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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돌기둥에 3칸으로 보기드문 일주문
▲ 일주문 4돌기둥에 3칸으로 보기드문 일주문
ⓒ 김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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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문무왕시대에 창건한 고찰이며 부산 근교의 명찰인 범어사도 가을빛이 완연하다. 활엽수가 많은 범어사 주변 산들은 백양산 못지않게 단풍이 곱다.

지난 주말(3일) 내가 범어사를 찾은 것은 단풍 때문만이 아니다. 범어사에는 눈여겨 살피지 않으면 지나쳐 버리는 비경이 있다. 그 비경을 소개코자 한다.

시내버스나 자가용차로 쉽게 오를 수 있는 길이 있지만, 개울을 따라 2.5km의 오솔길을 오른다. 등배기에 땀이 배일락말락 할 즈음 범어사 입구에 도달한다. 노오랗게 물들은 은행나무 잎이 먼저 반긴다. 범어사 일주문 앞에 선다.

앞의 소나무와 잘 어울리는 문이다.
▲ 천왕문 앞의 소나무와 잘 어울리는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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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 화엄종 10찰 중 하나답게 일주문(지방문화재 제2호)이 근엄하다. 속계와 가람의 경계를 나타내는 산문인 일주문을 자세히 살펴본다. 여느 사찰과는 다르다는 것을 발견한다. 돌기둥으로 이루어진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다른 사찰은 대개 ‘단칸’ 혹은 ‘2칸 일주문’이다. 그런데 범어사 일주문은 ‘3칸 일주문’(부산시 유형문화재 2호)이다.

둥글고 긴 4개의 초석 위에 짧은 두리기둥을 세우고 겹치마 맞배지붕을 올린 모양새다. 무거운 지붕이 흔들거릴 수 있는데, 받침기둥도 없이 돌 위에 올린 건축술이 놀랍고 신기하다. 나란히 선 4개의 돌기둥은 마치 4명의 수문장이 방문객을 정중히 맞이하는 모습으로 비춰진다.

진리는 둘이 아니라는 문
▲ 불이문 진리는 둘이 아니라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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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비경] 진입로

일주문을 지나면 계단 위로 천왕문이 나오고, 천왕문에 올라서면, 조금 떨어져서 불이문이 나타난다. ‘진리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일깨워주는 문이다.

"천왕문을 지나 불이문에 이르는 길은 짧지만 길고, 굽었으되 곧아 보이는 한국 불교 건축이 성취한 가장 뛰어난 모습으로 구현되는 황홀한 가람의 진입로"라고 김봉렬(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씨가 <가보고 싶은 곳 머물고 싶은 곳>(안그라픽스)이라는 책에 써 놓았다. 김 교수의 글을 또 옮겨보자.

천왕문에서 바라본 길
▲ 제1비경(진입로) 천왕문에서 바라본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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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키보다 낮은 담장은 이 공간을 보호하려는 목적보다는 적막한 길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건축적 장치이다. 그리고 뻗어 오름을 강조하기 위해 양 옆에 줄지어 나무를 심었다. 높은 가로수 줄은 길의 수평적 확장을 도와주며, 효과적으로 불이문에 도달하게 하는 시각적 장치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지막이 상승하는 바닥의 단들은 수평적 길이 수직적으로 변환하기 위한 예비 단계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가파른 계단으로 이어진다. 이 곳에는 수평감과 수직감이 교차하는 공간적 율동이 있고 키 큰 나무의 그늘 사이로 밝게 빛나는 음영의 어우러짐이 있다. 그리고 아무리 사람들이 많이 북적대도 이곳에서만은 차분해지지 않을 수 없는 신비한 적막이 있다."

불이문에서 뒤돌아본 길
▲ 제1비경(진입로) 불이문에서 뒤돌아본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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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볼 수 있는 낮은 담장, 그리고 띄엄띄엄 심어진 키 큰 편백나무들이 어떻게 건축가의 눈에는 이렇게 오묘하게 달리 나타날 수 있는 것인가?

"정신을 차리고 자세히 살펴보면 이 길은 그다지 길지도 않고 똑바르지도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3단으로 놓여진 세 토막의 길들은 약간씩 어긋나며 휘어져 있다. 그러나 그 분절의 효과 때문에 전체적으로 곧아 보인다. 또한 양켠의 낮은 담장은 길의 시각적 길이를 효과적으로 확장한다. 짧지만 길고 굽었으되 곧아 보인다. 한국적 미학의 극치다."

어찌 생각하면 현학적인 말 기교의 극치일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물의 관점에 따라 현상은 카멜레온처럼 변화무쌍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이곳이 범어사의 첫 번째 비경이다.

[두번째 비경] 대웅전과 3층석탑

대웅전과 3층석탑
▲ 제2비경 대웅전과 3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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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문을 지나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서 보제루를 오른 쪽으로 휘돌아 나가면 사찰의 본전인 대웅전(보물제434호)이 보인다.

보제루 옆 종각 앞 마당에서 대웅전을 올려다본다. 대웅전을 정면으로 보지 않고 45도 각도로 비스듬히 바라보게 된다. 시선은 3층석탑(보물제250호)을 넘어서 대웅전 처마 끝에 닿는다. 탑과 집의 절묘한 어울림이다.

대웅전에서 바라본 소나무
▲ 제2비경 대웅전에서 바라본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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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사찰의 배치구조가 대웅전의 좌우에 각각 탑을 배치하는 양탑 형식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범어사는 대웅전 왼편에만 탑을 세운 단탑 형식이다. 계단 높이 올라앉은 맞배지붕의 대웅전을 따로 떼어서 보면 공중에 붕 뜬 느낌을 준다. 그런데 아래 마당에 서 있는 3층석탑을 연결시켜 보면 장중하면서도 안정감을 갖는 대웅전으로 변모한다.

거기에다 대웅전과 3층석탑 간의 조금 먼 듯한 거리감을 완벽하게 해소시켜주는 것이 계단 옆에 서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다. 대웅전, 소나무, 3층석탑, 이 3가지 이질적인 요소가 이루어내고 있는 오묘한 조화가 우리 눈을 즐겁게 한다.

계단 아래 시골 아가씨가 수줍은 듯 다소곳이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3층석탑과 근엄한 어버이의 형상인 대웅전이 정감 있는 풍경으로 우리 눈에 비칠 때 비로소 범어사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범어사의 두 번째 비경이다.

[세번째 비경] 돌담길

범어사 경내에 속세의 공간
▲ 제3비경(돌담길) 범어사 경내에 속세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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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금정산 너덜겅(암괴류)으로 나가는 돌담길을 만난다. 3단의 석재 위에 다시 돌과 흙으로 담을 쌓았는데 수십 년 묵은 담쟁이가 돌담을 덮고 있다. 담쟁이 잎에 가을이 담뿍 배어 있다.

촘촘히 들어선 건물과 건물이 뿜어내는 답답한 분위기를 일거에 반전시키고 있는 돌담길, 이 돌담을 쌓음으로 해서 정형화된 사찰의 이미지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은 장인이 누구인지 궁금하다.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적당한 높이의 돌담길이 지나는 객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비결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돌담 오른 쪽 건물들은 담 너머로 숨어버리고 왼 쪽 요사채들은 담 밑에 잦아들어 담이 가지는 독립성과 은밀함이 도드라져서일까.

넓은 범어사 경내에 적어도 절 냄새가 풍기지 않는 곳이 필요하다면 바로 이곳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길은 금정산의 정기가 흘러들어오는 범어사의 숨통길인 셈이다. 이곳이 범어사의 세 번째 비경이다.

[네번째 비경] 너덜겅바위군

여러 모양의 바위들이 널려 있다.
▲ 너덜겅바위군 여러 모양의 바위들이 널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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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길이 끝나는 곳에 너덜겅(풍화작용에 의한 바위 부스러기들)이 나온다. 20여만㎥에 널려 있는 바위들로 빙하기와 그 후기 과정을 거쳐 거대한 바위 표면이 마모되면서 퇴적된 화석화 지형이다. 학술적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고 해서 금정구청에서 이곳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할 예정이라 한다.

이 길로 계속 올라가면 북문에 이른다.
▲ 너덜겅바위군 이 길로 계속 올라가면 북문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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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려 있는 바위들의 모양이 다채롭다. 울퉁불퉁하고 두루뭉술하고, 펑퍼지고 널찍하다. 너덜겅은 바위만 산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바위 사이 사이에 참나무 등 활엽수들이 크게 자라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또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는 심신이 피곤한 사람들에게 좋은 청량제다. 너덜겅바위군을 따라 등산길을 오르면 금정산성 북문에 이르고, 다시 금정산의 최고봉인 고당봉(801m)에 다다른다. 이것이 범어사의 네 번째 비경이다.

덧붙이는 글 | '테마가 있는 나만의 여행' 응모



태그:#가을여행, #범어사, #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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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어난 해: 1942년. 2. 최종학력: 교육대학원 교육심리 전공[교육학 석사]. 3. 최종이력: 고등학교 교감 명퇴. 4. 현재 하는 일: '온천세상' blog.naver.com/uje3 (온천사이트) 운영. 5. 저서: 1권[노을 속의 상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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