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곳곳에서 너무나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 망각하기 쉽지만, 인류사회는 지구를 수십 번 파괴할 수 있는 핵무기와 불안한 동거를 계속하고 있다. 미소 간의 냉전이 정점에 달했던 1980년대 초반에는 7만개를 넘어섰다가 냉전 해체 이후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아직도 지구상에는 3만개 가까운 핵무기가 남아 있다.
더구나 미국과 러시아는 새로운 핵군비경쟁을 벌이고 있고, 중국도 가세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북한과 이란은 각각 9번째와 10번째 핵보유국 문턱에서 서성거리고 있고, 이스라엘·인도·파키스탄 등 핵확산금지조약(NPT) 비회원국들도 핵무기를 안보의 보루로 삼고 있다. 칼로 여객기를 납치해 뉴욕의 세계무역센터를 무너뜨린 알-카에다를 비롯한 반미 테러집단은 호시탐탐 핵무기를 손에 넣을 궁리를 하고 있고, 이는 미국 내에서 '핵 테러 9.11'의 공포를 낳고 있다.
이처럼 21세기 들어 오히려 핵위협이 확산되자, 과거 미국 핵전략의 중심에 있었던 워싱턴 외교안보계의 거물들이 '핵무기 없는 세상'을 촉구하고 나서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헨리 키신저·조지 슐츠·윌리엄 페리·제임스 베이커·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등 수십명의 전직 고위관료들이 2007년과 2008년에 잇따라 <월스트리트저널>에 공동기고문을 보내 "핵무기 공포가 다시금 커지고 있는 오늘날이야말로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며, 미국이 이를 주도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이에 자극과 압력을 받은 버락 오바마와 존 매케인 역시 핵무기 감축을 공언하고 있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핵무기 없는 세상'을 그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미국에게 핵무기는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절대반지처럼 절대권력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바마와 매케인의 핵정책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은 최초의 핵보유국이자 최강의 핵강대국이면서, NPT를 비롯한 핵비확산체제를 주도해온 나라이다. 또한 NPT를 비롯한 국제기구와 다른 나라의 정책에도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이다. 이는 인류사회의 핵의 미래가 미국의 핵정책에 따라 상당 부분 좌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핵 문제 역시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국과 미국이 말하는 '한반도 비핵화'와 북한이 주장하는 '조선반도 비핵화' 사이에는 엄청난 괴리가 존재한다. '한반도 비핵화'는 사실상 '북한의 비핵화'를 의미하는 반면에, '조선반도 비핵화'는 미국 핵무기의 남한 내 재반입 및 일시 통과 금지와 함께 '미국 핵우산의 철수'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6자회담 및 북미간의 협상이 문제의 핵심에 접근할수록, 미국 핵전략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행불일치의 미국 핵전략비록 공약(空約)으로 끝났지만, 대부분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핵무기 없는 세상'을 공언했었다. 핵무기가 '반(反)인류 무기'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도덕적으로나마 우위에 서고 싶은 탓이었다. 아이젠하워는 "인간의 경이적인 발명품인 원자력이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 생존에 기여하는데 사용될 수 있도록 온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 케네디는 "세계는 자신의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감옥이 되어서는 안된다"며 핵군축에 본격 나서겠다고 공언했다.
닉슨 역시 "핵군비경쟁을 중단하고 핵무기 폐기를 이룰 수 있는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강구하겠다"고 했고, 레이건은 "핵무기는 전적으로 비이성적이고 비인간적이며 지구의 생존과 문명을 파괴할 수 있는 살상 무기"라며 "모든 핵무기의 폐기"를 천명하기도 했다. 아버지 부시와 클린턴도 NPT에 명시된 핵폐기 의무를 이행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는커녕 다양한 형태로 미국의 핵전력을 강화시켰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아들 부시는 차라리 솔직하기라도 했다. 그는 역대 대통령들과는 달리 핵무기 폐기를 공언하지 않았다. 오히려 핵선제 공격 전략 채택과 포괄핵실험금지조약(CTBT) 비준 거부, 새로운 핵무기 개발 추진과 미사일방어체제(MD) 구축 등으로 미국 핵전략의 속살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부시의 이러한 핵전략은 부메랑이 되어 미국은 물론 국제사회의 질서를 요동치게 하고 있다. 미국의 핵선제공격 대상에 포함된 북한이 발끈하면서 NPT에서 탈퇴해 핵무기 카드를 다시 꺼내들었다. 북한·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지목된 이란 역시 '평화적 핵이용'을 명분으로 핵개발에 나서고 있다. 러시아는 핵선제공격의 권리는 미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며, 자신도 선제공격에 나설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핵전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부시가 21세기 경쟁자로 지목한 중국 역시 '최소 억제전략'에 만족할 수 없다며 핵전력 강화에 나서고 있다.
'부시 이후의 미국'은 달라질 것인가?그렇다면 부시 이후의 미국은 달라질 수 있을까? 일단 민주당이든, 공화당이든 미국 정부가 핵무기를 안보정책의 중심으로 삼아왔다는 점에서, 대선 결과가 미국 핵정책의 근본적인 변화를 수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의 핵정책에 대한 미국 안팎의 비판 여론이 대단히 강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누가 당선되든 부시보다는 개선된 핵정책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또한, 오바마는 대체로 국제주의를 강조하는 입장이고, 매케인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일방주의도 마다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구체적인 정책에 있어서는 두 후보간에 적지 않은 차이가 존재한다.
우선 NPT에 명시된 핵무기 감축 및 폐기에 대한 정책을 전망할 필요가 있다. 부시 행정부는 러시아와의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을 거부하고 '무늬만 핵감축'인 전략공격무기감축조약(SORT)을 추진해 국제사회로부터 강한 비판에 직면한 바 있다. 그런데 미국의 핵폐기 공약 이행 여부는 국제사회 전체의 핵무기의 미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안이다.
이와 관련해 오바마는 "나는 핵 억제력이 필요하다고 믿는다"면서도 "미국은 너무 많은 핵무기를 갖고 있다"며 감축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미국 일방적으로 감축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러시아 등 핵보유국과의 협상을 통한 상호간의 감축을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매케인 역시 "가능한 한 가장 낮은 수준의 핵 태세를 유지하겠다"고 말해 핵무기 감축 필요성에는 동의하고 있다.
차기 미국 정부의 핵감축 여부는 러시아와의 협상에 상당 부분 의존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핵감축은 러시아와의 군축 협상 결과에 따라 이뤄져왔을 뿐만 아니라, 오바마와 매케인 모두 일방적인 핵감축이 아니라 러시아와의 상호 감축을 선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러시아는 향후 핵감축 협상을 미국의 동유럽 미사일방어체제(MD) 배치 계획과 연계시키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차기 미국 정부가 동유럽 MD를 강행할 경우, 미러 간의 핵군축 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해 매케인은 동유럽 MD 강행을, 오바마는 다소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음으로 부시 행정부가 임기 말에 들고 나온 '핵탄두 대체(RRW: Reliable Replacement Warhead) 프로그램'도 주목을 끈다. 국제사회의 반발과 의회의 반대에 막혀 지표관통형 핵무기(일명 벙커버스터) 개발을 포기해야 했던 부시 행정부는 2007년부터 노후한 핵탄두를 신뢰할 만한 것으로 대체한다는 명분으로 RRW 프로그램을 추진해오고 있다. 핵탄두 속에 있는 플루토늄의 수명이 다 되어가기 때문에, 이들을 새로운 핵탄두로 교체하지 않으면 미국 핵전력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기존 핵탄두의 수명이 최소 85년은 되기 때문에, RRW 프로그램이 불필요하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최소한 85년 동안 핵무기를 계속 갖게 되는데, 이것이 노후하다는 이유로 새로운 핵탄두를 가지려고 한다면, '미국은 핵무기를 영원히 포기할 생각이 없다'는 국제사회의 의구심을 자극해 핵확산이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이에 따라 미국의 평화운동단체들은 RRW를 저지하는 것을 핵심적인 활동 목표로 삼아왔다. 이와 관련해 오바마는 "새로운 핵무기 개발을 승인하지 않겠다"고 말해 RRW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인 반면에, 매케인은 "미국의 억제력을 유지하는데 반드시 필요하다면, 새로운 핵무기 개발을 지지하겠다"는 입장이다.
'부시 이후의 미국'이 포괄핵실험금지조약(CTBT)에 비준할 것인가의 여부도 큰 관심거리이다. 과거 클린턴 행정부는 CTBT에 서명했고, 상원에도 비준을 요구한 바 있다. 그러나 1999년 공화당 주도의 상원과 2001년 출범한 부시 행정부는 CTBT가 미국의 새로운 핵무기 개발에 차질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이 조약에 비준동의하지 않았다.
CTBT와 관련해 오바마는 일찍부터 CTBT 비준을 대선 공약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1999년 CTBT 비준 표결 당시에 반대표를 던졌던 매케인은 지난 6월 초 핵정책 공약을 발표하면서 "이 조약의 미래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고 있다"며, 미국 핵전략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비준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오바마 '부시 독트린' 폐기, 매케인 계승?미국이 앞으로도 핵선제 공격 전략의 유지 여부도 큰 관심거리이다. 미국이 법적 구속력을 갖춘 소극적 안전보장을 반대하거나 핵선제 공격 전략을 채택하는 것은 국제 핵비확산체제의 가장 큰 문제거리로 지적되어왔다. 미국 스스로가 필요하다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다른 나라들에게 핵무기를 개발․보유하지 말라는 요구를 하는 것은 정당성을 갖기 힘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부시 독트린'에 의해 북한·이란 등 "깡패국가" 혹은 "악의 축"으로 지목되어 선제공격 대상으로 거론된 나라들은 미국의 핵전략을 자신의 핵개발의 정당한 근거로 삼아왔다. 또한 미국이 핵선제 공격 전략을 채택하면서 러시아·프랑스·영국 등도 대량살상무기 위협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비치기도 했고, 줄곧 무조건적인 소극적 안전보장을 확약했던 중국도 이를 재고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인 바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향후 미국이 소극적 안전보장에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는 핵비확산뿐만 아니라 핵보유국의 핵전략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 2009년 1월에 백악관을 떠나는 부시 행정부가 임기 내에 소극적 안전보장에 관한 정책을 변경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이에 따라 미국의 차기 정부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관심이 모아진다. 오바마는 "나는 그 누구에게도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공언해 핵무기 사용에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을 밝히고 있다. 반면, 매케인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순진하다"며 핵 불사용 입장을 밝힌 오바마를 비난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의 무력 사용에는 모든 옵션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결론적으로 오바마는 다른 나라들이 핵무기를 갖고 있는 한 미국도 핵 억제력을 유지하겠지만, 동시에 '핵보유국 정상회담' 등을 개최해 '핵무기 없는 세계'를 향해 미국이 지도력을 발휘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반면 매케인은 핵무기 감축을 추진하겠지만, 미국 지도력과 영향력의 핵심에는 핵무기를 비롯한 막강한 군사력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어서 그의 당선시 대규모의 핵군축을 기대하긴 힘들 것으로 보인다.
덧붙이는 글 | 정욱식 기자는 평화네트워크(www.peacekorea.org)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최근 강정민 핵공학 박사와 함께 <핵무기: 한국의 반핵문화를 위하여>라는 책을 냈습니다. 핵무기에 대한 역사적·철학적·과학적·안보적 의미를 포괄적으로 담았습니다.