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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련사의 흰색 연등들
백련사의 흰색 연등들 ⓒ 유혜준

부처님 오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거리나 산, 절에 매달린 연등 덕분에 석가탄신일이 다가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색깔의 연등이 줄지어 매달려 있는 것을 보면 참 곱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백련사에서 흰색 연등을 처음 보았습니다. 연등이 줄지어 매달려 바람에 흔들리더군요. 연등에는 '극락왕생'이라고 씌어져 있고 이름을 쓴 꼬리표가 매달려 있습니다. 이런 연등도 있구나, 보는 순간 마음이 등을 따라 흔들립니다. 흰색의 의미가 가슴에 와 닿기 때문이지요.

29일, '인도행(인생길 따라 도보여행)' 회원들과 서대문역에서 안산을 지나 홍제천을 거쳐 백련사에 이르는 길을 걸었습니다. 걸은 거리는 얼추 10km정도 됩니다. '인도행'은 걷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지요.

서대문역에서 도보여행 출발합니다. 1번 출구로 나와 직진  방향으로  조금 걷다가 오른쪽 길로 접어듭니다. 길가에 분식집이 여럿 붙어 있습니다. 유독 한 집이 눈길을 끕니다. 아무래도 다른 분식집과 다르기 때문이겠지요. 음식 메뉴를 사진과 함께 붙여 놓았습니다. 라면과 오므라이스를 전문으로 하는 집인가 봅니다. 라면과 오므라이스 종류가 다양하네요.

사진을 보니 먹음직스럽습니다. 아침 식사를 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한동안 발길을 돌리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만뎅이라면, 부치라면은 대체 라면에 무엇을 넣었길래 그런 이름을 붙였을까요?

경기대 앞을 지납니다. 길 건너편의 벽을 담쟁이 넝쿨이 가득 메우고 있네요. 콘크리트 담보다는 담쟁이가 감싸고 있는 담이 더 운치가 있지요.

북아현동에도 재개발 바람이 부나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길이 보입니다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길이 보입니다 ⓒ 유혜준

이 동네는 마포구 북아현3동입니다. 이 지역도 재개발사업이 시작되나 봅니다. 조합을 설립한다는 현수막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길 양쪽으로 부동산업소가 상당히 많습니다. 부동산업소 창에는 '황금빛 미래' 운운하는 글귀와 함께 커다란 고층 아파트단지 그림이 붙어 있군요.

개발바람이 불면 부동산 값이 올라가고, 덩달아 전세 값도 뛰지요. 이 동네가 재개발되면 원주민 중 몇이나 그 아파트에 입주하게 될까, 궁금해집니다. 세입자들은 전세 값이 더 싼 지역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하던데.

완만한 경사의 비탈길을 오르니 아파트단지가 보입니다. 그 옆의 샛길로 들어서니 연분홍빛 영산홍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습니다. 꽃 옆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잘 만들어진 나무계단을 오릅니다. 그 끝에 흙길이 펼쳐집니다. 그 길에 노란색 애기똥풀꽃이 무더기로 피어 있습니다.

전철역부터 10분 남짓 걸었을 뿐인데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네요. 도시에서 자연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들어선 것 같습니다.

너른 공터 앞에 모여서 준비운동을 합니다. 걸어야 할 길이 그리 많지 않더라도 몸을 풀어주면 좋겠지요. 가볍게 몸을 풀고, 주변을 둘러봅니다. 겨울의 긴 잠에서 깨어난 나무들이 여름을 준비하는 기척이 느껴집니다. 여린 연두색 나뭇잎들이 참으로 싱그러워 보입니다. 여름에 나뭇잎은 초록빛이 진해져 강인한 느낌을 주지요. 저는 이맘때의 나뭇잎 색깔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합니다.

숲 속 오솔길을 걷는 걸음이 가볍습니다. 부드러운 흙길이 반겨주는 것 같네요. 안산근린공원이라고는 하나 안산 역시 산이기 때문에 나무들이 제법 많습니다. 아름드리나무는 없지만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곳이 많았습니다. 덕분에 걷기와 더불어 삼림욕도 실컷 했습니다.

이 날도 참 많은 길과 만났습니다. 길을 걸으면서 지금 걷고 있는 길을 먼저 걸어간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길은 언제 처음 열렸을까, 궁금합니다. 처음에 한 사람이 지나갔을 것이고, 뒤를 이어 다른 사람이 그 길을 걸었겠지요. 이어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을 것이고, 해서 길은 다져지고 걷기 쉽게 바뀌었겠지요.

저만치 앞서 가는 일행의 뒷모습을 봅니다. 저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길을 걷고 있을까? 자신에게도 묻습니다. 너는 왜 길을 걷는가?

길을 걷다보면 이정표가 나와 가야 할 방향을 알려줍니다. 가끔 길을 잘못 들 때도 있지만 이정표는 그럴 때마다 큰 도움이 되지요. 가던 길을 되돌아 나오게 하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게 하고, 가던 길을 계속 가게 하지요. 인생길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걷는 사람들에게는 이정표가 필요하다

 길을 알려 주는 이정표
길을 알려 주는 이정표 ⓒ 유혜준

통나무를 가지런히 놓아 만든 계단 끝에서 갑자기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산악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네요. 내리막길인데 아주 시원스럽게 내려옵니다. 우와, 대단하다. 감탄하는 사이, 앞서 걷던 일행이 박수를 쳐줍니다.

안산의 봉수대로 가는 길이 나옵니다만 봉수대는 이번 도보여행의 행선지가 아니라 가는 길만 살짝 훔쳐보고 금화체력단련장 방향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길을 따라 걷다보니 젊은 여자 한 명이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있습니다. 옆에 커다란 스케치북 비슷한 것이 펼쳐져 있고 만화 컷 같은 밑그림이 그려져 있네요.

이런 사람 보면 뭐 하나, 궁금하죠? 당연히 물어봅니다.

"학생인데요, 숙제로 영화촬영 중이에요."

이 학생, 벌써 여러 사람이 물어봤는지 아주 간결하고 명쾌하게 대답합니다. 그 말에 고개를 들어보니 길 안쪽에 STAFF라고 쓴 조끼를 입은 남자가 뒷모습을 보인 채 서 있습니다. 배우는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옵니다. 영화관련 학과 학생들인가 봅니다.

백암 약수터를 지나고 성보천 약수터를 지나칩니다. 지니고 간 생수 덕분에 약수터는 힐끗 보기만 합니다. 바가지로 떠 마실 만큼 물이 고여 있지 않네요.

걷기 아주 좋은 날입니다. 하늘은 흐려져 있지만 그렇다고 비가 내릴 것처럼 꾸물거리지는 않습니다. 이런 날은 햇볕이 강하지 않아 좋습니다. 챙이 긴 모자를 썼더니 시야가 자꾸 가려져 답답합니다. 챙이 뒤로 가도록 모자를 돌려쓰기도 하고 벗기도 하면서 걷습니다.

더운 날이 아닌데도 걷노라니 땀이 제법 많이 납니다. 이따금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노라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럴 때 바람이, 공기가 달다고 한다지요.

한쪽에는 자작나무가, 다른 한쪽에는 쉬나무가 빼곡하게 심어져 있는 길을 지납니다. 나무사이로 난 오솔길을 걸으니 서울에서 뚝 떨어진 아주 먼 곳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안산 산림관리초소 앞을 지납니다. 이제 안산근린공원을 벗어나는 것이지요. 백련사 방향으로 갑니다. 잘 꾸며진 포장도로 옆에 시비들이 서 있습니다. 유치환의 <바위>가 바위에 새겨져 있네요. 투박한 나무에는 김소월의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윤동주 시비도 보입니다.

김소월의 시를 멈춰 서서 읽습니다. '산'입니다.

오늘도 하룻길
칠팔십 리를
돌아서서 육십 리는 가기도 했소

시인도 걷기를 즐겼나 봅니다.

백련사에서 만난 흰색 연등들

 홍제천은 징검다리 공사중입니다.
홍제천은 징검다리 공사중입니다. ⓒ 유혜준

길이 끝나는 곳에서 공사가 한창인 홍제천과 만납니다. 이런, 물이 완전히 말라 있네요. 포크레인이 열심히 땅을 파고 있고, 내를 가로질러 징검다리를 놓고 있습니다.

서대문 잔디구장 앞을 거쳐 백련사에 도착합니다. 이 곳은 서대문구 홍은동입니다. 절에 왔으니 내부를 둘러봐야겠지요. 백련사는 신라 경덕왕 6년(서기 747년) 진표 율사에 의해 창건된 우리나라 최초·최대의 정토도량이랍니다. 상당히 오래된 절이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그런 느낌이 별로 들지 않습니다.

절 안으로 들어가니 줄지어 매달린 연등이 눈길을 확 잡아끕니다. 연등이 흰색입니다. 흰색 연등이 이렇게 많이 매달린 것은 처음 봅니다. 연등에는 극락왕생이라고 씌어져 있고 꼬리표가 달려 있습니다. 꼬리표에는 사람의 이름이 써 있고, 끝에 '영가'라고 덧붙여져 있습니다. 영혼이라는 의미지요.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죽은 자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고자 매단 연등이겠지요.

분홍색과 연두색 연등들도 있건만 흰색 연등에 마음을 빼앗겨 한동안 그것들을 봅니다. 삶이란 무엇이며, 죽음이란 무엇인가. 길을 걷고 걸어 이곳까지 왔더니 죽음이라는 화두가 흰색 연등이 되어 앞을 가로막습니다. 백련사가 이 날 도보여행의 끝이 아니건만 길의 끝에 도착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 것은 순전히 흰색 연등 탓일 겁니다.

백련사에서 내려와 백련사 능선길을 걸었습니다. 길을 내려가다가 뜻밖의 사람을 만납니다. 할머니 한 분이 길목에 앉아 야채를 팔고 있습니다. 시금치, 돈나물, 장다리, 쪽파 등입니다. 이 할머니, 죄다 유기농이라고 설명하시네요. 신장이식 수술을 받고 3개월 시한부라는 선고를 받았으나, 유기농 야채 직접 키워 먹으면서 지금까지 16년을 살았다고 하십니다.

왼손 엄지손톱이 우툴두툴하게 기형적으로 변해 있어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신장이식 후 약을 계속 먹어서 부작용이 생겼답니다. 할머니가 가져온 야채는 직접 키운 것이라네요. 일행 중의 두 사람이 야채를 사서 배낭에 챙겨 넣습니다. 주부들은 아무래도 저녁 찬거리를 걱정해야 하니까요. 덕분에 졸지에 산에서 장을 본 셈이 되었네요.

그 길을 따라 내려가니 홍은동 현대아파트로 가는 길이 나옵니다. 산길에서 내려오니 역시 아파트 단지가 모습을 드러내는군요. 다시 도시 안으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납니다. 걸은 거리는 얼추 10km, 걸린 시간은 네 시간입니다.

덧붙이는 글 | [걸은 길] 서대문역 - 경기대학교 - 안산근린공원(봉수대 정상으로 오르지 않고 산허리를 길게 돌았습니다) - 홍연교 - 백련사 - 백련사길 - 학골마을 - 홍제역

[걸은 거리] 약 10km



#도보여행#백련사#서대문역#홍제역#인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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