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독자 여러분께.
안녕하십니까.
앞으로 몇 편에 걸쳐 제국으로서 미국과 그 시민들을 살펴보려 합니다. 언제인가부터 미국은 초강대국을 넘어 제국으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현대사에서 아마도 가장 강력한 제국인 미국은 전 세계인의 생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한국만 봐도 미국의 이해관계 때문에 십여 세기 동안 하나였던 나라가 분단되었고, 한국전쟁에서 끔찍한 살육과 파괴가 자행되었으며, 분단체제가 고착되어 남북의 수많은 한국인들이 고통을 겪었습니다.
제국으로서 미국은 지배계급, 정치·경제·군사체제 뿐만 아니라 수많은 시민의 협력과 애국심을 필요로 합니다. 제가 쓰는 편지들에서는 거대구조가 아니라 제국 시민의 사고와 행동에서 논의를 시작하려 합니다. 보통 시민의 일상생활에서 제국이 운영되는 기제를 찾아보려는 것입니다.
'제국주의 미국'에서 눈 돌리는 미국 학생, 의아해하는 한국 학생
이번 여름 저는 한국의 한 대학에서 한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미국의 대외정책이란 과목을 강의했습니다. 제가 재직하고 있는 학교에서도 비슷한 과목을 가르치지만 미국에서 하던 대로 강의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여기서 가르칠 때는 비슷한 교육을 받고 비슷한 대중매체를 읽고 보면서 살아왔기에 대체로 시각이 비슷한 미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며, 따라서 미국인들에게 흔히 있는 잘못된 가정과 믿음을 해체하는 것이 교육 과정의 큰 부분입니다. 반면 한국 학생들에게는 미국인의 대중적 고정관념이 대략 어떠한가부터 가르쳐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부 한국 학생들이 미국과 미국의 대외정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 역사상 일어났던 다른 나라에 대한 수많은 군사적 개입(라틴아메리카에서만 190여 차례), 어마어마한 군비 지출액(전 세계 군비지출액의 42%),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미군기지(무려 130여 개 국가에 진출), 그리고 미국 내의 경제적 불평등 문제(예를 들어 최상위 1%가 90%의 국민이 보유한 재산의 총액보다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것) 등을 우선 짚어나갈 때, 두 나라 학생들의 반응은 조금 달랐습니다.
미국 학생들은 우선 이런 통계에 깜짝 놀라며 통계수치 자체를 의심하거나 어떻게든 미국 사회를 변호하려고 할 뿐, 미국이란 나라 자체의 모순을 직시하려 하지 않습니다. 반면 한국 학생들은 "왜 미국인들은 집회나 시위 등을 통해 위정자에게 항의하고 국내의 불평등과 대외정책의 문제를 해소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나요?"라든지 "왜 미국인들은 자기네 나라 정부가 남의 나라를 상대로 하는 행동에 그렇게 무관심하고 무지한가요?"라고 질문했습니다. 이에 저는 미국 사람들이 자국 국민들과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제국의 시민으로서 모순된 구조에 동참하고 있는지를 설명해야 했습니다.
미국우월주의에 갇힌 사람들... 바탕은 '자뻑'과 착각
저와 우리 학교 학생들을 비롯한 미 제국의 시민들은 교육과 일상생활 환경과 대중매체를 통해 미국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끊임없이 주입받습니다. 그래서 대다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많은 미국인이 미국은 항상 근본적으로 옳고, 미국인은 타국인보다 우월하며 더 많이 축복받았고, 타국인이 좀 더 미국인처럼 될 수 있도록 가르칠 권리와 의무가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게다가 미 제국의 많은 시민들은 미국 내외의 상황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을 뿐만 아니라, 모순되게도 자기네들이 많이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선(善)을 행해야 한다고 강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미국인의 본질적인 특성이다, 자기가 받은 축복을 나누어줄 대상을 선택할 의무와 권리와 능력이 있다고 믿는 자들은 오로지 미국인밖에는 없을 것이다, 이런 오만함 때문에 선선히 미국화하기를 거부하는 나라에 가서는 양민을 폭격해서라도 미국화라는 선물을 안겨줘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는데 저는 그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미국인이 이렇게 똑같이 생각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믿음은 폭넓게 퍼져 있으며 미국 내에서 진행되는 국내외 정책에 대한 거의 모든 논의의 기본 바탕이 됩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미국우월주의 신념이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물고기가 물을 볼 수 없듯 이를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 달리 생각해볼 여지가 없습니다.
미국우월주의의 본질은, 어떤 기준에서 보든지 간에 미국보다 훌륭하거나 자유롭거나 살기 좋은 나라는 이 세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전제에서 출발해 다른 모든 이론과 주장과 논리가 성립됩니다.
따라서 대개의 미국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서 무언가를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뭘 하든, 뭘 믿든, 뭘 가지고 있든 간에 미국이 더 나은데 뭐 배울 게 있겠습니까? 미국 밖의 세계 모든 나라들은 못살고(또는 덜 잘살고) 열등하며, 우호적일지는 몰라도 항상 미국보다 뒤처져 있고, 미국을 부러워하며 미국을 따라잡으려고 안달이 나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세계의 지도자인 미국인에겐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처럼 잘살 수 있도록 '가르칠'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다른 나라 사람들이 미국의 우월성을 부정하거나 다른 문화나 사회도 미국과 다르지만 나름대로 훌륭하다고 설명할라치면,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오히려 그 외국인들이 국수주의적인 우물 안 개구리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이기면 옳은 것이라고 믿는 미국인... 상황 안 좋으면 피해자 이라크인 탓
몇 년 전, 강의 시간에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정당한지에 대해 토론을 시킨 적이 있었습니다. 학생 하나는 "침공은 불법이고 옳지 못했지만, 이왕 개입했으니 이라크인들이 더 좋은 나라를 건설할 수 있도록 우리가 가르칠 의무가 있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현재 이라크란 나라가 있는 지역에 주권국가가 오륙천 년 동안이나 존재해왔으니 어떻게 좋은 나라를 건설해야 할지 그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알지 않겠느냐고 제가 지적하자, 다른 학생 하나가 "그렇지만 이라크 사람들은 우리처럼 민주국가에서 살아본 역사가 없잖아요!"라고 대꾸했습니다.
또 다른 학생은 무식한 이라크인들은 어떻게 국가를 경영해야 할지 모를 뿐만 아니라 미국의 도움에 대해 고마워하는 마음이 부족한 같다고 얼른 끼어들었습니다. 수업을 하다 보면 가끔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난감한 순간이 있는데 이때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차근차근 반론을 하기에 앞서 정치 패러디 작가인 처크맨(Chuckman)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합성사진을 묘사해주었습니다. 반쯤 폭파된 건물을 향해 수많은 미사일이 날아오고 있고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해골이 "미국 대통령님,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합성사진이었습니다.
우리 학생들이 특별히 모자라서가 아니고 제가 아는 많은 미국인들의 의견이 이와 비슷한 게 사실입니다. 최근에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전문가들이나 정치인들이 이라크의 "실패", 즉 이라크가 미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은 데 대해 이라크인들을 비난하는 것이 유행입니다. 한술 더 떠서 이라크인에겐 자기 나라에 대한 책임의식이 없다고 비판합니다.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논리지만 미국 대중에게는 먹혀들어갑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옳지 못하다"고 말했던 그 학생도 미국이 다른 주권국가를 침공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잘못됐다고 판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학생은 단지, 미국 정부가 옳지 못한 이유로 침공했다는 것과 미군이 이라크에서 승승장구하지 못하는 것이 실망스럽다는 것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미국이 이기지 못하는 것이 유감스러울 뿐, 미국이 걸핏하면 군사력을 동원해 공격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인디펜던트> 기자인 로버트 피스크(Robert Fisk)는 "다수의 미국인들에게는 전쟁이 윤리적으로 정당한지 여부는 문제가 안 되며, 그들은 미국이 이길 수만 있다면 이라크 침공이 옳은 결정이라고 여길 것이다"라고 지적했습니다.
미국인에게 물어보세요, '이라크인 100만명 이상 사망'에 가책 느끼는지
지금도 대다수 미국인은 이라크에서 미군이 이기고만 있다면 이라크 침공의 불법성이나 이라크 국민의 극심한 고통, 자국 정부가 낭비하고 있는 엄청난 전비, 위험수위에 달한 미군 내 부패에 대해 아무런 반감도 품지 않고, 당연히 반대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인들이 반대하는 것은 남의 나라에 함부로 쳐들어갔다는 것도, 침공의 구실로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정보를 위조했다는 것도, 미군이 점령지에서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도 아닌, 어떤 이유로든 미국이 지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이라도 미국이 이라크에서 승전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부시 대통령이나 대외정책에 대한 지지도는 다시 2003년 수준으로 치솟을 것이 틀림없습니다(이라크 침공 초기인 2003년 4월에 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당시 미국인의 74%가 침공은 "옳은 결정"이라고 했으며 61%가 "군사작전이 잘 수행되고 있다"고 했습니다). 1, 2주일 전에 부시의 지시로 진행된 군사적인 대공세가 효력을 발휘하는 듯이 보이자 이라크전에 대한 지지율이 10%가량 올랐던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침공 초기와 달리 현재 미국민들은 대체로 현 대통령 부시를 지지하지 않으며 이라크전에 대한 지지율도 매우 낮은 상태지만, 이를 미국인들이 평화를 지지하게 되었으며 미국의 비윤리성을 참회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건 심각한 오해입니다. 미국인들은 미군 부상자와 전사자가 속출하고 있는 데 대해 화내고 있을 뿐입니다.
아무 미국인에게나 물어보십시오. 1991년에서 2003년 사이에 유례없이 가혹했던 이라크 경제제재 때문에 사망한 5세 미만 영유아 50만 명에다가 미군의 이라크 침공 후 사망한 60만 명에 달하는 이라크인 희생자들, 현재 이라크인의 43%가 극심한 빈곤에 처해 있다는 사실, 대부분의 이라크 국민이 상수도 없이 살고 있으며 전기는 하루에 2~3시간만 공급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얼마나 양심의 괴로움을 느끼는지 말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대부분 이에 관심을 두기는커녕 이런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미군 3~4천명이 죽어나간 것은 그들에게 큰일입니다. 중동 출신 학생 하나는 제게 "미국인들은 참 비겁해요, 자기네 군인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으면서 미군 한두 명이 죽으면 난리가 나요"라고 하더군요.
얼마 전에 반전 시위를 조직하고 있던 제 동료교수 하나는 시위 참가자들이 각기 이라크전에서 전사한 미군의 이름을 적은 작은 십자가를 하나씩 가슴에 달기로 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사망한 이라크인들의 이름이나 숫자도 적어서 함께 달든지, 아니면 전사한 미군의 이름 밑에다가 "이 미군 병사는 수십 명의 이라크인들을 죽이는 데 일조했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써넣어야 공평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그 교수는 "당신이나 그러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반전시위에 참여한 미국인들은 비록 평균적인 미국인들보다는 조금 더 의식이 있는 편이었겠지만, 결국 그들의 분노와 정의감은 "우리 군인"들의 복지에 대한 관심을 넘어서지 못했던 것입니다.
선량한 미국이 모자란 나라들에 퍼준다고? 오만한 고정관념
앞서 말했듯 대다수 미국인은 미국이 선의로 가득 차 있으며 강력하고 훌륭하며 지나칠 정도로 남들에게 '퍼준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미국은 다른 나라에 군사적인 개입을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옳은 이유에서이며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꼭 필요한 조치이기 때문에 하는 것뿐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하며 어리석은 태도에 갇혀있기 때문에 미국인들은 세계시민의 대다수가 반대하는 미국 정부의 제국주의적 침략 행동에 대해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저항하고 불복종하며 들고 일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 함께 생각해볼 과제는 제국 시민들의 이러한 태도가 <오마이뉴스> 독자를 비롯한 한국 사람들에게는 왜 문제가 되고, 미국의 대중매체와 국가기구들의 이해관계가 어떻게 얽혀있으며, 어떤 수단과 방식으로 이들이 자국민의 정서를 자극하고 조종하며, 어떤 고정관념을 심어주고 끊임없이 재생산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쓸 편지들에서는 이런 과정을 좀 더 자세히 분석해보겠습니다. 그럼 다음번을 기약하며 오늘은 이만 줄입니다.
덧붙이는 글 | 본문에서 인용한 처크맨의 블로그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chuckmancartoons.blogspot.com/ "부시와 비이성적이고 끔찍하게 바보스런 것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좋아할 블로그"라고 소개해놓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