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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비.  서울 송파에 있는 삼전도 비 용머리 부분. 2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고 있다.
삼전도비. 서울 송파에 있는 삼전도 비 용머리 부분. 2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고 있다. ⓒ 이정근


"귀국이 조선에 사신을 보낸다는 말이 있던데 언제 보낼 예정이오?"
"방침이 정해지면 알려 줄 것이오."

"준비가 소홀하여 결례가 있을까 염려되어서입니다."
"이번 칙사의 임무에는 황제 폐하의 공덕비가 포함되어 있소. 고치라는 삼전포(三田浦) 비석은 고쳐 세웠소?"

"대국에서 고쳐 세우라는 명이 있었으니 고쳐 세웠을 것입니다."

대답은 했으나 비석을 고쳐 세웠는지 세자는 모른다. 무슨 영광의 비(碑)라고 서둘러서 했겠는가. 오늘날까지 치욕의 자화상으로 남아있는 삼전도비가 현안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동안 청나라는 '비문을 수정하라' '만주문자를 넣어라' '귀부가 작다' 등등 삼전도비에 대해서 간섭과 트집이 심했다.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던 인조가 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항복의 예를 행하고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1.조선은 청나라에 신의 예를 행한다. 2.명나라와 교호를 끊는다. 3.세자와 대군을 볼모로 보낸다. 4.군대를 보낸다. 5.가도를 공격할 때 50척의 병선을 보낸다. 6.사신파견은 명의 구례에 따른다. 7.도망 포로는 쇄환한다. 8.혼인으로 화호 한다. 9.조선은 성을 쌓거나 보수하지 않는다. 10.귀화인을 돌려보낸다. 11.조선은 세폐를 보낸다. 이것이 전부다.

말이 강화조약이지 청나라의 일방적인 요구사항을 명문화 한 것이다. 조약문을 세밀히 살펴보면 청나라도 심사숙고하여 면밀히 검토한 조약문이 아닌 것 같다. 승자의 우월적 지위에서 강요한 조약 어디에도 삼전도에 공덕비를 세우라는 조항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삼전도비가 태어났을까? 조선 강토를 짓밟은 청나라 군대가 철군을 완료한 6월 26일. 인조가 묘당에 하명했다.

"삼전도의 단소(壇所)를 고쳐 쌓고 각(閣)을 만들라."

대소신료들은 어안이 벙벙했지만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인조 역시 자신이 경멸하던 오랑캐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행한 수항단이 무슨 아름다운 추억의 장소라고 수리하라 했을까? 비국의 주청을 받아들여 비석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청나라는 대환영했다. 환상적인 제안이지 않은가. 자신들이 유린한 조선 땅에 전승기념비를 세우 두고 싶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조약체결 당시 청나라는 그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상태에서 조약은 체결되었고 지나간 일이 되었다.

자신들이 놓친 것을 찾아주고 스스로 세우겠다하니 기특하고 갸륵했다. 그렇지만 속내를 감추고 '만주문자를 넣어라' '몽골문자를 새겨라' '귀부를 크게 하라' 등등 요구 조건을 내걸어 조선을 몰아세우는 지렛대로 사용했다. 역사교과서를 비롯한 모든 사서에 삼전도비는 청나라의 강요에 의해 세워진 비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청나라의 강요는 조선이 비를 세우겠다고 제안한 이후에 나온 요구다.

삼전도비.  삼전도 비 전면에 몽고 문자가 새겨져 있다.
삼전도비. 삼전도 비 전면에 몽고 문자가 새겨져 있다. ⓒ 이정근


비국(備局). 북방에 압록강을 경계로 대륙세력과 맞닿아 있고 남방으로 바다건너 해양세력 일본과 접하고 있는 조선은 항상 변방 방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성종 조에 이르러 왜구와 여진의 침입이 끊이지 않자 보다 실정에 맞는 대책을 수립하기 위하여 지변사재상(知邊事宰相) 회의를 열었다. 여기에는 3정승과 국경 지방의 요직을 지낸 인물 그리고 병조판서가 당연직으로 참여했다.

중종 5년. 삼포에 왜구가 침입하자 지변사재상을 급히 소집하여 방어책을 논의하는 한편 그동안 외적이 침입할 때만 운용하던 지변사재상 회의를 합의체로 확대 개편하는 한편 비상시국에 대비하도록 상설화했다. 그래서 '비변사'라고 부른다. 비국의 주 임무는 대비하는 예방이었지만 항상 뒷북을 쳤다.

임진왜란을 맞은 선조가 전쟁수행을 위한 최고기관으로 비국을 활용하면서 비변사는 필요이상 비대해졌다. 조정안에 작은 군사정부와 같은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비변사는 국방은 물론 국정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고 의정부의 기능을 약화시켰다.

'인조반정'이라는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인조의 비호를 받은 비국은 물을 만난 고기와도 같았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비국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모든 일을 비국에 의존하던 인조는 이제 비국에 끌려가는 형국이 되었다. 이러한 비국이 국가 안위에 대한 장기적인 국방계획을 내놓지 않고 '청나라 장수와 역관에게 뇌물을 주자'고 꼼수를 부려 애꿎은 신하를 희생시켰다.

'황제의 공덕비를 세워 청나라에 헌상하자'며 알아서 기자고 했다. 인조는 그것이 비책이라고 따라갔다. 용렬한 임금과 군사문화의 합작품이다. 이렇게 임금이 헤매고 있으니 죽어나가는 것은 백성이었고 흔들리는 것은 국가였다. '알아서 기자'는 대국에 대한 외교는 오늘날에도 조공외교라는 비판을 받으며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다.

삼전도 비. 서울 송파에 있다.
삼전도 비.서울 송파에 있다. ⓒ 이정근

수항단을 수리한 인조가 장유, 이경전, 조희일, 이경석을 편전으로 불러들였다. 이들은 척화론에 서지 않은 당대의 문장가들이었다.

"삼전도에 황제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을 세워야 하겠으니 경들이 비문을 지으시오."
"소신은 지병으로 인하여 글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제일 연장자 이경전이 몸을 사리고 나섰다. 지병을 이유로 내세웠지만 명나라에 배은망덕한 글을 올리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글은 예문관에서 지어 올려야 마땅한 줄로 아룁니다."
조희일이 꽁무니를 뺐다.

"경은 대제학이 궐위라는 사실을 몰라 그런 말을 하는 거요?"
때마침 예문관 대제학이 빈자리였다.

"소신은 글을 지을 수 없습니다."
대쪽 같은 성격의 장유가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최명길과 함께 현실을 받아들이자는 대열에 섰으나 우리나라를 침공한 청나라를 칭송하는 글은 남기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장유는 조선 중기의 4대가로 꼽히는 명문장가다.

"굽어 살피소서."
제일 연소자 이경석이 머리를 조아렸다.

"경들은 과인의 명을 거역할 것인가? 하루 안에 지어 올려라."
임금의 명이 떨어졌다. 각각 집으로 돌아온 신하들은 끙끙 앓았다. 글을 지어 올리자니 역사가 두렵고 거역하자니 임금의 진노가 무서웠다. 이경전은 아예 붓을 잡지 않았고 다른 신하들은 괴로운 마음으로 붓을 잡았다.

이튿날. 이경전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아예 궁궐에 들어오지 않았고 조희일은 거칠게 쓴 글을 가지고 들어왔다. 결국 장유와 이경석이 지은 삼전도 비문을 청나라에 보냈다. 조선에서 보낸 비문을 검토한 범문정은 '장유가 지은 것은 인용한 것이 온당함을 잃었고 이경석이 쓴 글은 쓸 만하나 중간에 넣을 말이 있으니 조선에서 고쳐 쓰라'고 돌려보냈다.

비문을 돌려받은 인조는 이경석을 불렀다.

"저들이 이 비문으로 우리의 향배를 시험하려 드니 우리나라의 존망이 여기에 달렸다. 월나라 구천(句踐)은 회계산에서 오나라의 신첩(臣妾) 노릇을 했지만 끝내는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공을 이루었다. 훗날 나라가 일어서는 것은 오직 내게 있는데 오늘 할 일은 다만 문자로서 그들의 마음을 맞추어 사세가 더욱 격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연려실기술>

이경석에게 낙점되었다. 제일 연소자가 떠맡은 것이다. 일은 어른들이 만들어 놓고 욕스러운 일은 연소자 몫이었다. 산성에서 목소리를 높여 척화를 주장하던 대신들은 빠지고 윤집과 오달제라는 젊은이가 희생되었다. 청계천에서 청소년들이 촛불을 밝히고 있으니 오늘날에 그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장유유서(長幼有序)가 참으로 훌륭하게 존중되는 나라다.

당시 임금을 비롯한 사대부들은 대국에 아부하여 면피하자는 얕은 수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370여년이 흐른 오늘날의 후손들에게 치욕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물론 비석이 없다고 역사적 사실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삼전도 비를 바라보는 이 시대 한반도인의 가슴은 아프다. 영양소로 섭취한 미제 우육이 370년 후. 어떠한 후유증으로 우리 앞에 다가올 지 그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삼전도 비. 후면에 한자로 ‘대청황제공덕비’라 새겨져 있다. 이경석이 짓고 오준이 썼다.
삼전도 비.후면에 한자로 ‘대청황제공덕비’라 새겨져 있다. 이경석이 짓고 오준이 썼다. ⓒ 이정근


인조의 당부를 받고 집으로 돌아온 이경석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허공을 바라볼 뿐 붓을 잡지 않았다. 이경석은 정종의 열 번째 아들 덕천군 이후생의 6대손이다. 대대로 명나라를 섬겨온 가문의 후손이다. 그러한 자신이 명나라를 부정하고 청나라를 칭송하는 비문을 남겨야 한다니 도무지 붓을 잡을 수가 없었다.

고민하던 그는 목욕재계하고 사당에 들어가 조상께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붓을 잡은 그는 통석을 삼키며 미친 듯이 써 내려갔다. 제 정신이 아니었다. 붓을 놓은 그는 "글공부를 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된다" 며 통곡했다. 그리고 "수치스런 마음 등에 업고 백길 어계강(語溪江)에 몸을 던지고 싶다"는 시를 남겼다.

비문은 완성되었으나 비석은 세우지 않았다. 한강 상류에서 장대석을 운반해놓고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칙사가 조선에 나가 삼전도 비를 점검하겠다니 세자관에 비상이 떨어졌다.

종전 후 청나라에서 처음 나가는 사신이다. 청나라의 조선 통 용골대가 칙사라 일컬었다. 그것도 중전 책봉, 세자책봉, 삼전도비 점검 3편이란다. 인원도 1백여 명이 넘는다 한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등허리가 휘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모르긴 하지만 국고도 바닥날 지경일 것이다. 본국에 긴급 파발마를 띄운 세자는 사신 편수 줄이는 작업에 착수했다.


#소현세자#삼전도비#소고기#조공외교#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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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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