한 톨의 겨자씨를 생각한다. 한 톨의 겨자씨에 함몰된 바다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아주 작은 내 머릿속에 푹 빠져버리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다시 돌아 나오면 삼일포 앞 주차장이다. 주차장 옆에는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는 배 과수원이 있다. 버스에서 이 과수원과 관련한 어느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주차장에서 내린 할아버지는 삼일포로 향하지 않고 과수원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어 나중에 조용히 그 사연을 물어보니 일제강점기부터 자신이 가꾸던 과수원이었노라는 대답을 들었다는 것이다.
삼일포부터 봤다면 '우와!'하고 감탄사를 날릴 수 있으련만 해금강을 먼저 바라보고 난 뒤라 그저 작은 호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삼일포로 가는 길옆에 산초나무가 있어 그 잎을 따서 한 번 씹어본다. 산초의 독특하고 톡 쏘는 맛을 좋아하는 경상도는 산초를 향신료로 사용하여 음식을 많이 만든다. 특히 경상도식 추어탕에는 산초가 빠질 수 없다.
마지막이라는 것을 아는지 연우도 삼일포를 돌면서 사진도 찍고 까분다. 연우에게 이곳이 좋으냐고 물으니까 당연히 좋다는 대답이 나온다. 또 여기에 올까 하고 물으니 다음에는 지우랑 함께 오자고 한다. 언제나 말썽을 피우는 동생이지만 그래도 챙겨주는 그 마음이 애비보다 낫다. 애비는 담에 혼자서 느긋하게 못 본 곳을 찾아볼까 딴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래 다음에는 우리 가족 모두가 이곳에서 사진을 찍어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