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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사 전투

 

1907년 10월, 김태원이 부하들과 문수사(文殊寺)에 머물고 있는 성재 의병진을 찾아갔던 날 밤, 마침 일병들이 기습공격을 해 왔다.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병들의 치밀한 기습 공격에 성재 의병진은 흔들리고 있었다. 이를 본 김태원은 즉각 인솔해 온 부하들에게 명령하였다.

 

“의병이 적을 만나 도망하는 것은 바른 계책이 아니다. 이 캄캄한 밤중에 험한 길을 빠져나가 살기를 바랄 수도 없다. 기왕 죽을 바에야 왜적과 싸우다 죽자. 왜적은 대대로 우리의 철천지원수다. 모두들 한 놈도 남김없이 쏘아라.”
 
고립무원한 성재 의병진에게는 김태원 의병진 가세가 천군만마(千軍萬馬)의 원군이었다. 삽시간에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다. 칠흑 같은 야간 전투는 조준사격이 아닌 지향사격으로 의병군에게는 유리한 전투요, 지형이었다. 우리 의병에게는 구식무기요, 익은 돌담이 방패였기 때문이다.

 

처음 기습공격에 동요하던 의병들은 일병들이 하나 둘 쓰러져가자 기세가 드높아졌다. 문수사에 주둔 중인 의병진을 한꺼번에 일망타진하려던 일병들은 뜻밖에도 의병의 완강한 저항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한 시간 남짓한 전투에 일병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당시의 전투 상황이 <전남폭도사>에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법성포주재소, 영광, 고창, 무장분파소가 합동으로 수색하여 고창군 문수사에 웅거하는 수괴 기삼연 외 그 부하 50명을 공격했으나 총격전 끝에 탄환이 떨어져 퇴각하였다.”

 

그들의 패배를 우회로 시인한 기록이다.

 

기삼연 의병장은 김태원을 만남으로써 대어(大魚)를 얻었고, 김태원도 물을 만난 물고기가 된 셈이었다. 문수사 야간전투에서 크게 공을 세운 김태원은 그 기세를 몰아 고창, 법성포, 장성, 영광, 함평, 담양 등지를 차례로 점령하여 의병 항쟁의 맹장으로 이름을 드높였다. 

 

마침내 독립 의병장이 되다

 

1907년 11월 20일, 장성 백양사 약사암에서 김태원 선봉장이 기삼연 의병장과 향후 전략을 협의했다. 이들은 전투력 극대화를 위해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 연합 의진을 둘로 나누기로 결정하였다.

 

그때부터 김태원은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서 독립하여 함평 영광 나주 등지를 돌며 수백의 의병을 모은 뒤 다시 동생 김율과 부대를 나누었다. 이는 소부대 게릴라 전술이 더욱 유리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김태원 의병부대는 선봉장(先鋒將)에 조경환, 도포장(都砲將)에 최동학, 후군장(後軍將)에 김옥현, 참모장(參謀將)에 유병기를 임명하였다. 

 

이후로 김태원 김율 형제 의병부대는 독자로, 때로는 연합 작전으로 막강 일군 토벌대와 맹렬히 맞섰다. 무신(1908)년 설날을 앞두고 김태원 의병장은 부하 장병들이 설이라도 편히 쉬게 하려고 그믐날 밤 무등산 뒤편 첩첩산중인 무동촌(현, 담양군 남면 무동리)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새해 첫날 아침 날이 밝기도 전에 파수를 보던 초병에게서 일군이 쳐들어온다는 급보를 받았다. 바로 ‘의병 잡는 귀신’으로 소문난 광주 수비대 요시다(吉田勝三郞) 부대가 추격해 온 것이었다.
 
김태원은 번개 같이 즉각 전략을 짰다. 무동촌은 집집마다 돌담인 바, 그것을 방벽으로 이용, 적을 유인한 뒤 일제 사격으로 제압하자는 작전이었다. 돌담은 총알을 막는 방벽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김태원은 부하들을 분산시켜 각 골목에 배치한 다음, 사격술이 좋은 두 의병(姜吉煥, 趙德寬)을 당신 뒤에다 복병으로 엄폐(掩蔽)시켰다.

 

“너희들은 내가 총으로 적장 요시다를 말에서 떨어뜨리거든 그때 일제 사격하라!”
“네, 대장님! 알겠습니다.”

 

청일, 노일전쟁에서 혁혁한 공훈을 세운 바 있는 요시다 수비대장(소좌)은 조선 의병을 ‘오합지졸’로 매우 업신여기고 있었다. 그는 말 위에서 일본도를 치켜든 채 의기 당당하게 무동촌으로 들어왔다. 그의 교만은 하늘을 찔렀다. 김태원 의병장은 침착하게 돌담에 숨어 적장 요시다가 사정거리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몇 방의 총격전이 벌어져도 요시다는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배짱 좋게 진두지휘하면서 돌진해 왔다.

 

 

무동촌 승첩

 

마침내 요시다가 사정권 안으로 들어왔다. 김태원은 이 순간을 하늘이 준 기회로 알고서 방아쇠를 당겼다. 요시다는 김태원 의병장 총소리에 흠칫 놀랐다. 순간 두 의병의 천보총에서 불을 뿜었다. 다른 의병들의 총에서도 일제히 불을 뿜었다.

 

역전의 노장(老將) 요시다는 우리 의병들의 총탄에 보기 좋게 꼬꾸라졌다. 일군들은 자기네 대장이 꼬꾸라지자 허겁지겁 도망가기 바빴다. 김태원은 장검으로 길바닥에 떨어진 요시다의 목을 베었다. 그가 소지한 만리경(쌍안경), 일본도, 육혈포 등도 노획했다. 김태원 의병 부대는 재빠르게 뒷수습을 한 뒤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급히 무동촌을 떠났다.

 

무동촌 전투는 한말 호남 의병사에 빛나는 승전이었다. 일제 군경들이 일당백을 자랑하면서 우리 의병을 무시하던 콧대를 여지없이 꺾어준 쾌거였다.

 

<당서(唐書)>에 나오는 ‘승패병가상사(勝敗兵家常事)라’라는 옛 말처럼, 아무리 용맹한 의병부대일지언정 신식무기와 잘 훈련된 일군과 장기전에 어찌 목숨을 끝까지 부지할 수 있으랴. 이런 사실을 잘 아는 형 태원은 아우 율에게 ‘여사제심서(與舍弟心書)’라는 시를 보냈다.

 

형은 이미 그들 앞에는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라의 안위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사나이는 전장에서 나아가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웃음을 머금고 죽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형이 사랑하는 아우에게 일러주는 비장 글이다.

 

 

國家安危在頃刻  국가 안위가 경각에 달렸거늘
意氣男兒何待亡  의기남아가 어찌 앉아 죽기를 기다리겠는가?
盡忠竭力義當事  온 힘을 쏟아 충성을 다하는 것이 의에 마땅한 일이니
志濟蒼生不爲名  백성을 건지려는 뜻일 뿐 명예를 위하는 것은 아니라네.

 

兵死地含笑入地可也 戊申 二月十九日 舍兄金準書
전쟁은 죽으려는 것, 기꺼이 웃음을 머금고 지하에 가는 것이 옳으리라.
무신(1908)년 2월 19일 형 준이 쓰다.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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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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