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0억 달러(약 850조원). 지난 10월 3일 미국 하원이 한 차례 부결 끝에 통과시킨 긴급 금융 구제 액수는 전세계 언론의 머리기사를 장식했다. 7110억 달러. 10월 1일부터 내년 9월 30일까지 사용될 미국의 군사비이다. 구제금융 액수보다 110억 달러가 많지만, 이 액수를 주목한 언론은 그리 많지 않았다.
미국 언론과 국민들은 '왜 국민 혈세로 월스트리트를 구하려고 하느냐'며 볼멘소리를 하고 있지만, 미국 연방 정부 예산의 20% 넘게 차지하는 군사비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감각하다. 이에 따라 복지 예산은 크게 위축되고 있는 반면에, 군사비에 대한 감축 여론은 그리 높지 않다.
'변화'를 전면에 내걸어 백악관 입성을 눈앞에 두고 있는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조차 군비 감축을 말하지 않고 있다. 존 매케인 캠프에 반격에 빌미를 주어 '다 된 밥에 코 빠뜨리는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7000억 달러의 금융 구제 예산과 7110억 달러의 군사비는 오늘날 미국의 모순을 여실히 보여준다. 미국 세계 패권전략의 한손에는 금융의 세계화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가 있었고, 다른 한손에는 그 어떤 나라도 따라올 수 없는 막강한 군사력이 있었다.
그러나 파생금융상품으로 살쪄온 미국식 신자유주의는 '대량살상 금융무기'(워렌 버핏의 말)라는 오명을 낳으면서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다른 한편 부시 행정부는 임기 8년(회계연도 2002-2009) 동안 군사비로 약 4조 3천억 달러를 쓰면서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모순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금융위기가 실물경제 위기로까지 번지면서 미국 경제가 어두운 터널로 접어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비 증액에는 햇볕이 쨍쨍하다. 미국 정치인들이 군산복합체의 로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상당수 미국 국민이 언론과 안보전문가들이 유포해온 '국가안보'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군사비 축소 말했다가 혼쭐난 오바마오바마는 작년 10월 연설에서 "나는 낭비가 심한 군사비 가운데 수백억 달러를 삭감할 것"이라고 말했다. "성능이 입증되지 않은 미사일방어체제(MD)에 대한 투자를 줄이고, 우주를 군사화하지 않을 것이며, 미래의 전투체계 개발을 늦출 것"이라고 했다.
이 발언은 미국의 금융위기가 본격화되기 이전에 나온 것이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금융위기가 들불처럼 퍼지고 있는 오늘날, 군사비 삭감을 더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이 '오바마답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군비 감축을 좀처럼 입에 올리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는 9월 초 ABC 방송의 '이번주(This Week)'에 출연해, "우리는 미국의 군대 규모를 늘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오바마 역시 이러한 국방정책이 민주당 내 좌파 인사들과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말이다.
오바마가 이처럼 국방정책에서 후퇴한 이유는 매케인 진영의 역공이 미국 유권자들에게 먹혀 들어가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매케인은 "오늘날 세계는 너무나도 위험하기 때문에 군비감축은 너무나도 위험한 정책"이라며 오바마를 비난해 왔다. 특히 오바마가 최근 군대를 늘리겠다고 공약하고 나서자, "오바마는 극좌파들에게 말할 때는 그들이 듣고 싶은 얘기를 하고, 국민 전체에게 말할 때는 여러분이 듣고 싶은 얘기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물론 금융위기가 미국 대선을 압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매케인의 안보 공세가 판세를 뒤집기는 어려울 듯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후보간의 군사비 논쟁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신기루와 같은 '절대안보' 신화에 사로잡혀 있는 미국 여론과 군사적 수월성에 대한 미국 엘리트 집단의 집착은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쉽게 바뀌지 않고 있다. 또한 '변화'를 앞세운 오바마마저 이러한 '미국병'을 치유하겠다고 나서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의 금융위기는 앞으로 미국 안보정책, 특히 군사비 지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일단 매케인은 국방비 지출과 퇴역군인 지원, 그리고 신병 수급을 위한 예산을 제외하곤 다른 분야의 예산은 '동결'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군사 관련 예산은 앞으로도 계속 늘리겠다는 의미이다. 반면,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바마는 군사비 감축을 공약으로 내세우지 않고 있다. 효율적인 국방비 지출을 약속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미국 경제의 오늘과 내일을 볼 때, 최소한 군사비가 계속 늘어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부시 행정부의 감세정책과 막대한 전비 지출, 그리고 긴급 금융구제 비용 지출로 미국 정부의 재정적자는 무려 4조 달러에 달한다. 앞으로 이자를 갚기도 버거운 상태인 것이다.
더구나 금융위기 여파로 빈곤, 실업, 주택난, 교육, 의료보험 등 사회복지 지출 수요는 엄청나게 늘어날 수밖에 없다. 차기 미국 정부가 이러한 '인간안보'상의 요구를 무시하고 '국가안보'를 위한다는 미명 하에 군비지출을 줄이지 않으면, '미국병'은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예고해준다.
물론 반대의 상황도 예상해볼 수 있다. 미국이 경기부양을 위해 군수산업체에 대한 지원을 늘리고 새로운 전쟁을 일으켜 재고 무기를 소비하려고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기 때문이다. 대선 후보의 성향과 정책을 고려할 때, 오바마보다는 매케인이 이러한 '도박'을 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러나 그의 당선 가능성은 점차 희박해지고 있다.
군비감축이 '미국병' 치료제회계연도 2009년의 미국 군사비는 7110억 달러로 2차 대전 이후 최대 규모이다. 신냉전이 절정에 달했던 레이건 때보다도 많고, 다른 모든 나라의 군사비를 합친 액수와 비슷하다. 그러나 이러한 막대한 군사비 지출에도 불구하고 '팍스 아메리카나의 종말'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고 있다. 외부의 적에만 주목한 나머지 내부의 모순에는 눈감고, 국제 문제를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와 사용을 통해 풀려고 했던 것이 부메랑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군비감축은 '미국병' 치유의 핵심이다. 미국이 군사비를 줄여 내부적으로는 사회복지 증진에, 외부적으로는 비군사적 문제 해결에 사용하지 않는 한, 추락한 미국의 위신은 회복될 수 없다. 미국이 군사비를 줄여 대안 에너지 개발에 투입하지 않는 한, '석유 중독증'과 '전쟁 중독증'을 치유할 길은 없다. 미국이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통해 지구를 지배하려는 망상을 버리지 않는 한, 이미 다극체제로 접어들고 있는 국제질서에서 미국의 설자리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가 축배가 아니라 독배라는 것이 분명해진 오늘날, 미국이 7110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군사비에 의존해온 안보정책을 바꿔야 할 까닭이 아닐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정욱식 기자는 평화네트워크(www.peacekorea.org) 대표로 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